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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55화 (55/128)

<55화>

엘렌은 총장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습니다. 황실의 명이니 내게 감사할 필요는 없지요.”

총장은 어디까지나 황실의 명에 따른 것이지 다른 외부인을 도운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따지자면 그것이 맞기는 했다.

엘렌에게 가장 어려운 상대가 바로 이런 이였다.

딱히 그녀와 어떠한 이해관계로 엮일 일이 없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좋아는 하지만, 역시 다루기 어려워서 피곤해…….’

사실 마음 같아서는 학생들 탐문도 해치우고 싶지만, 이제는 시간이 늦어 거기까지 요구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오늘은 단순 마차 관리 실수로 보기에는 미심쩍은 점이 많다는 것을 알아낸 정도로 만족해야지.’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엘렌이 적당한 선에서 포기하고 이만 돌아갈 것임을 선언하자, 총장은 케이든을 향해 물었다.

“전하께서도 이만 가십니까?”

그 말에 케이든은 잠시 생각하더니, 곧 총장을 향해 술잔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씩 웃었다.

“나는 온 김에 조금 더 둘러보고 가겠습니다.”

“아이고. 전하.”

총장이 골치 아프다는 듯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면 두 분, 여기서 인사를 드리지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영애도 오늘 고생이 많았습니다. 다른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내가 연락을 넣을 테니, 오늘은 이만 들어가 푹 쉬는 걸로 하지요.”

“감사합니다. 전하.”

인사를 나누고 나자 케이든과 총장은 총장실이 있는 건물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엘렌은 그대로 바깥으로 향하는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런데 모퉁이를 돌아 나가자, 저 먼 곳에서 허겁지겁 자리를 뜨고 있는 남학생이 보였다.

‘익숙한 모습인데. 아까 이쪽을 흘끔흘끔 보고 있던 소년 아닌가? 오스틴……?’

아무래도 정말로 무언가 켕기는 게 있는 모양인데.

엘렌은 발걸음을 빠르게 옮겨 소년의 뒤를 쫓아갔다.

위험한 걸 알면서도 여기까지 접근해서 우리를 보고 있었던 점, 마주치자마자 도망치려는 점.

‘저건 한번 잡아 봐야겠어.’

엘렌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스틴 영식!”

허겁지겁 걸어가던 그는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놀라서는 비명을 질렀다.

“히익!”

“아까도 눈 마주쳤죠, 우리?”

소년은 기세로 밀고 들어오는 여인을 상대해 본 경험이 없었다.

그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제 발에 제가 걸려 넘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균형을 잡고는 말했다.

“그, 누, 누구시죠! 저를 어떻게 아시고 부르셨는지……!”

“페리윙클 영식과 절친한 동기 사이라고, 총장께서 말씀하셔서 알았답니다.”

“저, 절친한 사이라고요?”

“그럼요. 그보다 아카데미 마차 사고 이야기는 들었죠?”

“아뇨! 모르겠는데 제게 왜 이러세요!”

“전문가들의 말로, 마부들의 관리 소홀로 생긴 문제라기보다 다른 외부 요인에 의한 문제 같다던데.”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왜 제게……!”

“오늘 보니까 마차 보관소 근처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영식이. 그러니 묻는 게지요. 혹 아는 게 있나요? 이곳에서 어떤 학생들을 봤다든가.”

“전 모, 몰라요……!”

“아는 게 있다면 지금 내게 말하는 게 좋을 거예요. 범인들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은 결국 시간문제니까.”

한 발 한 발 다가가며 계속 몰아붙이던 엘렌은 그의 코앞에서 멈추었다.

“그러면 그때 가서는 늦어요.”

점점 가까워지던 그녀는 마침내 그의 앞에서 멈추었고, 올리버 오스틴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며 그녀를 보았다.

“내가 나를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줄 때 잡도록 해요. 나는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줄이고, 당신은 페리윙클을 밑에 둘 수 있는 안정적인 가문의 영식이 되고. 그들과 함께 길바닥에 나앉고 싶지는 않잖아요.”

올리버 오스틴은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어떡해. 들킨 것 같아. 하지만 말하자니 무서워. 어떡하지?

아직 어려서인지 그가 하고 있는 생각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나고 있었다.

침묵 속의 몇 초가 지나고, 시간이 지나도 엘렌이 자신의 앞에서 비킬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는 결국 고개를 팍 숙였다.

“페리윙클이 길바닥에 나앉는다는 말은 도대체…….”

“말 그대로예요. 그 집안의 위세가 아카데미에서나 통하지, 바깥에서는 어느 정도나 통할까.”

엘렌이 피식 비웃으며 말하자, 동의할 수 없다는 듯 억울함이 묻은 소리로 올리버가 말했다.

“그들은 2황자님의 측근이에요. 적어도 우리 중엔 그들에게 함부로 할 수 있는 이가 없다고요.”

“그건 영식의 말대로 ‘당신들 중’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라,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고. 뭐, 지켜보면 알게 될 거예요.”

엘렌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내게 이득을 가져다주는 자에게는 그만큼의 보상을 안겨 주는 편이죠. 어때요? 그도 그런가요?”

엘렌의 질문에 올리버는 입학 이래 처음으로 그간의 밀러 페리윙클의 모습을 되짚어 보았다.

그 애는 내게 자신이 하는 짓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허구한 날 심부름이나 시켜 댔지.

하지만 그래서 그 애는 내게 무엇을 해 주었지?

‘온통 눈총과 모욕뿐…….’

그랬다. 자신은 받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가문은? 페리윙클가와 우리 가문의 사이는?’

자신이 모르는 모종의 연결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심지어 크라이언트는 황제파의 구심점 중 하나라고 보아도 무방한 곳이다.

그런 그들의 말을 믿고 페리윙클의 뒤통수를 쳐도 되는 것일까.

“이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그리하고 있을까.”

엘렌은 팔짱을 끼고 긴 손가락을 움직여 톡, 톡 자신의 팔을 두드렸다.

“크라이언트와 페리윙클 사이를 저울질하고 있을까?”

엘렌은 고개 숙인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올리버 오스틴의 눈을 마주 보았다.

“히익……!”

그가 깜짝 놀라 이상한 신음을 뱉자, 엘렌은 다시 허리를 펴고는 쿡쿡 웃었다.

“비교는 좋은 습관이지요. 스스로 생각해 보려는 그 모습은 좋아요. 하지만 알고 있는 정보가 적어 합리적인 결정을 할 수가 없다면, 운에 맡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랍니다.”

엘렌은 슬쩍 웃으며 몸을 뒤로 뺐다.

“어디에 배팅해 보렵니까?”

페리윙클은 길바닥에 나앉을 것이다, 건재할 것이다. 정답은 어디일까요?

엘렌에게서 느껴지는 압박에 올리버는 눈을 꽉 감아 버렸다.

왜 하필 들켜서!

왜 하필 내가 이 자리에서 망을 봐서!

내가 이 여자랑 마주친 것을 본 애들이 있을까?

아니야. 나는 모퉁이를 돌고 나서 마주쳤어. 아직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 아는 사람은 없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올리버는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움직여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꿀꺽.

‘그래. 내가 지금 입을 열어도, 가문에는 문제없을 거야…….’

올리버 오스틴은 무겁게, 아주 무겁게 입술을 열었다.

* * *

저택으로 돌아가니 소르본 백작이 응접실에 앉아 초조하게 손을 비비고 있었다.

“아, 왔소?”

시간이 꽤 늦었음에도 백작은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였다.

엘렌이 깜짝 놀라 말했다.

“세상에. 불편하지 않으셨는지요? 편하게 방을 하나 내드릴 일인데…….”

“아니. 아니오. 내가 누워 있기가 싫어서 방을 준비해 준다는 것을 마다했소.”

“걱정이 많이 되셨나 보군요.”

엘렌이 걸치고 있던 얇은 숄을 벗어 집사에게 건넸다.

“주치의가 뭐라고 하던가요?”

“손목부터 내팽개쳐졌다고 하니, 손목 부기를 보고는 이건 째 봐야 알겠다고 하더군. 째서 상태가 심각하면 팔을 못 쓸 수도 있다고…….”

소르본 백작은 우울해졌는지 말을 하다 말고는 입을 다물었다.

“괜찮을 겁니다.”

엘렌은 집사에게 따듯한 차를 내올 것을 명령하고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수술은 잘 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으니……. 일단 지금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 볼까요.”

“다른 이야기?”

“아카데미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아. 그래. 어찌 되었소? 마차 관리에 대해 따지러 간다고 했던가?”

“예. 원래는 그게 목적이었습니다만…….”

“원래는?”

소르본 백작이 반문했다.

엘렌은 집사가 들고 온 차를 건네받아 백작의 앞에도 한 잔 내려놓았다.

“일단 마차 관리에 대해 먼저 물었습니다만, 오늘까지의 소견을 드리자면 당장 문제가 될 만한 점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면? 문제가 없는데 왜 사고가 일어난단 말이오!”

그는 급작스럽게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언성을 높이며 소리쳤다.

“애를 보시오! 저래서 어찌 결혼이나 시키겠소! 당장 가문의 손이 이렇게나 막대한데……!”

“그리고 중요한 건 지금부터입니다만, 가서 아이들을 만나 보니 아무래도 페리윙클 영식의 소행 같았습니다.”

“페리윙클?”

“예.”

그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갑자기 그 이름이 왜 나오는 거요? 소행이라니?”

“말 그대로, 아이들이 타고 나간 마차의 바퀴에 손을 댄 게 페리윙클인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확실한가?”

“증언이 있었습니다.”

“증언이라면?”

“그의 동급생이 구체적인 방법과 함께 누구의 주도로 그와 같은 일을 벌이게 되었는지, 제게 밀고를 해 왔습니다.”

“그 밀고자가 페리윙클이라 말했다고? 그게 모함이 아니라 어찌 믿겠소.”

그는 엘렌의 말을 의심하며 물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증언을 남겼기 때문이지요.”

“이름을 걸고…….”

소르본 백작이 침중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되뇌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애들의 치기 어린 장난이 아니겠소. 그걸 그리 몰아가는 것은 아직 이른 이야기인 듯하오.”

“아. 장난이요.”

“그래.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니겠소.”

처음에는 사고에 대해 노발대발 분을 터뜨리던 백작은, 페리윙클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그녀의 말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일단 그에 대한 것은 치안대에서 조금 더 이리저리 알아보고 연락을 보내오지 않겠소. 그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오.”

“……그러지요.”

엘렌은 그런 소르본 백작의 태도에도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백작은 전에도 그랬으니까.

그녀가 아는 과거 속에서 백작은 그들에 대한 응징이나 복수가 아닌, 그들과의 타협으로 일을 끝맺었었다.

그때 뒤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들어와.”

그러자 시녀가 한 명 들어와 말했다.

“이든 님께서 수술이 끝나셨다고 말씀을 전달드리길 부탁하셨습니다.”

“가도 된다고 하던가?”

“오셔도 된다고 합니다.”

“그렇군. 가 보지요.”

그들은 저택의 한 곳을 개조해 만든 작은 의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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