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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73화 (73/128)

<73화>

사실 현 바로크 후작인 헤모니 바로크는 이미 은퇴해야 할 나이를 지나도 한참을 지났다.

그러나 제 장남인 오클라니에게 자리를 물려주자니, 그는 흔히들 말하는 아주 떡잎부터 노란 이였다.

일례로, 그는 도박을 했다.

물론 이것만으로 그가 가문 재정에 손을 대지 못하는 이유는 모두 설명이 된다.

하지만 본인이 실권이 없는 것과 별개로 그는 그다지 가문 내에서도 존중을 받지 못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아비인 헤모니 바로크뿐만이 아니라 아들인 클라우디스 바로크와도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비롯된 소문은 바로, 그의 아내였던 트레샤 바로크가 요절한 것이 제 남편에게 평소 많이 시달렸기 때문이 아니냐는 이야기였다.

일각에서는 그랬으면 트레샤 바로크의 친정인 브리스타가에서 무어라도 항의를 하지 않았겠느냐며 그것을 한낱 소문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또 일각에서는 의결권을 가진 고위 귀족과 그렇지 못한 하위 귀족 간에 그게 가당키나 하겠냐며 소문이 사실일 것이라 생각했다.

어쨌든 가문을 말아먹을 것이 뻔히 보였던 오클라니였기에, 헤모니 바로크 후작은 아직까지도 그에게 승계를 하지 않고 제가 가주 자리를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제 대에 확실히 크레센트를 즉위시키고, 장남인 오클라니 대신에 손자인 클라우디스 바로크에게 곧장 후작위를 승계할 셈일 것이라고 엘렌은 생각했다.

“오클라니 바로크는 사실 정치적으로는 그다지 별 볼 일 없어요. 다만 귀찮은 문제에 휘말리기 쉬운 상대이니 미리 주의시키는 거지요.”

“그런가요?”

“어차피 바로크가에서도 반쯤 버려진 이랍니다. 우리를 건드릴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은 못 되지요.”

“그렇군요…….”

“그러니 그와는 정면으로 부딪치는 일만 만들지 않으면 됩니다. 물론 오늘의 호스트인 로이체도.”

“네!”

메이의 씩씩한 대답에 엘렌이 웃으며 말했다.

“뭐, 그래도 우리는 2황자 전하께서 회유하고자 하는 인물들이니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호의적일 거예요. 다만 그러다 어느 한쪽과 깊게 엮이는 것도 좋지 않으니 거리에 유의하라는 뜻이지요. 긴장해야 한다는 건 이 부분이 커요.”

“네. 주의할게요.”

메이가 짐짓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혼인 직후, 처음 수도 사교계에 발을 들이던 때의 자신이 떠올랐던 엘렌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들어가 보죠.”

* * *

고용인의 안내에 따라 홀에 들어가자, 그곳에는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귀족들이 있었다.

순식간에 저희에게로 쏠리는 눈동자들에 당황한 메이가 손을 꽉 쥐었다.

테이블 쪽에서 그녀들을 맞이하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드디어 오늘의 초대 손님이 오셨군!”

소리가 울려 나온 쪽은 호스트의 자리가 아닌, 측면 손님석의 가장 상석.

오클라니 바로크였다.

“화제의 인물들께서 관심이 있다고 하시니 내가 직접 초대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엘렌은 생각했다.

초대한 것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 아들인 클라우디스 바로크겠지.

아니나 다를까, 엘렌이 그리 생각하기 무섭게 그의 옆에 함께 앉아 있던 클라우디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런데 어째, 표정이 묘하게 변한 것이 그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옆에 호스트로서 앉아 있던 로이체가의 장남인 레이븐 로이체 또한 얼굴을 굳힌 것이다.

엘렌은 비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저희끼리도 이렇게까지 손발이 안 맞아서야.

그야말로 개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일련의 상황을 보지 못했는지 오클라니 바로크는 계속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소개하지요. 아발란쉬 영애와 크라이언트 영애입니다.”

저희에게 쏠리는 시선에 엘렌은 등을 꼿꼿이 펴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이렇게 인사드리는 것은 처음이네요. 잘 부탁드릴게요.”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유익한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군요.”

고개를 들며 참석한 인원들의 안색을 살피는데, 그들의 면면에 채 숨기지 못한 불편함이 서려 있는 것이 보였다.

‘로이체, 오세먼, 호르세. 다들 이 자리가 꽤나 불편하기는 하겠군.’

모두 이번 페리윙클 사태에 얽혀 있던 이들이었다.

페리윙클의 말로는 모두들 전해 들었을 테니, 그녀와 메이 아발란쉬를 보기가 영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었다.

‘뭐, 내 알 바는 아니지만.’

그녀들의 간단한 인사가 끝나자, 또다시 오클라니 바로크가 다음 순서 진행을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럼―”

“환영합니다! 두 분 영애의 자리는 저쪽입니다. 안내해 드리게.”

오클라니의 말을 가로막고 외친 것은 호스트인 레이븐 로이체였다.

처음 그에게 제 발언권을 빼앗겼던 것을 의식하고 있었는지, 그는 제 옆의 오클라니를 힐끔 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모시는 손님인 만큼 상석으로 모셨습니다. 앉으시지요.”

그녀들의 자리는 호스트의 왼편, 그러니까 바로크 부자의 맞은편이었다.

지나가면서 확인해 보니 오클라니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제 말이 가로막혔던 것이 기분 나빴던 모양이었다.

그녀들이 자리로 이동하자 뒤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의자를 빼 주었다.

모두가 착석하자 식사가 시작되었다.

“오늘의 메뉴는 양송이를 이용해 만든…….”

전채 요리에 대한 주방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달그락,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다들 지난 한 주 잘 지내셨는지요?”

호스트인 로이체가 말을 시작하자 오세먼가의 장남, 리암 오세먼이 대답했다.

“조금 바쁘긴 했지만 걱정해 주신 덕분에 그럭저럭 잘 지냈습니다.”

“무언가 일이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오, 이거 아주 진하군요.”

알버트 호르세가 식사를 하며 맞장구를 치자, 오세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은근한 낯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근에 흥미로운 걸 하나 발견해서 말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여러분께도 소개시켜 드리고 싶군요.”

‘퀴니시의 상선 이야기인가.’

엘렌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수프를 먹었다.

“기대가 되는군요. 언제쯤일 것 같습니까?”

“그런 것은 비밀로 해야 더욱 기대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저 그리 멀지 않은 날이라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세먼이 슬쩍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 오클라니 바로크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리 말씀하시니 더욱 궁금하군요. 오늘 오신 손님들께서도 궁금해하실 듯한데, 그러지 말고 시원하게 공개하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순전히 그를 곤란하게 하고 싶어 이야기를 꺼내 놓고는 자신들의 핑계를 대는 오클라니 바로크가 같잖았던 엘렌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녀들을 방패로 삼는 것은 난봉꾼으로 소문난 오클라니 바로크뿐만이 아니었다.

“아……. 영애들께서 평소에 접하시던 화제가 아닐 것 같은지라. 괜히 이야기했다가 저희를 재미없는 사람들로 기억하고 가실까 봐 걱정이 되는군요.”

이것 봐라?

엘렌이 폭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머, 아니에요. 많이 듣고 배울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저희는 신경 쓰지 마세요.”

낭랑한 목소리와 생글대는 낯으로,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으며 존재감을 어필한 것은 메이였다.

“하하, 그러다가 다음에는 이 자리에서 뵐 수 없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제가 꽤나 서운할 것 같습니다.”

리암 오세먼이 애써 웃으며 말을 돌렸지만, 그 시도는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던 클라우디스의 한마디로 실패하고 말았다.

“공개하기 곤란하시다는 말씀을 그리 에둘러 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꼭 곤란할 것까지는 없습니다만…….”

어떻게든 말을 돌리고자 하는 오세먼은 애써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참석하신 바로크 경께서도 관심을 보이시는 것을 보니 제 홍보 전략이 제법 괜찮았던 모양입니다.”

“관심이라기보다, 화법의 문제를 말씀드린 것이지요.”

“에이, 그러지 마시지요. 혹 무언가 들고 계신 사업 아이템이라도 있으신 것 아닙니까? 이거 뒤처지기 싫으면 저도 일에 박차를 가해야겠습니다.”

그러자 한쪽 구석에서 참지 못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모두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 있는 바로크 공자 오클라니는 사실상 집에서 내놓은 양아치이고, 그 아들인 바로크 경 클라우디스는 황궁 기사였기에, 그들은 가문의 사업과 관련해서는 아무 권한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제게 권한이 없는 이야기가 나오자 오클라니의 얼굴이 붉어졌다.

클라우디스는 벌써부터 피로하다는 낯으로 고개를 돌리다, 엘렌과 눈이 마주치자 조금 곤란한 낯으로 웃어 보였다.

엘렌은 살짝 눈짓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생각했다.

‘그럼 이쯤에서 오세먼의 입을 다물게 해 볼까.’

적당한 타이밍에 바로크를 감싸 주면, 일단 겉보기에는 제법 무난하니 포섭 가능성이 있어 보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입을 열게 두었다가는 자신이 곤란해질 테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엘렌은 뒷말이 더 이어지기 전에 그의 말허리를 끊었다.

“새로운 사업 아이템이라. 확실히 저라도 이런 자리에서 섣불리 말을 하기는 어렵겠어요. 너무 재촉들 하지 말아요, 우리.”

그러자 오클라니가 이때라는 듯 짐짓 호쾌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하하! 영애는 뭐, 경쟁은 공정하게라든가, 그런 것을 추구하는 모양입니다.”

엘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오세먼가의 안목은 저와는 맞지 않아서요. 저번 드레스 건만 봐도…….”

말을 잇던 그녀는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으로 자신의 뺨을 감쌌다.

“어머, 이 이상 말하면 실례가 되겠군요.”

하지만 이미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언급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린 기색이었다.

제 어미가 트라이아 공작 부인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었던 일이 언급되자, 리암 오세먼의 낯이 바짝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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