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제가 레이디들의 화법에는 익숙지 않아 실례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그러자 클라우디스는 정자세로 자세를 고쳐 앉은 뒤 입을 열었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묻겠습니다.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혹 무언가 다른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습니다.”
그가 무겁게 꺼내는 이야기에, 엘렌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어머. 그리 생각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그야…….”
그는 대답하기가 난처한 듯 슬쩍 고개를 돌렸다가, 가벼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영애께서 절 보자고 하실 줄은 몰랐으니 말입니다.”
“어머, 어째서죠?”
“전 어쨌든 2황자 전하의 기사이고…… 영애의 가문과는 적대해 온 바로크가 소속이기도 하니까요.”
그러자 엘렌이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절 도와주셨는걸요.”
“제가 말입니까?”
“네.”
엘렌은 두 눈을 감고, 자신의 가슴 위에 양손을 포개 올렸다.
“경께서는 아니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힘든 와중에 그렇게 신경 써 주시는 분들이 얼마나 기억에 남는지, 경께서는 아시나요?”
“……그건.”
그가 말을 얼버무리자 엘렌이 후후 웃고는 말했다.
“제겐 그랬답니다. 사실 별로 의식하고 계시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했어요. 알면 저한테 굳이 묻지 않으실 분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러자 머쓱한 듯 클라우디스는 제 목덜미를 한번 거칠게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해 그랬을 뿐입니다.”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차가 준비되었다는 종업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렌이 출입을 허락하자 그들은 찻잔을 내려놓고 테이블을 세팅한 뒤 사라졌다.
그녀는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클라우디스를 향해 미소 지어 보였다.
“어떤 마음에서 했더라도 저를 도우려 하셨다는 점은 바뀌지 않습니다. 저도 그저 꼭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엘렌은 탁자 위로 작은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이것, 받아 주세요.”
“이것은……?”
제 앞까지 밀려온 상자를 보며 클라우디스가 의아하게 묻자, 엘렌이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경께 어울릴 만한 것으로 골라 보았어요.”
그녀는 제 손으로 부드러운 소재로 제작된 상자를 직접 열어 주었다.
들어 있는 것은 영롱하게 반짝이는 예장용 브로치였다.
“……멋지군요.”
“루비와 금으로 만든 브로치랍니다. 제가 볼 때는 이것이 잘 어울리실 듯해서 골랐지요. 경의 제복이 흰빛이기도 하니 말이에요.”
엘렌은 다시금 상자를 그의 앞으로 밀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제게 과분한 물건입니다. 이런 것을 받고자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손까지 내저어 보이며 제게 내밀어진 상자를 거절했다.
그의 이런 말은 반쯤은 진심이기도 하고, 반쯤은 거짓이기도 했다.
정말로 물욕은 딱히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접근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보다 긍정적인 사이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이런 물건이 오갈 것이고, 그것을 서로 적당한 수준으로 챙겨야 할 것이라고까지는 생각했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나요?”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크기와 색을 보니 꽤 귀한 물건일 듯했다.
세공 또한 정교한 것이 크라이언트가 데리고 있는 세공사 중 이름깨나 날리는 자의 작품으로 보였다.
“그저 제 행동에 대한 대가를 받는 듯해 마음이 편치 않아 그렇습니다.”
“부담이 되신다면 이리 생각해 주세요. 경께서 착용해 주신다면 분명한 홍보 효과가 있으니까요.”
그녀가 민망하다는 듯 홍조가 핀 뺨을 손으로 가렸다.
“사실 이건 너무 계산적으로 보일 것 같아 일부러 하지 않은 말이었는데, 결국 이렇게 하게 되는군요.”
그녀가 부끄러운 듯 작게 웃는 모습에, 클라우디스는 퍽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확실히 눈앞의 여인은 아름다웠다.
비록 한번 혼인했었다고는 하나, 딱히 낳은 후계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능력이 있다.
존경할 만한 면모가 있는 배우자란 꽤나 만나기 힘든 존재라는 것을 아는 그는 이 상황에 대한 자괴감을 느끼기도 잠시, 어쩌면 이대로 일이 잘 풀리는 것도 제법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군요. 영광입니다.”
“과찬이세요. 오늘 경께서 와 주셔서 정말로 영광인 것은 저랍니다.”
엘렌이 생긋 미소 지었다.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경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말에 클라우디스는 고민했다.
사실 시간을 내는 것은 그다지 문제가 아니었다.
이 성과를 황자에게 보고한다면, 분명 그는 얼씨구나 좋다며 얼른 나가라고 자신을 종용할 테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여기서 공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지금은 적당히 황실 기사의 스케줄을 수행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자주는 어렵겠지만 간혹 날이 맞는다면 좋겠군요.”
“간혹 날이 맞는 때라……. 혹시 경께서는 활동하시는 사교 모임이 있나요?”
“따로 참석하는 모임이라……. 음.”
“아, 별달리 없으시면 괜찮답니다. 승마 클럽이라든가, 가문에서 주도하는 미식회라든가 하는 것들은 참석을 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냥 여쭤보았어요.”
“……정기적은 아니지만 미식회에는 참여하긴 합니다. 아무래도 저희 가문의 이름을 달고 있는 행사니까요.”
클라우디스는 앞으로는 정기적인 사석까지 가지게 된다니 황자가 아주 좋아하겠다고 생각을 하며 말했다.
“역시! 그 미식회는 저도 들어 봤답니다. 바로크가에서 시작된 전통 있는 행사니까요.”
엘렌이 짝, 손뼉을 치며 밝게 외쳤다.
그런데 돌연 그녀의 낯이 어두워지더니, 어째서인지 풀이 죽은 목소리가 이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모임이라면 제가 참석하기는 어렵겠군요. 전 가문의 유력한 후계라 보기엔 어폐가 있으니까요.”
그제야 아차 싶었던 클라우디스는 당황으로 인해 굳는 낯빛을 숨기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엘렌으로서는 아주 같잖다고 생각하는 부분이었지만, 그 모임에서 회원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이는 귀족파의 구미에 맞는 가문의 유력 후계들뿐이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염두에 두었던 것은 승마 클럽이었던 모양인데.’
그러잖아도 얼마 전 얼핏 크라이언트 백작이 목장을 다녀온다며 한동안 수도를 비웠었다는 소리를 들었었다.
왜 그걸 떠올리지 못했을까.
그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다급히 그럴듯한 말들을 가져다 붙였다.
“제 생각엔 딱히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 유력 후계들만 모이는 자리로 보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 있긴 했습니다만, 실상은 그만한 권한과 능력을 갖춘 이들이 서로와 맞는 이들을 찾다 보니 그런 자리가 되었을 뿐이니까요.”
그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최근 아발란쉬 영애와 자주 어울리시는 것 같던데. 친구분과 함께 들러 보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그러자 엘렌이 두 손을 모으며 활짝 웃었다.
“정말이신가요? 저는 좋답니다.”
그녀는 달콤한 차를 다시 한 모금 삼키고는 물었다.
“그러면 날은 언제쯤이 좋을까요?”
* * *
저택으로 돌아온 엘렌은 오자마자 집사를 찾았다.
“집사!”
집사는 엘렌의 마차가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포치로 달려왔지만, 미처 그녀의 속도에 맞추지 못했던 탓에 그는 저 멀리에서 헐레벌떡 뛰어오며 대답했다.
“예, 아가씨!”
엘렌이 그에게 입고 있던 얇은 여름용 카디건을 벗어 건네며 말했다.
“아발란쉬 영애에게 편지를 좀 부쳐 주게. 당장 내일 오후, 바로크의 미식회가 있으니 오고 싶으면 오라고. 아, 나도 참석할 예정이라는 것도 전하고.”
“바로크의 미식회 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이 소식들은 전부 태자궁으로도 전달하게.”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건 크레센트 황자 지지 모임이 아니었습니까?”
그의 질문에 엘렌은 성큼성큼 걸어 나가며 말했다.
“그러니까 가는 거지. 일석이조지 않아.”
그녀의 뒤를 따라 걸으며 들은 말을 잠시 곱씹던 집사는 수초가 지나서야 감탄사를 뱉었다.
“아, 트리발로스의 향신료!”
“그래.”
엘렌이 만족스레 웃자, 집사가 말했다.
“그곳을 통해 저희 상품을 홍보하실 생각이군요.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모임은 제가 듣기로 귀족파 후계들의 사교장이라던데.”
“안 괜찮으면 저희가 내게 어쩔 수나 있나?”
그녀는 노골적인 비웃음과 함께 말했다.
“아발란쉬 영애도 함께 가는 데다가 2황자의 비호도 있지. 생각보다도 내게 지나치게 치근덕대는 것을 보니 그쪽도 지금 꽤나 손이 급한 것 같은데, 함부로 했다가는 장기적으로 그들 앞엔 공멸밖에 남지 않을걸.”
“그렇지 않아도 최근 오세먼, 오스틴령 등지에서 살기가 어렵다며 떠나는 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오스틴?”
엘렌의 물음에 그는 최근 들은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놓기 시작했다.
“예. 농지가 대부분인 남서부 영지들은 이번 재해 피해가 꽤 큰지, 인근의 아발란쉬령이나 프란체령으로 이주를 계획하는 이들이 많은 모양이더군요.”
“흐음……. 다른 곳은 몰라도 오스틴령은 숨통을 틔워 놔야 해. 전향하면 확실히 살아남는다는 예시로 써먹어야 하니까.”
저기는 어떻게 살려 놔야 할까.
엘렌이 잠시 고민하고 있자, 집사가 말했다.
“이 부분도 전하께 말씀 전달해 드리시겠습니까?”
“음……. 그래. 일단 그러는 게 좋겠네.”
피곤했던 그녀는 당장의 지시 사항은 모두 전달했다고 생각하자마자 곧장 방문을 열었다.
그때, 집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아가씨. 아직 한 가지가 더 남았습니다.”
“아, 그래. 어서 말하게.”
“아까 정보실에서 전언이 왔었습니다. 트리발로스에서 출항한 저희 상선이 템트 항으로 입항했다고 합니다.”
“그래?”
일이 순탄히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에, 엘렌의 낯이 피곤을 잊고 환히 밝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