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남성부의 경기까지 끝나고 해당 종목의 우승자가 가려졌다.
불안한 기수는 말에게도 악영향을 끼친다.
길리언의 차례.
달리던 그는 순간적으로 시야에 엘렌을 넣고 말았고, 그렇게 그녀를 인식하자마자 제 페이스를 잃었다.
길리언은 조급하게 속력을 내었고, 그것은 말과의 호흡을 어그러뜨려 끝에 가서는 흐름이 꼬이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장애물 비월 남성부 우승의 영예는 코엔하임가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
스파니엘은 모리스가 우승을 했다며 드물게 환한 낯으로 기뻐했다.
그 옆에는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재잘대며 떠들고 있는 엘시어도 있었다.
“페리윙클 그 자식은 겨우 조별 예선에서 탈락했다니까요!”
“호호, 쌤통이지 뭐니. 정말 잘했어, 엘!”
첫 출전치고는 꽤나 높은 순위를 기록한 엘시어는 페리윙클의 몸치력을 한껏 비웃어 댔다.
스파니엘의 맞장구에 엘시어는 더욱 신나서 떠들었다.
“아카데미에서 마주치면 반드시 예선 탈락자라 불러 줄 겁니다!”
“그래, 그래.”
끝도 없이 이어지는 열일곱의 수다에, 엘렌은 적당히 대꾸해 주고는 주변을 살폈다.
점심이 담긴 바스켓들이 오는 것이 보였다.
“벌써 식사 때가 되었나 보구나. 먼저 들고 있으렴. 나는 잠시 나갔다 올 테니.”
“누님, 어디 가십니까?”
“잠깐 가슴 좀 가라앉힐 겸 짧게 산책 한 바퀴만 하고 오려고.”
“예, 누님. 서둘러 다녀오세요.”
“얘, 엘! 거기 담긴 건 엘렌 거야!”
시끌벅적한 천막을 뒤로한 엘렌은 그녀의 말을 매어 둔 곳으로 향했다.
이제 곧 마장 마술 경기가 시작된다.
그 말인즉 준비해 놓은 일이 벌어지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행히 그녀의 것처럼 붉은빛이 강렬한 승마복은 없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에게 매어 둔 마구에 달린 장신구를 확인했다.
반사광이 아주 눈부셨다.
‘괜찮겠지.’
아직 명중률이 그다지 높지 않은 머스킷이었다.
멀리서의 조준 사격이 위험하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자신은 넓은 회장에 혼자 있을 것이고, 자신을 타인과 헷갈려 엉뚱한 곳을 노릴 일 또한 없을 것이다.
엘렌은 착잡한 손길로 몇 년을 함께 지내 온 그녀의 말을 쓰다듬었다.
‘……미안하구나. 부디 너도, 나도 별 탈 없이 끝나길.’
그녀는 한 차례 제 말의 목을 꽉 껴안고는, 마음을 다잡은 뒤 다시 그녀의 천막으로 돌아갔다.
“누닝, 누닝고 어어 으세오.”
입 안 가득 훈제 연어 샌드위치를 물고 있던 엘시어가 웅얼거렸다.
엘렌이 가느스름한 눈초리로 철없는 동생을 흘겼다.
옆에서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자, 언제 온 것인지 케이든이 그들의 천막에서 점심을 들고 있었다.
그가 샌드위치를 하나 집어 엘렌에게 내밀며 말했다.
“엘이 모리스를 많이 좋아하더군요.”
“그만큼 뛰어나신 분들이니 동경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엘렌이 받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나저나 엘이라니요. 퍽 친해지셨나 봅니다.”
“아는 사람과 워낙에 닮아서. 친근감을 불러일으키는 외모입니다, 영랑이.”
“저희가 정말 많이 닮긴 했나 보군요.”
엘렌이 픽 웃으며 말하자 케이든은 아무렴 당연한 소리를 한다며 대꾸했다.
그녀가 오늘 일어날 사건에 대한 예고를 던진 것은, 그런 아무렇지도 않은 대화가 이루어지던 사이였다.
“곧입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너무 당황하지 마시길.”
“무엇이…… 아.”
일전에 계획이 있다고 예고했던, 그 사건.
케이든이 낮은 감탄사와 함께 말을 줄였다.
밖에서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마장 마술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 * *
뿌우―
뿔피리 소리와 함께 진행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제, 여성부 마장 마술 경기가…….”
멀찍이서 흩어지는 진행자의 안내에 사람들은 발걸음을 옮겼다.
경기를 위해 쳐진 펜스, 그 하얀 울타리 주변으로 참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길리언은 쓰린 속을 애써 다스리며 말을 이끌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냉정을 잃는 것은 곤란해. 그깟 여자에게 휘둘리지 마라, 길리언…….’
스스로에게 되뇌며 제 말의 콧잔등을 쓸어내린 그는, 고삐를 단단히 쥐고 제 말의 마구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데, 그 순간 모여든 사람들 사이로 한 사람이 길리언의 시야에 들어왔다.
무수한 군중들 사이에서도 한눈에 들어온 여인.
길리언은 방금 한 다짐이 무색하게도 곧바로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감히 이혼 따위를 입에 담고, 지금은 황태자의 옆에서 즐겁다는 듯 웃고 있는 저 여자.
그의 잇새에 힘이 들어갔다.
‘아주 작정을 했던데. 정말 네가 나와 적대하겠다고?’
황태자는 언젠가 침몰할 배다.
저 여자는 진실로 그것을 몰라 그리하고 있는 걸까.
잡다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온통 헝클어뜨렸다.
지금 그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그로서도 무엇이라 정의 내리기 어려운 무언가였다.
저 여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자신이어야 한다.
저 여인은 자신의 옆을 지키는 사람이어야 하고, 저 멍청한 놈에게 더는 자신의 것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어렴풋이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호명되고, 몇 마리의 말들이 들어오고 나가길 반복했다.
몇 여인이 지나갔지만 그것이 누구인지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눈에 다시 초점이 돌아온 것은, 익숙한 얼굴이 경기장에 섰을 때.
진행자가 엘렌의 이름을 호명하자, 그녀가 제 붉은 말과 함께 입장했다.
말은 아주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태양빛 아래 밝게 빛나며 웃고 있는 여인.
그 모습에 길리언은 속이 뒤틀리는 듯 아파 오기 시작했다.
자신은 이렇게나 속이 타들어 갈 듯 뜨거운데.
입가에 걸린 미소도, 자신감에 찬 얼굴도, 모두 낯설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됐어. 동요하지 마라. 어차피 저 여자는 다시는 내 허락 없이 저택을 벗어날 수 없을 테니…….’
길리언은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자연스러운 정지와 함께 인사를 남긴 엘렌이 곧 천천히 말을 몰기 시작했다.
한 발, 한 발 아주 경쾌한 걸음으로 걸어간다.
자못 익살맞아 보일 수도 있을 정도로 큼지막하게 구르며 통통 걸어가는 말과 옅은 미소로 고삐를 잡은 그녀.
그리고 작은 손짓과 함께 스텝이 바뀌었다.
말의 스텝이 조금 빨라졌고, 말은 그녀의 요구에 맞춰 순순히 방향을 바꾸었다.
따닥, 따닥, 따닥, 따닥.
경쾌히 땅을 박차는 소리가 제법 신난다.
엘렌은 자신의 말을 잘 듣는 말이 참 어여쁜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장이 뭉개지는 것 같았다.
또다시 말의 스텝이 빨라졌다.
달린다고도, 걷는다고도 표현하기 애매한 속도까지 올라갔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소리가 더욱 경쾌해졌다.
사람들은 그녀와 그녀의 붉은 말이 보이는 모습에 집중하고 있었으며, 엘렌 또한 즐거운지 눈에서 빛을 내었다.
길리언은 그런 엘렌의 모습에 눈이 박혀 버린 듯 쳐다보면서도, 동시에 부글부글 끓는 속내에 어찌할 줄 모르고 그저 주먹만을 꾹 말아 쥐었다.
엘렌은 이제 좁은 펜스를 돌기 위해 말이 커브를 틀 수 있도록 달리게 하던 중이었다.
그때였다.
탕―!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천천히 달리던 말이 서서히 고꾸라졌다.
엘렌의 몸이 기울었다.
놀란 듯 커지는 눈, 기우뚱 기우는 어깨, 쓸려 내려가는 엉덩이와 떨어지는 등.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이 마치 몇십 초는 되는 듯 길었다.
“꺄아아아악!”
객석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히히히히힝!”
말은 갑작스레 주어진 예상외의 자극들에 놀라 울었고,
“다들 자신의 옆자리를 확인해! 맞은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라고!”
사람들 또한 의문의 총성에 웅성대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운 장내.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 길리언은 무엇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조용히 정면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떨어지며 꺾인 왼쪽 다리를 부여잡고, 몸을 잔뜩 구부린 채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여인.
그 밑으로는 검붉은 액체가…….
‘설마.’
길리언은 순식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총성.
피.
그것이 시사하는 가능성.
“엘렌……!”
그가 뛰어 들어가려던 순간이었다.
“영애!”
“누님!”
그의 시야 한끝에서 누군가가 먼저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황태자 케이든 이스타지오와 그녀의 동생인 엘시어 크라이언트였다.
“영애, 괜찮습니까? 영애!”
황태자가 엘렌을 안아 들며 외쳤다.
케이든이 겁도 없이 마장의 중앙에 들이닥치자, 코엔하임 경 모리스가 기겁해서는 외쳤다.
“전하! 위험합니다!”
모리스와 테리어드를 비롯하여, 케이든의 호위 인력들이 모두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 나왔다.
안전 요원들을 비롯해 우르르 들어간 그들은 흥분한 말을 진정시키며 엘렌을 살폈고, 몇몇은 부상자를 안전하게 데려가기 위해 들것을 날라 왔으며, 나머지는 황태자가 노출되지 않도록 그들의 주변을 둘러쌌다.
“당장 주변을 수색해! 연기가 오르는 곳을 찾아라! 제아무리 멀어 봤자 몇백 미터다!”
케이든이 분기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쩌렁하게 울린 그의 명령에, 바리케이드처럼 그를 에워싸고 있던 이들 중 몇몇이 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주변과 말을 살피던 이들이 황태자에게 다가가 무엇인가를 전달했다.
보고를 들은 황태자의 얼굴이 무섭게 굳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 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엘렌은 상태가 어떻다는 거지? 괜찮다는 건가? 들리질 않아.’
결국 답답해진 길리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었다.
다가오는 기척에 황태자의 시선이 뒤를 향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와 시선을 마주한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길.”
“전하, 안사람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잠시…….”
하지만 황태자는 그의 말에 답하는 대신, 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들 들으시오!”
황태자의 목소리가 회장에 울렸다. 소란스럽던 사람들이 일순 고요해졌다.
“오늘의 행사는 부황 폐하의 명을 받고 나 케이든 이스타지오가 관리 감독한, 황실과 귀족들 간의 친목을 위해 주최한 자리요. 하나 그런 황실의 의도를 무시하고 얼굴에 먹칠을 하려 한 이가 있다니, 나는 아주 깊은 유감을 표하는 바요.”
황태자의 눈에서 불길이 일렁였다.
“지금 총을 맞은 것은 이 말이라고 하는군. 하나, 아무리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고 해도 몇백 미터 밖에서 움직이는 표적을 맞히는 사수라니. 아주 무섭기 그지없는 일이오.”
케이든의 분기 어린 얼굴이 장내를 훑었다.
“누가 되었든 철저히 조사를 해 밝힐 것이니, 다들…… 기대해도 좋소.”
그렇게 선전 포고를 남긴 케이든은 엘렌을 들것에 눕힌 뒤 의무반에게 맡겼다.
“서둘러서 가게.”
“예, 전하.”
엘렌이 들것에 실려 나가는 것을 본 길리언이 다급히 외쳤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