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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57화 (57/128)

<57화>

그래도 한때 처남이었으니 얼굴은 비춰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몇 발자국을 더 움직이니, 자신은 이미 외출복 차림으로 바깥을 나서고 있었다.

처남. 가족.

‘그전까지는 그다지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단어였는데.’

그런데 어째 지금은 마치 좋은 핑곗거리처럼 그것부터 떠올랐다.

그렇게 후문에서 기다리길 얼마간.

그의 예상대로 후문에서 마차 한 대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저 마차 앞을 가로막도록!”

길리언의 명령에 따라 마차가 길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그것을 본 크라이언트가의 마부가 기겁해서는 소리쳤다.

“어, 어! 저거 뭐야!”

그는 앞으로 끼어들어 오는 마차에 놀라 발을 짓쳐 들려는 말들의 고삐를 당겼다.

이히히힝!

갑자기 나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엘렌이 밖을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인가?”

“저희 앞에 웬 마차가 한 대 끼어들었습니다. 아예 대놓고 길을 막고 있습니다, 아가씨!”

“가서 무슨 일로 그러는지 물어보도록. 어느 예의 없는 가문인지 궁금하군.”

“그것이…… 제가 보기엔 크렘벨가의 문장 같습니다.”

“뭐?”

엘렌은 곧장 마차의 창문을 열어 앞을 보았다.

바깥을 내다보자, 마침 길리언이 마차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맙소사.”

상대하기 싫어서 없는 척을 했더니, 이제는 뒤로 돌아 현장을 잡다니.

엘렌이 이를 바득 갈았다.

“시간이 어지간히도 남아도는가 보군.”

촤악, 엘렌은 마차의 창을 닫은 뒤 커튼까지 완벽하게 쳤다.

하지만 길리언은 이미 엘렌을 발견해 버린 듯, 마차로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똑똑.

“엘렌. 이야기 좀 하지.”

소름 끼치는 목소리였다.

굳이 상대할 마음이 없었던 엘렌은 조용히 있었다.

그러자 바깥에서 길리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없는 척하는 건 분명 네 마음이지만, 이곳에 계속 있는 것도 내 마음이지.”

아, 저 인간은 갑자기 왜…….

엘렌이 관자놀이를 짚었다.

여기서 마차를 돌려서 들어가 버릴까.

‘아니야. 아발란쉬 후작은 빠르게 만날수록 좋아.’

이 자식은 정말로 비키지 않을 생각인가.

엘렌은 잠시 고민하다, 한숨을 쉬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이게 무슨 짓인가요. 무례하시군요.”

“없다는 거짓말로 손님을 박대한 너도 꽤나 무례하지.”

“애초에 사전에 연락도 없이 찾아온 것이 잘못이란 생각은 하지 않나요?”

“불쾌했다면 사과하지. 하지만 그게 네가 없다는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 것 같군.”

“……좋아요. 나도 사과하죠. 그래서 왜 이곳을 찾아온 거죠?”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는 게 낫지 않겠나? 이렇게 길바닥에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닐 텐데.”

아주 대놓고 내 저택으로 들어오려고 해?

엘렌은 치솟는 짜증을 애써 갈무리하며 답했다.

“……그러죠.”

* * *

엘렌은 뒤를 따라오는 손님과의 간격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성큼성큼 걸었다.

포치를 지나자마자 그녀는 뒤로 돌아 길리언을 쏘아보며 말했다.

“응접실까지 굳이 안내하고 싶지 않네요. 실내로 들어왔으니 여기서 말하죠.”

“……그러든지.”

길리언이 순순히 답했다. 그러자 그 태도가 또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엘렌은 날카롭게 물었다.

“우리가 다시 얼굴을 마주 봐야 할 이유가 있나요?”

“이유? 이유라.”

길리언이 턱 끝을 매만지다 말했다.

“처남이 다쳤다는 소식을 들어서. 유감이야. 쾌차를 빌지.”

“하, 처남?”

“그래도 한때 가족이었으니.”

“한때 자신의 부인이었던 사람에게 차라리 죽길 바랐어야 했다고 말한 사람이 할 말인가 싶네요.”

“……그건.”

일순 할 말을 잃은 길리언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한숨을 쉬더니 손으로 이마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최근에 일이 많았어. 그것들이 나를 거기까지 몰고 갔다고. 심지어 그 소동들은 네가 기획한 거지 않나.”

“그래서요?”

“적어도 너는 내게 그리 말하면 안 된다는 소리다.”

“애초에 제가 그렇게까지 해야 했던 이유가 누구에게 있는지 또한 생각을 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엘렌이 어림없는 소리를 한다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래. 생각했다.”

엘렌의 눈이 크게 뜨였다.

“생각했고, 네가 바라는 게 달라졌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 원하는 바도 달라질 수 있지.”

그는 담백하게 말하며 자신의 손을 한 차례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니 기존의 계약은 그다지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현재의 상황에 맞도록 바꿔 주면 그만이지. 새로운 계약을 할 때가 되었을 뿐인 거다.”

그는 조용히, 하지만 끓는 듯 강렬한 눈빛으로 엘렌을 바라보았다.

“굳이 제가 그래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죠?”

“그렇게 상호 이득을 취하면 되는 것 아닌가. 더는 이득을 취할 수 없어서 관계를 끝냈으니, 그 이득을 다시 논해 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나.”

“무엇이 되었든 공과는 논할 일이 없다는 말을,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인정하시렵니까?”

그러자 길리언이 한숨을 쉬었다.

“……좋아.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바라서 그리 행동한 건지, 그 이유라도 제대로 듣지. 이혼을 바라서 이혼한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말 말고, 이혼을 원한 진짜 이유 말이야.”

“그런 건 이미 수없이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요.”

“네가?”

“듣지 않고 보지 않은 것은 내가 아니라 공이었죠. 하다못해 하녀 하나를 두더라도 말이에요.”

“그딴 것에 간섭을 한 기억은 없는데.”

“……하.”

엘렌은 지끈 두통이 몰려오는 듯한 느낌에 관자놀이를 눌렀다.

내가 여기서 지나간 이야기들을 풀어놓아야 하는 이유가 뭐지?

대체 왜 내가 그때의 감정들을 다시 꺼내 놓아야 하는 거야.

그런데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길리언이 말했다.

“피할 생각은 이제 슬슬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나? 내가 해야 하는 일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너도 그간 보아 왔으니 알 텐데.”

엘렌은 그 말에 한숨을 쉬었다. 숨이 새어 나가면서 비로소 팽팽히 긴장되어 있던 안면 근육이 이완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보기 싫은 것을 치우려면 결국 손을 대야 하는 법이지.

엘렌이 입술을 떼었다.

“……하녀가 제게 차를 엎은 일이 있었죠.

그녀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길리언이 바로 반문했다.

“차?”

“그래요. 이제 막 우려서 내온 홍차.”

“엎었다고? 다쳤나? 화상은?”

“그걸 이제야 묻는군요.”

엘렌은 기가 찬다는 듯 픽 웃고는 말을 이었다.

“날 우습게 본 사용인들의 태도에서 비롯된 일일지, 그저 미숙한 하녀의 실수였는지는 모를 일이죠. 하지만 근본적 원인이 무엇이었든 그것은 분명히 처벌이 필요한 일이었고, 난 그리 지시했어요.”

“그런데 왜…….”

“그러나 당신은 그에 대한 처벌을 논하기는커녕, 나를 하녀들이 보는 앞에서 의견을 묵살당한 안주인으로 만들었죠.”

“…….”

무언가를 물어보려던 길리언의 입술이 닫혔다.

한참을 조용히 있던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건 네 의견을 묵살한 게 아니라 내가 너무 바빠서 생긴 실수였다. 나도 제임스에게 재차 보고를 받고서야 알았지.”

그는 변명을 이어갔다.

“처음엔 나도 너를 잘 몰라서, 네 실수라고, 네가 예민한 것이라고 여겼었다. 가문 내 사용인들의 기강이 그렇게 해이할 줄은 나도 몰랐어. 하지만 네가 그렇다고 말을 했더라면…….”

“말을 했더라면? 당신이 내게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하고 말하는 건가요?”

“…….”

“난 매번 문제를 말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멋대로 지시를 내리고는, 더는 저택에서 큰 소리가 나지 않게 하라고.”

“…….”

“이만 돌아가라고.”

길리언은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공의 귀를 막은 것은 공이에요. 내가 아니라.”

엘렌이 쏘아붙이는 말에 한참을 조용히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확실히 듣는 데 있어서는 내가 태도가 좋지 못했다. 인정하지.”

그는 한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서 네게 저택의 일의 전권을 맡기겠다고 했다. 그런데 거기서부터 차근차근 상의해 나갈 생각이 없었던 것은 너도 마찬가지지 않나?”

“……하.”

엘렌은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이 대화를 이어 나가야 하는 이유는 대체 뭘까.

그녀는 급속히 몰려오기 시작한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그런 태도 자체가 문제라는 거예요, 공. 결국 공께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함께 고쳐 나가기보다, 어떻게든 나보다 우위에 서서 나를 이기려고 할 뿐이니까요.”

엘렌이 이만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이 이상 의미 없는 논쟁을 지속하고 싶지 않아요. 돌아가 주시지요. 엘을 굳이 보고 가실 필요도 없습니다. 가세요.”

그녀가 현관문을 열며 말하자, 노골적으로 자신을 피하는 태도에 그만 울컥하고 만 길리언이 외쳤다.

“아무리 그래도 네 전남편이야! 어떻게 네가 내게……!”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황자님의 전언을 들고 왔습니다만…… 별로 좋은 때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문 바깥에는 2황자 크레센트의 기사, 클라우디스 바로크가 서 있었다.

“……바로크 경?”

엘렌도 당황해 살짝 얼빠진 얼굴로 그를 부르자, 그는 조금 멋쩍은 얼굴로 뒤통수를 한 번 쓸고는 말했다.

“영식의 사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크레센트 전하께서는 깊은 안타까움을 표하시며, 몸에 좋다는 약재들을 함께 보내셨습니다.”

“아.”

엘렌은 낮게 감탄사를 한 번 뱉고는 길리언을 한 번 흘끗 쳐다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에 실금이 가 있었다.

추태를 보인 것이 어지간히 불편한 모양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들었던 이야기는 굳이 퍼뜨릴 생각도, 딱히 퍼뜨릴 만한 곳도 없습니다. 이런 가십 중에 정직하게 사실만 남아 돌아다니는 것은 본 적이 없는지라.”

클라우디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이 들고 있던 상자 여러 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여기 전하께서 보내신 약재들입니다. 사용에 관해 알려 드려야 할 주의 사항들이 있습니다만…….”

그는 길리언을 슬쩍 곁눈질하고는 말했다.

“공과의 용무는 다 끝나셨는지요, 영애?”

“네. 경께서 정말 좋은 때에 오셨습니다. 들어가시지요.”

엘렌은 얼른 그의 선물을 집어 들며 말했다.

그녀는 짐을 옮길 것을 지시 중이던 집사에게 말했다.

“손님께서 가시니 배웅해 드리게.”

“예, 아가씨.”

“바로크 경.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들어오시지요.”

“…….”

엘렌이 집사에게 명령만 남기고는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그 자리에 혼자 남은 길리언은 불편함을 숨기지 않은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크렘벨 공.”

클라우디스의 여유로운 인사에 길리언은 으득, 잇새를 갈며 말했다.

“……경 또한.”

하지만 그는 그런 길리언의 위협쯤이야 우습다는 듯, 가볍게 엘렌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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