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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72화 (72/128)

<72화>

엘렌은 아침에 들었던 마린의 보고를 떠올리며 말했다.

“내일쯤 올 거라더니 제법 빠르군. 다섯 척 모두 무사히 도착했다던가?”

“예. 모두 무사히 들어왔고, 곧장 하역해 운반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며칠 뒤면 도착하겠군. 좋아. 오는 물량 중 키넛과 베니빈 두 상자씩을 저택으로 보내라고 해. 최상등품으로.”

“예. 알겠습니다, 아가씨.”

사실 이 향신료 사업은 과거 크라이언트가 아니라 오세먼이 선점했던 부분이었다.

원래 트리발로스는 야만국이라 하여 이스타지오와는 그다지 왕래가 잦은 국가가 아니었다.

이스타지오의 주된 서부 교역국은 한 다리 건너 있는 마그놀리아였고, 그 마그놀리아의 남서쪽에 위치한 트리발로스와는 거리적, 문화적 장벽으로 인해 세계를 오가는 개인들에 의해 조금의 교류가 있었을 뿐.

나라 전역을 휩쓸 정도의 대규모 교역이 실시된 바는 없었다.

그런데 트리발로스―마르놀리아 전쟁으로 기존 마그놀리아 교역은 모두 잿더미가 되고 말았고, 무역 시장은 새로운 움직임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트리발로스의 인접국인 퀴니시의 배가 이스타지오를 방문한 것은 그런 때였다.

퀴니시는 트리발로스와 비슷한 기후를 가진 곳으로, 그녀도 오세먼이 상품 홍보를 시작하고 나서야 안 것이지만, 그곳은 트리발로스와 마찬가지로 향신료가 특산물인 곳이었다.

교역선의 경우 오세먼도 크라이언트도 모두 프란체 항을 이용한다.

하지만 영지가 남부에 위치해, 상대적으로 프란체 항과 인접한 오세먼이 정보 면에서는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퀴니시의 향신료는 오세먼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들은 퀴니시의 향신료로 시작해 이후 트리발로스까지 수입처를 확대하여 더욱 막대한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그때 그것이 얼마나 배가 아프던지.

북쪽에 위치한 겨울의 영지가 불만인 적은 없었지만, 그때만큼은 그 지리적 약점이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트리발로스에 미리 진출해 있기로 했지.’

“그래. 나는 이만 들어갈 테니, 집사도 이만 쉬지.”

“예. 푹 쉬십시오.”

그녀는 한층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장담컨대 누구도 자신보다 빠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곳에 정보망을 설치하고, 이후 유통망으로 쓰기 위한 거점들을 설치했으며, 해로에 필요한 고속정과 상선 다섯 척의 건조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그 결과, 지금 퀴니시의 상선보다 먼저 도착한 것은 자신의 배였다.

‘이제는 내가 푸는 타이밍을 정하기만 하면 되는데…….’

하지만 그냥 빨리 풀기만 하면 재미가 없지 않은가.

기왕이면 남이 먹을 상까지 함께 엎어 주어야 더욱 즐겁지.

그녀는 다시 바빠지겠노라며 기쁘게 웃었다.

* * *

다음 날.

케이든은 자신에게 도착한 서신 한 장을 보고는 소리쳤다.

“바로크의 미식회에 간다고?”

탕!

그는 황당하다는 듯 서신을 쥔 채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야. 또, 또 그런 곳을 간다고!”

그는 두통이 일기 시작하는지 제 관자놀이를 짚고는 중얼거렸다.

“갈까마귀.”

그의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나 부복하자, 케이든이 말했다.

“이, 이 모임이 언제지?”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그냥 아무 사교장만 뒤져도 소식은 금방 나올 테지. 크라이언트와 아발란쉬가 참석한다고, 그놈들이 좋다고 소문을 낼 게 뻔하니까!”

점점 화가 번져 왔는지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장소와 참석 인원 등 제반 사항을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최대한 빨리 알아내서, 다른 것들이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해!”

* * *

서신을 받은 케이든이 어찌 생각하든, 제 행선지를 보고한 것으로 할 일을 마친 엘렌은 이른 아침 채비를 마치자마자 곧장 정보실을 향했다.

“마린!”

“네, 사장님.”

“오늘 확인해야 할 자료!”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마린은 수잔 옆에 분류돼 쌓여 있는 자료들을 뒤적여 작은 서류 묶음을 한 뭉치 가져왔다.

들어오자마자 소파로 직행해 털썩 앉은 엘렌은 수잔이 가져다준 커피를 받아 들었다.

마린이 내미는 자료를 한 손으로 툭툭 쳐 펼친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고는 말했다.

“퀴니시의 배가 들어왔군?”

“네. 좀처럼 왕래가 없는 국가이기에 오히려 정보는 확실합니다.”

“오자마자 오세먼과 접촉했고?”

“네? 아, 네. 그렇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녀가 보고서를 채 넘기지도 않고 묻자 마린이 물었다.

“뻔하지. 오세먼이 어쩔 수 없이 프란체 항을 이용하고 있지만, 매번 지불하는 이용 대금이 아깝지 않겠나? 어떻게든 매년 조금이라도 유리한 협상을 진행하기 위해 끄나풀은 지독할 만큼 박아 놨겠지.”

“예.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런 정보를 그들이 놓칠 리가. 새로운 문물이 들어와도, 사실 그 근방에서는 오세먼 정도가 아니면 전국에 유통할 만한 유통망을 갖추지 못한 것도 크고.”

그녀의 말에 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렌이 그녀가 들고 있던 것들을 마린에게 넘기며 말했다.

“지시를 수정하지. 이제부터는 그들의 동향을 살피도록 해.”

“그들이라 하심은?”

“오세먼 말이야. 우리가 그들보다 빨리 선수를 쳐야 해.”

“아, 그러잖아도 그 부분은 따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마린은 같이 묶여 있던 종이들을 뒤적였다.

“여기 있습니다. 오세먼이 트리발로스와의 무역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입니다.”

엘렌은 놀란 눈으로 그녀가 내미는 것을 받아 들었다.

“벌써?”

그녀는 한차례 보고서를 뒤적이더니 말했다.

“정말이네. 조금 서둘러야겠어.”

퀴니시의 향신료가 대박을 치자 뒤늦게 트리발로스에 진출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애초에 트리발로스의 승전이 발표되자마자 갈아탈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상품을 풀어놓는 시기만 조절했었나 보지? 하여튼 약아 가지고는.’

엘렌은 쯧, 혀를 한번 차고는 말했다.

“일곱 척이라 적혀 있군. 확실한 건가?”

“예. 굳이 다른 항구를 이용할 필요도 없고, 일곱 척이 전부가 맞을 것이라 봅니다.”

“우리는 들어온 게 다섯 척이지?”

“예.”

“세 척 더 보내. 여덟 척.”

그녀의 지시에 마린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초반 물량은 어차피 우리 거니까.”

엘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부탁하지.”

“앗, 사장님. 벌써 가시나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발견한 수잔이 아쉽다는 듯 그녀를 불렀다.

“이다음에 일정이 있어서. 무슨 일 있나?”

“사장님 덕분에 즐기게 된 이 멋진 마들렌을 저희끼리만 해치워야 하나 해서요.”

그녀는 시무룩한 얼굴로 제가 손에 들고 오던 커다란 쟁반을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미안하지만 난 선약이 있어. 다음에 같이 들지.”

“저번의 잘생긴?”

“아니. 오늘은 어여쁜 영애이지.”

“어머, 능력도 좋으셔라.”

오늘도 마린은 수잔의 농담에 눈치를 주었지만, 정작 엘렌이 웃자 그녀도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그럼 다녀올 테니, 다들 조금만 더 힘내고.”

“네. 그럼 다녀오세요!”

수잔의 밝은 배웅을 받으며 엘렌은 사무실을 나섰다.

* * *

바로크의 미식회.

바로크가의 소소한 지인 모임에서 시작된 이 행사는 크레센트 이스타지오의 탄생과 함께 그 규모가 점점 커져, 이제는 나름 전통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행사였다.

이제 와서는 일주일에 한 번 교류를 가지며 서로의 소식을 전하는 게 주목적인 모임이 되었는데, 참여자들이 돌아가면서 오찬, 혹은 만찬을 대접하고, 그러면서 저희 나름의 결속을 다진다.

그 말인즉, 이 모임은 귀족파의 일원들 중 한가하니 할 일 없는 인사들이 맛있는 것도 주워 먹을 겸, 저희들의 고아한 취향도 자랑할 겸 겸사겸사 모여서는 이런저런 가십이나 읊어 대던 자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로이체가에서의 오찬이 있는 날.

로이체가의 마차 보관소에는 기존 회원들의 마차가 줄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로이체 저택이 위치한 곳에서 두 블록 떨어진 거리에, 커다란 마차 한 대가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골목 어귀로 고급 목재로 만든 티가 역력한 묵빛 마차 한 대가 들어오자, 그것만을 기다렸다는 듯 마차의 문이 벌컥 열리며 소녀 한 명이 뛰쳐나왔다.

“크라이언트 영애!”

묵빛 마차가 멈추고, 곧 마차의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내렸다.

“아발란쉬 영애.”

엘렌은 제게 뛰어드는 메이를 살포시 잡았다.

“늦어서 미안해요.”

“고작 몇 분인데요. 게다가 고지한 시각까지는 아직 넉넉히 시간이 남았고요.”

“고마워요.”

엘렌은 생긋 웃어 주고는 그녀를 제가 타고 온 마차 안쪽으로 이끌었다.

“되었네. 이제 들어가지.”

마부에게 저택 내로 진입할 것을 명령한 엘렌은 창구를 밀어 닫고는 메이에게로 돌아앉았다.

“조금 갑작스러웠을 것 같은데,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마워요.”

“후후,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네요.”

메이는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지금 영애의 곁에서 보는 것들이 확실히 중요할 테니까요. 숙부님…… 아니, 후작님께서도 그리 말씀하셨고요.”

“그렇군요. 참석한다는 답신이 와서 얼마나 대견했는지 몰라요.”

“응원해 주시는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힘내야죠.”

그녀는 애써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나도 응원할게요.”

엘렌은 설핏 마주 웃어 주고는 오늘의 당부해야 할 말을 전했다.

“메이. 오늘은 조금 주의가 필요할 거예요.”

그러자 메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미식회 말씀이신가요?”

“미식회라. 일단 그런 명목의 모임이기는 한데…….”

엘렌은 아직 순수하게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뭐, 음식을 앞에 두고 열심히 입을 놀리는 데 집중한다는 점에서는 그냥 보통의 파티와 다를 바 없답니다.”

그녀의 말이 웃겼는지 메이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사실 얼핏 들어 본 적은 있어요. 그 유명한 바로크 공자가 참석한다는 이야기 같은 거요.”

“아, 그렇지요. 오클라니 바로크도 확실히 주의가 필요한 대상이긴 하죠.”

엘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클라니 바로크.

그는 바로크 후작가의 악명 높은 장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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