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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56화 (56/128)

<56화>

바깥의 휴게실로 나와 있던 레이첼 이든은, 엘렌을 비롯한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오자 마시고 있던 물컵을 내려놓고는 인사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어찌, 수술은 잘 됐나요?”

“일단 안에 금속 막대를 대어 고정은 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골절상의 특성상 예전과 같이 생활하기는 어려우실 것이고, 그래도 잘 붙으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일상생활 정도는 가능하실 겁니다.”

“다행이군요. 영애는 안에 있나요?”

“안쪽 베드룸에서 쉬고 계십니다. 지금은 진통제 탓에 별로 제정신이 아니시니, 나중에 뵙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알겠어요. 고생했어요.”

“그리고 영애께서는 한동안 이곳에 머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일단 당장 짼 자리에 염증이 생기지는 않는지도 봐야 해서요. 제가 관리하고 싶습니다만.”

“그렇다고 하는데 백작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필요하다면 그리해야지. 알겠네.”

소르본 백작은 그제야 몸에 힘이 빠지는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애 상태는 한 번 보고 가고 싶은데. 괜찮겠는가?”

“그냥 보시기만 하시는 거라면 상관없습니다.”

이든은 허락과 함께 방 안쪽으로 다가가 베드룸의 문을 열었다.

메이는 팔에 부목을 댄 채 잠들어 있었다.

“그새 잠드셨네요.”

“부목이 덧대어져 있어 상태를 확인할 수가 없군. 수술이 잘 된 것은 맞는가?”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했습니다. 아직 어리시니 그래도 회복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내가 확인하는 것은 안 되나?”

“보셔도 상태를 아시기 어려울뿐더러, 부목을 제거해 드리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러자 기분이 나빴는지 소르본 백작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또박또박 말이 많군.”

“죄송합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그럴 수 있지요. 의사로서 해야 하는 말을 한 것이니.”

엘렌은 둘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조용히 나가죠.”

그렇게 말이 끊기자, 소르본 백작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문을 나섰다.

달칵, 엘렌은 문을 닫고 나오자 백작이 말했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네. 오늘 하루가 유난히 길군.”

“조심히 가시지요.”

엘렌은 집사에게 백작을 배웅한 뒤 자신의 방으로 오라 말을 남기고는 먼저 방으로 올라갔다.

* * *

그녀가 가볍게 씻고 나오자 바깥에서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아가씨. 접니다.”

“들어와.”

딱 타이밍에 맞게 도착한 그는 조용히 문을 닫고 들어왔다.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엘렌이 입을 열었다.

“이번 사고에 페리윙클이 연관되어 있어. 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참에 확실하게 손을 쓰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일단 그들 가문의 어음은 우리 계열사에서는 받지 않는다고 해.”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버틸 수 있으니까 하는 거야.”

엘렌은 꼬고 앉은 다리의 한쪽을 까딱이며 말했다.

“페리윙클 하나만 보면 당연히 그렇습니다만, 주변 세력들이 그 횡포를 가만히 두고 볼는지요?”

“보지 않으면? 막을 수는 있고?”

“공멸까지는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눈썹이 아래로 축 처진 것이 너무 무모한 행동이 아닌지 진심으로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엘렌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작정하면 가능은 하겠지만, 나라면 페리윙클을 버리고 크라이언트에게 손을 내밀겠어. 무시하기엔 너무 먹음직스럽지, 우리가.”

“아. 그렇군요.”

그제야 얼굴을 조금 편 집사는, 그녀가 이야기하는 것들을 곧장 메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페리윙클이 관련된 채권, 전부 사들여. 우리가 사들이는 티가 나지 않도록 여기저기 따로따로 은밀히. 일시 투매해 버리려니까.”

“예. 아가씨.”

일시 투매로 인해 가격이 급락하면, 사람들은 페리윙클가의 자금 사정에 의심을 품게 될 것이다.

그 의심은 가문의 신용도로 번지게 되고, 멈춰 버린 돈의 흐름은 그들의 사업 또한 마비시킬 것이다.

“치기 어린 장난의 대가가 뭔지, 보여 줘야지.”

* * *

다음날.

엘렌은 아침 일찍 메이가 있는 곳을 찾았다.

출근해 있던 주치의, 레이첼 이든이 그녀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소르본 영애는요? 괜찮나요?”

“아직까지는 크게 이상한 점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본인은 조금 아프고 힘들겠지만요.”

“그건 유감이네요. 영애는 일어나 있나요?”

“네. 들어가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엘렌은 베드룸의 문을 열었다.

메이는 마냥 맑은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근심이 사라진 낯을 하고 있었다.

“아. 크라이언트 영애!”

“잘 주무셨나요.”

“배려해 주신 덕분에요. 정말 영애 덕분이에요. 어찌 됐든 무사히 수술까지 끝마치다니요.”

“제가 한 게 뭐가 있나요.”

엘렌은 조금 민망하다며 웃어 보였다.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다행인 거죠. 손도 써 보지 못하고 왼손을 잃지 않아도 되잖아요.”

메이는 그리 말하며 활짝 웃어 보였다.

“하지만 소르본 영애. 이 일이 무사히 잘 지나가더라도, 나는 이대로 사건을 좌시할 생각은 없어요.”

“네?”

엘렌의 말에 메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영애의 일도 유감이지만, 엘시어도 함께 표적이 됐어요.”

“표적이라니요?”

명백히 누군가의 악의를 시사하고 있는 단어에 동그랗게 뜨여 있던 메이의 눈이 찌푸려졌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제가 왔을 때 영애는 이미 잠들어 있었죠. 아직 이야기를 전달하지 않았다는 걸 깜빡 잊었네요.”

엘렌은 메이의 베드 앞에 놓인 스툴에 앉으며 말했다.

“어제 아카데미에서 올리버 오스틴 군을 만났어요. 그리고 그가 이야기했죠. 밀러 페리윙클과 테라 로이체가 이번 사고를 만들어 냈다고요.”

“페리윙클과 로이체? 사실인가요?”

“오스틴 군이 자신의 이름으로 서명까지 했어요.”

엘렌은 그리 말하며 자신이 들고 다니는 작은 클러치를 열어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정말이네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하는 메이의 얼굴에는, 짜증과 민망함, 그리고 미안함 등이 잔뜩 뒤섞여 있었다.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영애에게 그런 짓까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엘시어가 휘말린 이상 나는 가만히 둘 생각이 없어요.”

“이해해요. 저 같아도 그랬을 거예요.”

“영애가 그리 말해 주니 마음이 한결 가볍네요. 그래서 말인데―”

엘렌이 슬쩍 운을 떼며 메이를 쳐다보았다.

“아발란쉬 후작께 연락을 넣을 생각이에요.”

“숙부께 말인가요?”

“네. 부친이신 백작께서는 이번 일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려우신 듯하여.”

“아…….”

메이가 알 만하다는 듯 짧은 감탄사를 남겼다.

“하지만 아발란쉬 후작이 되면 이야기가 다르니까요.”

“무슨 말씀이신지는 이해했어요. 하지만 숙부님께서 나서 주실까요?”

“물론이죠. 얼마 전 파티에서 뵈었을 때도, 영애의 이야기로 즐거워하시는 것을 보았답니다.”

“숙부님께서 저를 많이 예뻐해 주시긴 하셨어요. 하지만 그것과 권력은 다른 힘으로 움직이잖아요. 아버지께서도 저를 충분히 사랑해 주시고 계시는 것처럼요.”

메이는 그리 말하며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손인 오른손을 꽉 말아 쥐었다.

“저도 마음 같아서는 크라이언트 영애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그 애들이 어떤 식으로든 보복을 당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랬다가, 만약에 제가 이대로 천덕꾸러기 취급이나 받으며 살게 된다면…….”

메이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제가 너무 현실을 모르고 과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엘렌은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메이의 손을 살짝 쥐었다.

“걱정 말아요. 우리 엘이 이야기하지 않던가요?”

우리의 목표는 애초에 페리윙클을 잡아 족치는 것이었다고.

엘렌은 싱긋 웃어 보였다.

“후작께 보여 드릴 증표 하나만 주세요. 가능하다면 전후 사정을 쓴 자필 편지도 있으면 좋겠네요.”

* * *

메이의 방에서 나와 중앙 홀로 나오자, 집사가 급히 그녀를 찾아왔다.

“아가씨. 크렘벨 공작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크렘벨 공이? 이 시간에 여길?”

“예. 아가씨를 뵈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어찌할까요?”

“어찌하긴, 쫓아내야지. 나는 출타 중이라고 전해. 난 이 길로 아발란쉬 후작저로 갈 생각이니까.”

“예. 알겠습니다.”

집사는 그대로 길리언에게 돌아가 전했다.

“죄송하지만 아가씨께서는 출타 중이십니다. 다음번에 약속을 잡으신 뒤에 다시 방문해 주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어째 기시감이 드는데. 그렇지 않나?”

길리언이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이 가문은 주인들이 자리를 지키는 법이 없군. 됐다. 가지.”

길리언이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집사는 당황했다.

저번에는 제 분에 이기지 못해 으름장을 놓고서야 떠났었는데, 이번에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이는 그의 모습이 또 의외였던 것이다.

다시 마차에 오른 길리언이 마부에게 지시했다.

“후문으로 가지.”

“예!”

찰싹, 말을 채찍으로 내리치는 소리가 울렸다.

* * *

‘앞으로는 계속 이럴 심산인가 보지?’

길리언은 지금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 뜨거웠다.

마치 다른 결정권자에게 묻고 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집사는 저택 내로 한 번 들어갔다 나온 뒤에야 답을 들고 왔다.

백작이 출타 중이라는 것은 그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다만 엘렌의 행방은 확인이 되지 않아 곧장 이리로 온 것인데, 여기서 출타 중이라는 메시지를 듣다니.

길리언은 뿌득, 손을 말아 쥐었다.

‘그 여자는 여기 있을 거다. 아마 계속 저택 내에 있을 것이 아니라면 외출할 때는 후문으로 빠져나가려 하겠지. 그러니 이곳을 지키고 있으면 언젠간 지나가겠지.’

이렇게 한낱 여인 하나를 기다리는 데 얼마나 걸릴지 모를 시간을 쏟아부으려 하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지금 자신은 조금 이상했다.

당장 이곳에 올 때만 해도 그랬다.

엘시어 크라이언트의 사고 소식과 황태자의 거동 소식을 듣자마자 이미 자신의 발은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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