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그건―”
“하하, 그래요. 그럴 수 있지.”
오클라니가 엘렌이 있는 방향을 곁눈질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웃어 보였다.
그 장면을 본 메이가 파르르 몸서리를 쳤다.
“되었고, 이제는 모임의 본제로 넘어가 봅시다. 오늘 고기가 참 좋은데. 곁들인 허브도 향이 괜찮고. 어디서 가져온 것들입니까?”
그러자 호스트인 로이체가 마지못해 말했다.
“……설명해 드리게.”
“예. 이것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적당히 돌려진 화제에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 설명이 끝나 갈 때쯤, 엘렌이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나저나 여러분들께서 허브에도 관심이 있으셨군요.”
그러자 로이체가 넌지시 말했다.
“취향이 다양하시지요. 모임에 나오시다 보면 아마 영애께서도 많은 종류를 배워 섭렵하시게 될 겁니다.”
제법 까칠한 말에 엘렌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니까 나보다는 저희가 많이 안다, 이건가.’
그래도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나쁘지는 않은 성격이었다.
저런 이들이 꼭 뒤처지기 싫은 마음에, 어떻게든 신문물을 많이 알고 가지려 아등바등하기 마련이니까.
엘렌은 싱긋 미소 지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제가 다음에 제가 좋아하는 것으로 한번 대접해 드려도 될까요? 앞으로 많이 뵙게 될 테니, 여러분들께도 꼭 의견을 묻고 싶군요.”
그러자 오클라니 바로크가 말했다.
“다음은 아마 저희 차례였던 듯한데. 좋습니다. 저희 순서를 양보하지요.”
“굳이 양보랄 것까지야. 크라이언트에서 자리를 갖고, 그다음 바로크로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느새 평소의 페이스를 되찾은 클라우디스가 말하자, 오클라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다들 괜찮으십니까?”
“상관없습니다. 기대되는군요.”
가장 먼저 동의하고 나선 것은 호르세였다.
그러자 그 뒤를 잇듯 다른 인원들도 너도나도 동의를 표하기 시작했다.
“그럼 다음 모임은 크라이언트에서 갖도록 하겠습니다.”
오세먼이 그녀를 노려보다, 제 굳은 눈매는 어찌하지 못한 채 입꼬리만 올려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어떤 음식이 준비될지 기대가 되는군요.”
그에 엘렌은 새침한 동작으로 냅킨을 들어 입가를 톡톡, 닦은 뒤 대답했다.
“잊지 못할 식사를 대접해 드릴 테니 기대하셔도 좋답니다.”
* * *
완전히 어둠이 진 늦은 밤.
오늘따라 유독 일에 집중하지 못했던 케이든은 그 탓에 자정이 훌쩍 지난 시각에서야 간신히 침실에 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비로소 얻은 휴식이 무색하게도, 아직 침대에 걸터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설마하니 오늘이 그 당일이었을 줄이야.’
여차하면 미식회까지 쳐들어가 훼방을 놓을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 그는 제가 어떻게 해 보기도 전에 사건이 지나가 버렸음에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냥 그 소식을 듣자마자 갔어야 했는데.”
늦게라도, 하다못해 크라이언트 저라도 방문해 볼걸.
그는 괜한 후회를 하며 침대 위로 털썩 누웠다.
“거기!”
케이든이 문 바깥을 향해 외쳤다.
달칵 문이 열리며 시종이 들어왔다.
“가서 와인을 한 병만 가져오지. 안주는 치즈로.”
그러자 그의 침실 문밖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체셔 경 테리어드가 말했다.
“전하. 그냥 주무시지요.”
“그 그냥 주무시는 걸 할 수가 없으니까 찾는 거 아니겠나.”
그는 한차례 투덜대고는, 제 문 앞에 서 있는 테리어드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그보다 자네는 퍽 멀쩡해 보이는군.”
“아니, 그럼 제가 어디 한 군데 골골대기를 바라십니까?”
테리어드가 황당하다는 듯 반문했다.
“그게 아니라, 전에 플란넬 백작 때는 결근까지 해 놓고 이번에는 멀쩡하니 그게 참 이상하다는 말이었지.”
“예? 아니, 그걸 전하께서 어떻게 아십니까?”
테리어드가 얼굴을 순식간에 붉히며 외쳤다.
그는 진짜로 당황했는지 횡설수설 말을 뱉었다.
“잠깐, 아니요, 게다가 결근이라니요! 나중에 모리스랑 바꿔서 제대로 다 섰습니다!”
“어쨌든 그때는 그래 놓고 이번에는 어떻게 그리 멀쩡하냐는 말이야. 나한테 태연하게 잠이나 자라는 소리나 하고 말이지.”
그가 툴툴대며 말했다.
“바로크가 어떻게 나올지가 정말 빤한데. 아, 제기랄. 생각하니 또 열불이 치미는군.”
시종이 준비한 와인과 치즈를 들고 왔다.
케이든은 와인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집어 코르크 마개를 퐁, 땄다.
“이야기 나온 김에 일단 자네도 여기 앉지.”
“……정말 주무실 생각이 없으시군요.”
테리어드가 투덜대며 들어왔다.
“같이 마셔 드리지는 못합니다.”
“줄 생각도 없었네.”
케이든이 잔에 와인을 콸콸 따랐다.
심상찮은 기세로 쏟아지는 술을 보며 테리어드가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전하께서는 제게 엘렌의 일거수일투족이 신경 쓰이지 않느냐, 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 말에 케이든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닌데, 어감이 좀 나쁘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라기보다 그녀에게 접근하는 놈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러니까 오늘 엘렌이 참석한 바로크의 미식회를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테리어드의 정리에 케이든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래 놓고는 영 수긍하지 못하겠는지, 금방 뒤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자네도 크레센트가 바로크 경을 내세워서 뭘 하는지 알지 않아. 심지어 듣자 하니 그 바로크 공자가 아주 가관이었던데? 나이도 지긋하게 먹은 양반이 돌은 거지.”
“뭐, 그래 봤자 어찌하겠습니까.”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약혼자는 전하이신데요.”
“파혼이야 쉽지. 저쪽이 얼마나 좋은 조건을 제시할지 나는 알 수가 없잖아. 게다가 어쩌면 바로크 경이 그녀의 취향일 수도 있고. 사실 길리언을 생각하면 꽤 신빙성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
“전하.”
테리어드가 술잔을 든 그의 손을 붙잡았다.
“왜 그러나.”
“전하께서 왜 그러시는지는 이해합니다만, 엘렌은 본인이 원하면 쟁취하고, 필요하면 스스로 해내는 아이입니다. 특히 지금은 더더욱요.”
그는 어딘가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애는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해 전하와의 혼인을 약속했습니다. 저나 바로크 경이 아니라요.”
“…….”
그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지고 나서야, 케이든은 자신이 해서는 안 될 상대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미쳤군.’
정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눈앞의 저 곰 같은 놈은 제법 이목구비가 시원하게 생긴 데 반해 하는 짓이 아주 미련한 놈이었다.
듣자 하니 아주 어릴 적부터 마음에 두고 지내 왔던 듯했다.
그런데 그녀에게 고백 한번 못해 보고 저 나이 먹도록 저러고 있단다.
‘그러게 진즉 티라도 좀 내지.’
그랬으면 최소한 자신도 혼인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그러니까, 다른, 방법을…….
그런데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서 굴러가고 있던 톱니가 무언가 이물질이라도 낀 듯 버벅대기 시작했다.
도저히 말이 이어지지 않았던 그는 머리를 한 차례 세차게 휘저었다.
“전하?”
그의 이상 행동에 테리어드가 무어라 불렀으나, 그는 일단 제 머릿속에 집중했다.
‘엘렌 크라이언트와 테리어드라고.’
그는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 보았다.
옅은 금발이 햇살을 머금은 듯 아름다운 여인과 대충 밀 한 짚을 꽂아 놓은 것처럼 생긴 남정네.
그 두 그림을 가까이 붙여 보았다.
가까이, 더 가까이.
밀 한 짚과 그걸 복사한 밀 한 짚을 안고 행복하게 웃는―
“말도 안 되는군.”
그는 들고 있던 잔을 단숨에 비웠다.
“예? 전하의 혼약이요?”
“아니.”
테리어드가 물었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이상도 하지.
크라이언트도 내 사람이고, 체셔도 내 사람인데.
‘둘의 결합은 내 기반에는 전혀 문제 될 게 없는데?’
그런데 난 뭐가 싫은 거지?
크라이언트야 그때엔 믿기 어려운 상태였다고 치지만, 체셔는 아니었다.
코엔하임은 자신과 뗄 수 없는 가문이고, 그런 코엔하임가와 자신의 여식을 짝지어 준다는 것은 적어도 자식을 버리지 않는 이상 자신과는 척을 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체셔가는 지금의 크라이언트만큼이나 가족 사이가 돈독하기로 유명한 가문이다.
그러니까 전혀 문제 될 게 없는데.
“……그런데 난 대체 뭐가 싫은 거지?”
그가 느닷없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테리어드가 말했다.
“뭐긴요. 엘렌한테 붙는 날파리들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왜 싫은 거지?”
“엘렌을 좋아하시니까요.”
테리어드가 말했다.
“내가? 좋아한다고? 그녀를?”
“그걸 제게 물으십니까?”
테리어드가 입을 쩍 벌렸다.
“전하. 혹시 연애 못해 보셨습니까?”
“그러는 자네도 못해 봤잖아.”
“저는 안 한 겁니다!”
테리어드가 벌컥 소리를 질렀다가, 자신이 짝사랑해 온 대상이 현재 눈앞에 있는 남자의 약혼자인 것을 깨닫고는 슬그머니 입을 닫았다.
“그러니까…… 아, 그래. 제가 어떻게 깨달았었는지를 말씀드리자면―”
그는 급히 말을 돌렸다.
“음, 일단 제 기분인데 주도권이 저한테 없습니다. 모든 걸 상대가 쥐고 흔들지요. 피곤하고 우울하다가도 상대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그렇게 좋아졌다가도 상대의 말 한마디에 저 땅바닥으로 처박히기도 합니다.”
“그거 퍽 괴롭겠군그래.”
“뭐, 괴로우면서도 좋고 합니다.”
그의 말에 케이든이 별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 이상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제가 장담하는데, 전하께서도 조만간 제 말이 무슨 이야기인지 깨닫게 되실 겁니다.”
“아, 뭐. 그래. 그럴 수 있지.”
케이든이 마지못해 대답하자, 그 표정이 못마땅했던 테리어드는 제 주군을 한번 흘겨보고는 팩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다행입니다.”
“뭐가.”
“이번에야말로 엘렌이 저를 도구로 보지 않는 사람을 만나서요.”
“도구라니!”
케이든은 벌컥 소리를 질렀다가, 사실 처음에는 그런 의미로 그녀의 가치를 재었음을 떠올리고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위치가 위치다 보니, 사람을 자꾸 재는 버릇이 생겼어. 하지만 이건 확실해. 적어도 도구는 아니야. 중요하다고. 걱정돼. 내 신하인데 누가 채 갈까, 어디 다치기라도 할까. 그저 내 품 안에만 있었으면 하는데―”
더듬더듬 변명을 시작하던 그가 술이 들어간 탓인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제 속내를 스르륵 뱉어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 큰 남정네의 사랑 얘기를 듣는 것이 끔찍해진 테리어드가 그의 입을 막으며 외쳤다.
“알겠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제발 이만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