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안 돼요. 전 2황자 측에게서 최소한의 신뢰를 살 생각이에요. 아주 중요한 순간에, 단 한 번만이라도 괜찮으니 쥐고 있을 수 있는 카드를 말이에요.”
그러자 케이든이 불만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카드가 반드시 필요합니까?”
“네. 그 카드의 역할은 그것뿐만이 아니니까요.”
엘렌은 상자 속에 준비해 두었던 베니빈 한 통을 들어 보였다.
“자. 여기 아주 좋아 보이는 상품이 있습니다. 이 상품은 주인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줄 물건이지만, 있는 것은 여기 있는 이 하나뿐입니다.”
그녀는 탁자 위에 들고 있던 베니빈 통을 내려놓고는, 티 세트의 통을 열어 베니빈의 주위로 각설탕을 하나씩 꺼내 놓았다.
“여기 이 상인들은 모두가 이것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여기 있는 이 사람이 가졌다고 쳐 보지요.”
그녀는 베니빈을 맨 왼쪽에 놓인 각설탕 앞으로 가져다 놓았다.
“자, 이제 이 상인은 혼자서도 시장을 지배할 막대한 부를 가졌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두 사람은 어찌할 것 같습니까?”
“……힘을 합치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럼 이번엔 조금 달리 생각해 볼까요.”
그녀는 베니빈 통을 다시 중앙에 가져다 놓으며 말했다.
“여기 이 상인은 나머지 두 상인을 누르고 자신이 최정상에 서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이 상황에서, 이 상인이 행동을 개시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무엇일까요?”
“베니빈의 획득이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녀는 각설탕을 하나씩 통에 넣어 치우며 말했다.
“제가 탐나는 장기짝으로 시장에 나와 있는 동안에는 그 누구도 먼저 일을 시작하려 하지 않겠죠. 제가 진영을 확실하게 결정하는 순간이, 전쟁을 시작하는 날이 될 겁니다.”
그녀의 말에 무어라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케이든은 한참 동안 눈을 굴리다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미식회든 뭐든 필요해요. 대신 나랑 같이 갑시다, 라고 한다면?”
“저번과 같은 대답을 드리겠지요.”
엘렌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가 허락을 해 주지 않자, 케이든은 와락 그녀의 어깨를 잡고 싶은 것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좀 치근덕댈 수는 있는 거 아닙니까? 난 정말 걱정이 됩니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크레센트가 날 자존심도 없는 미친놈으로 보겠지만, 그래도 상관없단 말입니다.”
“전하.”
“그대의 말마따나 자본은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내 명성은 모두 돈으로 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가며 말했다.
“크렘벨에 대한 조사도, 그걸 위한 정보 조작도. 그리고 백성들에게 조달한 식량과 현재의 정계의 소강상태까지, 전부.”
케이든은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지금 귀족파는 가뭄과 수해로 입은 피해도 피해지만, 이번 트리발로스―마그놀리아 전쟁 탓에 그나마 남아 있던 자산까지도 날려 버린 이들이 많지요. 제 세력을 갖춘 이들은 아직 제법 버티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그뿐. 그들은 맹공에 나서지는 못할 겁니다. 전쟁은 개인이 아닌 세력이 하는 것이니까.”
그는 처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그런 때이니만큼, 그대 같은 이들이 돋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로서도 알았다.
대국을 본다면 그녀가 하는 일이 맞는 방향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래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구보다도 이성적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임을 알면서도,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그녀의 뜻을 꺾어 놓을 용기도 없지.’
그는 결심했다.
그러니―
“내가 함께 가는 것이 안 된다면, 내가 그대에게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할 수는 있게 해 주세요. 이건, 이건 정말로 양보 못합니다.”
그의 결연한 표정을 본 엘렌은 그의 뒤에 서 있는 모리스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시선을 피했고, 그 모습에 이건 방법이 없음을 알아채고는 한숨을 쉬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뭘까요? 일단 들어나 보죠.”
“내가 보내는 이를 그대의 전속 시녀로 두었으면 합니다. 이게 내 마지막 타협점입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 튀어나올까 잠시 긴장하고 있었던 엘렌은 의외로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 수용 가능한 제안이자 얼떨떨한 낯으로 대답했다.
“좋아요. 알았으니 그럼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보내 주세요.”
“알겠습니다. 당장 오늘 안에 도착할 수 있도록 처리해 놓지요.”
케이든의 미소는 한결 가벼워져 날아가는 솜털 같았지만, 정작 그것을 보는 엘렌은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 * *
그로부터 일주일 뒤의 점심시간.
날짜를 헤아리며 휴일을 체크하던 테리어드가 놀라 물었다.
“어라. 오늘이 그날 아닙니까?”
“그날이라니?”
“바로크의 미식회 말입니다.”
테리어드가 별일이라는 듯 그를 힐끔 보고는 말했다.
“안 가십니까?”
“안 가.”
“전하께서 웬일이십니까? 전 일전의 자선 파티 때처럼 영락없이 가실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러자 케이든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반박할 말이 없어. 말로는 도무지 이길 수가 없더군.”
“아. 엘렌 말이지요?”
테리어드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무리시지요. 전하께서는 저랑 비슷한 수준 아니십니까!”
“못하는 말이 없군, 자네.”
“객관적이라고 해 주시지요.”
“하…….”
케이든은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들고 있던 펜을 던지기 좋은 자세로 쥐었다가, ‘안 돼. 똑같이 굴지 마라, 나 자신.’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손에서 힘을 뺐다.
“나도 가서 바로크가 헛짓거리 못하게 감시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
그는 읽고 있던 서류의 사인을 이어 나가며 말했다.
“그런데 내가 가서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는, 목적이고 뭐고 못 참고 훼방을 놓을 것 같은데 어쩌란 말이야.”
케이든이 또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테리어드가 슬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정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기다리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럴 리가.”
케이든은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강구했고, 할 수 있는 일은 해 놨지.”
그의 말에 테리어드가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됐지요, 뭘. 그리고 그 애가 알아서 어련히 잘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겠지.”
케이든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금세 원점으로 돌아가서는 외쳤다.
“잘하겠지. 너무 잘해서 탈이겠지. 바로크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만큼!”
퍽 서러운 목소리였다.
* * *
크라이언트의 수도 저택은 기본적으로 항상 분주한 편이었다.
방문자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가끔 한둘씩 오가는 손님들이 보통이 아니었던 탓에 자연히 생긴 저택의 습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크라이언트 저에서 바로크의 미식회가 열리는 날.
모두가 바쁜 때에 충원된 새로운 시녀를, 저택의 사용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환영했다.
주인 아가씨의 전담 시녀 한 명이 들어오면서 잔뼈 굵은 베테랑인 샐리가 홀의 인원으로 배치됐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저택의 사용인들은 그야말로 신들린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는 중이었다.
파티가 아니니 심플하게.
하지만 그러면서도 수수해 보이지는 않도록.
하얀 테이블보가 깔리고, 그 위로는 계절화인 희고 붉은 카네이션이 놓였다.
세심하게 신경을 쓴 입구와 저택 포치에서부터 은은하게 깔린 흰빛이 저택 전체에 생동감을 주고 있었다.
호스트인 엘렌은 새로 배치된 전담 시녀 한 명과 함께 저택 1층의 홀에서 들어오는 이들을 맞이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바로크.
클라우디스는 오늘 한층 생기 있어 보인다며 그녀의 성공적 행사 진행을 기원했고, 그의 부친인 오클라니는 만약 실수한다 하더라도 저번처럼 자신이 도와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망발을 지껄였다.
호르세나 로이체 등 일찍 온 인원들은 먼저 인사를 나눈 뒤 들어갔고, 그들의 뒤를 이어 도착한 오세먼은 무언가 지적할 곳을 찾고 싶었던 듯 사방으로 눈알을 굴렸으나, 딱히 이렇다 할 것을 찾지 못하고는 결국 최소한의 인사말만 나눈 뒤 들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당부했던 대로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한 메이 아발란쉬의 입장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오찬이 시작되었다.
* * *
처음 애피타이저가 나왔을 때만 해도 사람들의 표정은 어딘가 기대 이하라는 느낌이었다.
겨우 이런 것을 보여 주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불러들였느냐는, 딱 그런 눈빛.
고급 식재의 맛을 잘 살려 딱히 흠잡을 데 없는 진하고 담백한 맛이었지만, 그런 것은 그들의 주방에서도 얼마든지 맛볼 수 있었다.
묘하게 가라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것은 오세먼뿐이었다.
그는 애피타이저를 맛본 뒤부터 갑자기 웃는 낯이 되어서는 식사를 이어 갔고, 다른 이들도 괜한 말을 얹고 싶지는 않았는지 메뉴와는 동떨어진, 이를테면 윌튼 자작가의 공상에 가까운 동력 기관 개발과 관련된 이야기 따위를 나누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미묘한 분위기의 테이블에서 분주히 떠드는 것은, 그녀가 염려되었는지 끊임없이 재잘대는 메이 아발란쉬와 애초에 이 자리의 목적이 그녀들의 포섭에 있는 바로크뿐.
그런데 그랬던 분위기가 메인 디시를 실은 트롤리들이 들어오며 갑자기 반전되었다.
음식들을 덮고 있던 돔 뚜껑을 치운 순간.
“어머, 향이 정말 신기하네요.”
메이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요리가 담긴 접시를 쳐다보았다.
오클라니 바로크가 손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냄새가 특이하군. 이건 나도 처음 보는 것 같은데.”
테이블 주위를 가득 채우는 생소한 냄새는, 당연하게도 함께 앉아 있던 다른 이들의 호기심 또한 자극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저희 앞에도 접시가 놓이자마자 바로 뚜껑을 걷었다.
저마다 음식의 향을 맡아 본 사람들은 흥분해서 너도나도 떠들기 시작했다.
“그렇군요. 확실히 이건 저도 처음 봅니다.”
“요리에서 생전 처음 맡아 보는 강한 냄새가 납니다. 신기하군요.”
평은 모두 비슷했다.
처음 본다. 신기하다.
다만, 그것은 한 사람의 감상만을 제외한 이야기였다.
리암 오세먼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