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다음 날.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케이든은 새벽 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기상했다.
두 눈이 뻑뻑하고 퀭했지만, 이상하게도 정신만은 아주 또렷했다.
“……좋아하는 거라고. 이게.”
생각이 난다.
걱정이 된다.
보러 가고 싶거나 볼 수 있으면 좋다.
같이 있을 때면 가슴이 뛰고 횡설수설하게 된다.
‘아, 이게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건가?’
그는 저도 모르게 납득했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것은 충분히 당황할 만한 상황이었어.’
그 막무가내 행동에 끌려간 것은 맞지만, 그런 식이라면 그녀가 아니라 누구라도 자신을 쥐고 흔드는 셈이었다.
생각이 나거나 걱정이 되는 것 또한 그랬다.
그런 상황이었다면 그녀가 아니라 제 주변 누구였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건 좀…….’
적어도 체셔나 코엔하임은 본다고 기분이 좋아지는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면 좋아하는 건가? 정말로?’
그렇다면 자신은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인가?
‘사랑이라. 그러면 적어도 나는 사랑 있는 결혼을 하게 되는 거로군.’
아니, 잠깐.
‘그건 서로가 좋아할 때의 이야기지. 나는 그저 짝사랑을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지 않나?’
그가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면 이것은 짝사랑인가?
‘아니야. 짝사랑도 일단 내가 사랑을 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성립하는 거라고.’
그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고민했다.
그래서 자신은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닌 것인가.
그런 생각 속에서 무한히 굴러다니다 보니 어느덧 아침이었고, 그는 그를 깨우러 들어온 시종장에 의해 강제로 침대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만 일어나십시오, 전하!”
“…….”
그렇게 홀린 듯 씻고, 옷을 차려입은 뒤 문을 나서니 교대해 들어온 코엔하임 경 모리스가 있었다.
모리스는 꼬락서니가 말이 아닌 그를 보고 흠칫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멀쩡히 걸어가던 케이든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그를 불렀다.
“경.”
“예?”
“경도 내가 크라이언트 영애를―”
좋아하는 것 같은가?
케이든은 말을 하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가만히 있자 모리스가 입을 열었다.
“말씀하십시오.”
“…….”
케이든은 잠시 생각하다, 곧 고개를 젓고는 질문을 바꾸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나저나 경도 약혼자가 있었지?”
“예.”
아침 첫마디로 나오는 화제가 약혼자다.
모리스는 크라이언트가에 또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자네는 그…… 체셔 영애를 볼 때 어떤 생각이 드나?”
느닷없이 나온 질문이 지나치게 추상적이었다.
모리스는 한참 생각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예쁘지요. 순수한 사람입니다.”
그러자 케이든이 징그럽다는 듯 표정을 팍 찌푸렸다.
“아니, 다시 묻지. 보지 않을 때 무슨 생각이 드나.”
“보지 않을 때 말입니까? 음.”
그는 또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예쁩니다. 순수하고.”
“됐네. 내가 괜한 물음을 던졌군.”
케이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모리스가 물었다.
“크라이언트 영애에 대해 여쭈시던 게 아니었습니까?”
“응?”
케이든은 진심으로 당황해 물었다.
“자네가 그건 어떻게…….”
“그냥 보다 보면 그렇습니다.”
그의 말에 케이든이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래? 그럼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묻지. 경이 보기에도 내가 그런가? 그러니까…….”
그는 말하다 말고 갑자기 얼굴이 벌게져서는 입을 다물었다.
케이든이 우물쭈물하자, 모리스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영애에게 관심이 있는 걸로 보이느냐는 말씀이시면, 예. 그렇습니다.”
“……관심?”
“달리 표현하면 일반적으로 호감이 있는 상대를 대할 때의 모습이십니다.”
“……그러고 보니 자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
그는 일전 엘렌의 선물을 고르러 나갔을 때를 떠올리며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도 그리 보였던 거군?”
“뭐, 비슷합니다.”
모리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그래. 그러면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묻겠어.”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네라면 오늘, 약혼자를 만나러 가겠나?”
* * *
“아가씨!”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던 엘렌의 뒤에서 어린 시녀의 들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지?”
뒤를 돌아보지 못하는 엘렌이 소리만 높여 묻자, 어린 시녀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찾아오셨어요!”
“……그래?”
전하께서 갑자기 웬 방문이시지?
“곧 내려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시라고 전해라. 아, 집사에게 가서 키넛과 베니빈 두 상자를 이리 가져오라 전하고.”
“네, 아가씨!”
어린 시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그대로 아래층으로 종종 걸어갔다.
마침 치장이 다 끝나 갈 때쯤 방문해서 다행이었다.
의외의 방문이었지만, 어차피 전할 것들이 있었던 엘렌은 일부러 방문할 수고를 덜었으니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채비를 서둘렀다.
머리 손질을 마친 그녀는 서랍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낸 뒤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1층 응접실로 가니 소파에 앉아 있는 차분한 흑색의 뒤통수와 그 뒤를 지키고 서 있는 남빛 머리의 기사가 보였다.
그녀를 먼저 발견한 모리스가 가볍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건네자, 엘렌도 마주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
“전하. 안녕하셨는지요. 코엔하임 경도 오랜만에 뵈어요.”
소파에 앉아 있던 케이든이 제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눈을 크게 떴다가, 가슴팍을 지그시 누르더니 말했다.
“나야 안녕했지요. 그런데 머리를 올린 것은 또 오랜만에 보는군요.”
“슬슬 머리칼이 불편해져서요.”
그녀가 어깨 위로 머리칼을 치우는 듯한 시늉을 해 보였다.
“잘 어울립니다.”
“어머. 칭찬 감사합니다.”
가볍게 미소 지은 엘렌은 케이든의 앞으로 가 앉으며 물었다.
“그런데 예까지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한참 엘렌만 쳐다보고 있던 케이든은 그제야 제 본래 용건을 떠올린 듯 제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가 작게 접힌 종이를 건네며 말했다.
“전달할 게 있어 급히 왔습니다. 너무 이른 아침에 방문한 듯해 조금 민망하군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녀가 쪽지를 받아 들며 물었다.
“증거를 찾았습니다.”
“증거라면?”
“크렘벨에 관한 증거 말입니다. 이제 영애의 지시만 있으면 크렘벨을 축출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엘렌의 손이 그대로 허공에 멈추었다.
크렘벨 축출?
그녀는 천천히 제 손에 쥔 작은 메모지를 펼쳐 들었다.
<광산 발견. 화약 공장 확인. 제조된 화약과 크렘벨의 연관성에 관한 증언 확보.>
그곳에 짤막이 적힌 문구를 읽은 엘렌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심장이 내려앉는 듯 전율이 온몸을 관통했다.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하, 하하…….”
가슴보다 더 깊은 곳에서 솟아난 뜨거운 것이 그녀의 심장께를 맴돌았다.
“괜찮, 괜찮은 겁니까? 영애?”
희게 질린 케이든의 안색이 보였다.
이 소식을 들으면 내가 기뻐할 것이라고, 막연히 짐작하며 달려왔을 텐데.
무어라도 대답을 해 주어야 해.
가슴이 벅차올라 목소리까지 떨릴 것 같았지만, 그녀는 제 목에 꾹 힘을 주고는 말했다.
“……네. 그저 퍽 감격스러워서.”
예상치 못했던 일들도 있었지만, 이제 정말 결실의 코앞까지 왔다.
엘렌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제멋대로 뛰어 대는 혈관들이 지그시 눌리며 외려 시끄럽게 제 존재를 알려 왔다.
그런 그녀를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으로 살피던 케이든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 증거가 이곳에 도달하기까지 약 일 주, 조금 더 보안을 신경 쓴다면 최장 이 주 정도 걸릴 겁니다.”
“네.”
“이걸…… 언제 터뜨렸으면 좋겠습니까?”
그가 그녀의 눈치를 보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낯으로 물었다.
언제고 그려 왔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녀는 쉬이 답할 수가 없었다.
복수심으로,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성취감으로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것.
공허함.
엘렌의 가슴 위에 놓여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종장의 예고를 들은 지금, 자신은 어째서 이리도 허무할까.
살짝 내려앉은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때 그녀의 앞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영애.”
허공을 헤매던 그녀의 눈앞이 갑자기 어둑해졌다.
놀라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저를 향해 허리를 숙인 케이든이 있었다.
그녀의 동그란 눈과 케이든의 눈동자가 정면으로 마주쳤다.
“괜찮습니다. 천천히 답해도 됩니다.”
청량한, 그러면서도 포근한 눈동자가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따듯하고 큰 손이 그녀의 뺨을 감싸 왔다.
피부 위 솜털을 타고 전해지는 손끝의 떨림이 유독 선명했다.
“나는 그대가 무엇 때문에 그리 망설이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모든 게 그대의 공이라는 것이지요.”
나직한 목소리, 부드러운 미소.
“그대가 없었다면, 그래서 크렘벨의 반란군과의 내전이 벌어졌다면……. 이 제국은 승패와 관계없이 막대한 손해를 끌어안아야 했을 겁니다.”
그녀의 눈높이에 맞춰 숙어져 있던 허리가 펴지며 어둑하던 앞이 밝아졌다.
“그대가 괜찮아질 때까지, 모든 감정이 정리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주겠습니다. 그러니―”
시야에 다시 눈 부신 빛이 찾아든 탓에 눈가가 찡그려졌다.
온기가 배어난 손바닥이 떨어져 나갔다.
따듯한 것이 사라진 뺨에 닿는 공기가 시렸다.
괜히 눈가가 뜨거워진 것은, 아마 그 탓이었다.
“그대가 괜찮은 때, 그대가 원하는 때에. 그때는 나와 그대만 생각해서 결정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언젠가 그녀가 그리했던 것처럼 위로를 건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