<76화>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뺨에서 떨어져 나간 손은 거짓말처럼 멀쩡했다.
그런데 무심코 내린 시선에,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자신의 손이 보였다.
엘렌이 물었다.
“전하.”
“이야기하지요.”
“……전하께서는 정말 일체의 망설임도 없으십니까?”
그녀의 물음에 그가 조금 곤란하다는 듯 웃더니 말했다.
“조금 매정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내 망설임은 그날 그 마차 안에서 이미 끝났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주 약간의 체념과 은은히 묻어 나오는 온기가 서려 있었다.
“다만, 그래. 사는 게 참 덧없다는 생각은 합니다. 사실 난 아직도 이렇게까지 황좌를 탈취해야만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으니 말이지요. 지금의 나는 그저 나와 내 주변을 지키기 위해 움직일 뿐입니다.”
“……그렇군요.”
“뭐, 사실 이것도 옛 얘기지만 말이지요. 요즘은 살 만합니다.”
한참 진지하게 말을 뱉던 그가 멋쩍은 듯 한 손으로 제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내가 영애에게서 안정을 얻었듯 영애도 내게서 그런 안정을 찾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우린―.”
“같은 목표를 공유하는, 긴 여정의 동반자니까요.”
엘렌이 후련한 얼굴로 생긋 웃어 보였다.
그랬다. 이건 당연한 감정이었다.
크렘벨에 대한 처단은 어쨌든 한 생을 살았던, 오랜 시간 속의 자신을 통째로 도려내는 일이다.
있던 것을 없애는데 그 빈자리가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
그것 또한 받아들이고, 이제는 사랑하는 이들과의 시간으로 그 빈자리를 채워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허가 채워지면, 자신은 비로소 완전히 과거를 과거로써 볼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지.
“전하 덕분에 비로소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녀는 손에 든 작은 종잇조각을 꽉 쥐며 말했다.
“뒤통수 맞기 전에, 증거가 도착하면 곧장 일을 시작하죠.”
* * *
처음엔 반신반의했었다.
이 정신없이 널뛰는 감정을, 나는 정말로 사랑이라 불러야 하는가.
“그나저나, 이러려고 준비한 선물은 아니었는데.”
“선물?”
“네. 전하께도 드리면 좋을 것 같아서요. 약소한 것이지만 전하께 어울릴 만한 것으로 제작을 맡겼답니다.”
그런데 이것 보라.
한번 철렁 내려앉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녀가 웃는 모습에 또 금세 가슴이 쿵쾅거리며 시끄럽게 굴고 있다.
금발을 곱게 틀어 올려 드러난 목선.
거기에서 이어져 내려온 어깨가 위아래로 으쓱 움직인다.
지금 보니 살짝 웃는 얼굴이 발그레했다. 무언가 민망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작은 손이 제 손만큼이나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작군요. 액세서리입니까?”
“네.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손바닥만 한 작은 상자에 담길 선물이 애초에 그 정도지 않습니까.”
그러자 엘렌이 눈을 샐쭉이 뜨며 말했다.
“펜이었을 수도 있지요. 사실 그런 품목도 생각해 보았었답니다.”
가늘어진 눈매가 그녀답지 않아 귀여웠다.
그 모든 동작이 하나하나 눈에 박혀 들어, 그는 도무지 제 앞의 여인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케이든은 제 가슴을 열고 심장을 꽉 움켜쥐고 싶다는 생각에 괜스레 가슴께를 꾹 눌렀다.
“그런데 왜 액세서리로 정했습니까?”
“펜은 저희 가문에서 만들지를 않으니까요.”
“나도 그래서 아닐 것 같았습니다.”
그가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 엘렌이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후후. 알겠으니 일단 열어나 보시지요.”
방을 채우는 그녀의 웃음소리에 저도 웃고 만 케이든은 그녀의 재촉에 못 이기겠다는 듯 상자를 열었다.
“어찌, 마음에는 드시는지요?”
상자 안에 든 것은 화려한 백금과 아콰마린으로 제작된 검 모양의 브로치였다.
“검이라…….”
케이든은 상자를 든 손을 요리조리 움직이며 브로치를 보았다.
“특이하군요. 마음에 듭니다. 끝도 날카롭게 벼려져 있는 것이 꼭 동화 속 요정의 검 같군요.”
사실 모양이 무엇이어도 상관없었다.
유심히 살펴본 것은 그저 최선을 다한 감상평을 전해 주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그가 제법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자, 엘렌이 다행이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처음엔 큰 의미 없이 바로크 경에게 던질 떡밥이 필요하겠다 싶어 구상을 시작했었는데, 아무래도 전하께 이런 용품 정도는 하나 있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바로크 경에게 줄 떡밥을 구상하다가 만들었다고.
입꼬리를 비롯해 하늘을 둥둥 떠다니던 모든 기관이 급속히 내려앉았다.
아. 내일 바로크가 사라졌으면 좋겠다.
맥이 빠진 그의 입꼬리가 축 늘어졌다.
엘렌은 그에게 다가가 상자를 받아 들고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실크에 감싸여 있는 브로치를 꺼내 그 끝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이 폼멜이 보이시나요? 이렇게 한 바퀴 돌리면 날 끝에서 독침이 나온답니다.”
그녀가 힐트 끝의 장식을 잡고 달칵, 그것을 돌려 보였다.
“여기 지금 튀어나온 날의 정점 부분이 독침이에요. 이렇게 힐트 장식에 약지와 소지를 끼우고, 그대로 내려찍으시면 되지요. 날이 꽤 날카롭게 벼려져 있어 그대로 박혀 들어갈 거예요.”
그녀는 브로치의 장식에 제 약지와 소지를 끼워 넣은 뒤 팔을 휘둘렀다.
“위, 위험……!”
독침을 휙휙 휘두르는 엘렌의 행동에 케이든이 식겁하며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갑자기 거리를 좁혀 오는 그를 피해 엘렌이 상체를 뒤로 빼며 말했다.
“묻어 있는 것은 혈액독이라, 여기에 찔린 사람은 곧 시야가 암전되며 비틀거리게 될 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하께 대항하기 어려운 수준으로까지 신체 능력이 저하되겠지요. 그러면 그때 도망을 치시든 끝장을 내시든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위험―”
“전하께서 다가오시는 게 더 위험하니 부디 가만히 계셔 주세요.”
그녀의 일갈에 케이든이 멈칫했다.
그가 그대로 부동자세를 취하자, 엘렌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께 근처 옷깃을 쥔 그녀는 위치를 잘 맞춰 브로치를 꽂아 넣고는 한 발짝 물러났다.
“역시.”
엘렌이 만족스러운 미소로 웃자, 바짝 긴장하여 숨을 멈추고 있던 그가 비로소 온몸의 힘을 풀며 말했다.
“됐습니까?”
“네.”
그는 고개를 돌려 옆의 유리창을 보았다.
창 너머 복도의 그늘 위로 어슴푸레 비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그 그림자를 보며 물었다.
“잘 어울립니까?”
“그럼요. 제가 직접 준비한 물건인데요.”
자신이 보고 있는 것과 그녀가 보고 있는 게 다르다는 것은 알았다.
그래도 멍청이같이 심장이 뛰었다.
케이든은 손끝으로 엘렌이 달아 준 브로치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맙게 잘 쓰겠습니다.”
“만일의 경우엔 부디 잊지 말고 사용해 주세요. 제 공도 잊지 마시고요.”
그녀는 그런 그의 속도 모르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또 속없이 눈에 박혀, 케이든은 다시 한차례 웃고 말았다.
그런데 엘렌이 갑자기 손뼉을 짝, 치더니 외쳤다.
“아! 이걸 잊을 뻔했네요.”
그녀는 잰걸음으로 가 방문을 열더니, 바깥에 대기 중인 인원들에게 말했다.
“그것들을 이리로.”
옮겨져 들어온 것은 척 보기에도 무언가 짐이 들어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커다란 상자였다.
케이든이 아연해진 낯으로 물었다.
“이번엔 또 뭡니까?”
이번엔 대체 어떤 것으로 위험천만한 짓을 하려고 이런 것을 들여와?
“사실 원래 오늘은 이것을 드리기 위해 찾아뵈려 했었는데.”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이건 키넛이라는, 트리발로스와 퀴니시 등지에서 재배되는 열매랍니다. 그리고 이건 베니빈. 향이 독특하고 달콤한 향신료죠.”
그녀가 열어 보여 준 상자 안에는 웬 덩어리들이 소분되어 담긴 통들이 있었다.
“레시피 몇 가지를 적어 두었으니 주방장이 본다면 그대로 알아서 할 거예요. 그 외에 다른 요리를 개발해서 공유해 주시면 감사할 테고요.”
그가 박스 속 내용물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말했다.
“……향신료라. 이건 정말로 예상치 못한 물건인데.”
그가 굉장히 이상하고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이것도 무언가 내 호신 수단이 되는 겁니까? 천리향……이라든가.”
“아하하, 그럴 리가요.”
엘렌은 그의 반응에 웃음이 터져서 말했다.
“앞으로 유행할 아이템이랍니다. 전하께서 뒤처지시는 것은 말이 안 되니 미리 드리는 것이죠.”
“앞으로 유행할?”
“네.”
그녀가 자신 있게 단언하자, 케이든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저번 사교 시즌처럼 또 무언가가 있는 거로군요.”
“그렇다고 하기보다, 이번엔 제가 유행을 시키려 마음을 먹었으니까요.”
“그 말 정말 멋지군요.”
케이든은 진심으로 말했다.
“방법이 궁금한데 물어봐도 됩니까?”
“물론이지요.”
그의 말에 엘렌은 활짝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바로크의 미식회랍니다.”
* * *
케이든은 잠시 침묵했다.
그랬다. 애초에 거기에서부터 시작된 문제였다.
“미안하지만, 어디라고……?”
“바로크의 미식회랍니다.”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두통이 이는 것 같았다.
케이든이 제 관자놀이를 짚고는 말했다.
“거기는, 아니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 가는 거겠지만―”
그는 저도 모르게 따지려 들었다가, 그녀의 평소 행동을 생각하며 수긍했다가, 결국 완전히 승복하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어제도 정말 걱정이 됐습니다. 일단 바로크 공자는 소문도 좋지 않고, 그곳에 참석하는 대부분의 이가 그대와는 좋지 않은 일로 엮였던 전적이 있지 않습니까.”
의식을 하고 있으니 확실히 알겠다.
그녀의 한마디만으로, 제 기분은 하늘로 치솟았다가 땅으로 곤두박질치길 반복하고 있었다.
자신은 확실히 주도권을 빼앗기고 만 것이라고, 케이든은 생각했다.
“나는 항상 이야기하지만 그대가 안전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제 안전이 중요한 것은 알지요.”
엘렌은 조곤조곤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제가 들여온 품목을 홍보하기에 그곳만 한 곳이 없어요.”
“황실 행사에 한번 납품을 해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홍보가 목적이라면 이것도 충분히 고려할 만한 방법인 것 같은데.”
그러나 엘렌은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