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1조의 영애들은 멀지 않은 곳에서 말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엘렌이 도착하자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떠들기 시작했다.
“어머, 영애. 어쩜 그런 생각을!”
“크렘벨 공께서 벌떡 일어나시는 것 보셨나요?”
그 사이로 마이어스 영애가 한마디 거들었다.
“저러다 무언가 해코지라도 할까 걱정이 되네요.”
진심이라는 듯 염려 어린 목소리로 말한 그녀는, 이윽고 엘렌에게 친절한 미소와 함께 물어 왔다.
“크라이언트 영애, 영애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제게 시간을 나누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물론이지요.”
엘렌이 굳이 피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그녀 또한 이 영애들이 제게 호의적인 이유가 궁금하던 차였다.
떨어진 승낙에 마이어스 영애는 엘렌의 천막으로 가자는 말과 함께 그녀를 이끌었다.
곁에 있던 다른 이들은 제가 낄 자리는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인사를 남기고는 각자의 천막으로 흩어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호의 속에서 엘렌은 마이어스 영애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의 붉은 갈기가 참 예뻐요, 사랑을 많이 받는 아이인가 봐요. 그러시는 영애의 말도 털빛이 참 깨끗한걸요…….
그런 말들이 오가던 중이었다.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사납게 잡아채는 손이 있었다.
“윽!”
덜컥, 갑자기 뒤로 당겨지는 충격에 엘렌의 몸이 휘청했다.
“어머.”
마이어스 영애가 낮게 감탄사를 흘렸다.
대충 ‘세상에, 정말로?’ 정도의 의미였다.
“……전하께는 내가 따로 말씀드릴 테니, 이만 집으로 돌아가지. 많이…… 피곤했나 보군.”
길리언은 최대한 제 분노를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마이어스 영애. 미안하지만 이 사람은 이만 돌아가 보아야 할 듯하니, 용건은 다음으로 하지.”
그가 애써 태연한 낯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엘렌의 어깨를 쥐고 있는 손에 잔뜩 들어가 있는 힘을 풀지는 않았다.
길리언이 엘렌을 끌고 자리를 뜨려던 때였다.
“세상에, 크라이언트 영애의 안색을 좀 보세요!”
그녀의 외침에 길리언이 거슬린다는 듯 말꼬리를 물었다.
“……크라이언트?”
“이렇게 안색이 창백할 수가. 당장 의무실로 가야 해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로군. 그리고 한 가지 정정하지. 이 사람은 나와 이미 결혼한, 크렘벨 부인이다. 호칭에 주의하도록.”
오만한 자 특유의 턱짓으로 축객령을 내린 그는, 이제 한낱 백작가의 영애 따위는 상대할 일 없다는 듯 다시 등을 돌렸다.
“……공께서 수고하셔야 할 정도는 아닙니다. 제 안색이 좋지 않다면, 그것은 아마 어깨에서 오는 통증 때문일 것 같군요.”
“어머, 그랬군요.”
그러나 엘렌이 꺼낸 말에 그의 행동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마이어스 영애가 엘렌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길리언을 쳐다보았다.
그 손, 안 놓을 거야?
무언의 질문이 담긴 시선이 교차했다.
길리언이 빠득, 이를 갈고는 엘렌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의 손아귀에서 자유로워진 엘렌이 제 어깨를 탁탁 털며 말했다.
“마이어스 영애는 나와 티타임을 가지기로 했어요. 공께서 굳이 수고하실 필요 없답니다.”
길리언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커다란 한숨과 함께 한 번 마른세수를 했다.
“아니, 부인의 일에 신경 쓰는 것은 남편 된 자의 도리지. 잔말 말고 들어가서 쉬도록.”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 도리, 애초에 받아 본 적이 없어서요.”
“……후우.”
길리언의 분노가 한계치에 달한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꾸역꾸역 화를 참아 내고 있었다.
당연했다.
이곳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처음에 마이어스 영애가 소리를 질렀을 때부터 그들이 있는 방향을 흘끔대던 귀족들이, 이제는 대놓고 모여들어 그들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소란이 일면 이 행사를 주관하고 있는 황태자의 귀에도 이야기가 들어가기 마련이다.
그런 이유로 보고를 받은 케이든은 내용을 듣자마자 무시무시한 속도로 현장을 향했다.
그는 달려오다시피 하던 속도 그대로 걸어와 길리언의 어깨를 잡아챘다.
“길!”
휘청, 길리언이 뒤로 당겨졌다.
눈높이가 비슷한 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에서 마주쳤다.
“전하?”
“……자네가 이러면 내가 뭐가 되나. 적당히 하지.”
케이든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 서늘한 말에 길리언이 덩달아 표정을 굳혔다.
그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엎친 데 덮친 격처럼 찾아온 이 상황에 길리언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이 행사장에서 같은 문제로 다시 자네와 얼굴 붉힐 일이 없길 바라겠어.”
“예. 전하.”
케이든이 서슬 퍼런 목소리로 남긴 경고에 길리언은 다시금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손 안쪽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그제야 제가 주먹을 쥐고 있었음을 깨달은 길리언은 뒤늦게나마 손에 힘을 풀었다.
‘아직 들켜서는 안 된다.’
아직은 일렀다.
어디까지나 자신은 황태자의 충실한 심복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리 다짐하면서도, 끓는 듯한 그의 눈은 여전히 엘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미안합니다. 내가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케이든이 두통이 이는 듯 제 머리를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가능하면 붙어 있자고 당부했던 게 나였는데…….”
“아닙니다. 경기를 굳이 나가려 고집한 건 저였고, 게다가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야 버티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요.”
엘렌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케이든은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었다.
저는 정말 가슴이 철렁했는데, 막상 본인은 별거 아니라는 듯 저렇게 가벼운 태도라니.
“그렇다 치고. 팔은 괜찮습니까?”
케이든이 언짢은 기색으로 묻자, 엘렌은 손목까지 빙빙 돌려가며 제 상태를 확인했다.
“당분간은 조금 뻐근하겠군요.”
“조금 더 안전에 신경을 쓰는 게 어떻겠습니까.”
“최대한 전하께 폐를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걱정 마시지요.”
엘렌은 일전에 마차로 데리러 왔을 때도 그가 조금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는 것을 떠올렸다.
“전하께서는 크렘벨 공을 막아 주시는 것으로 거래의 대가는 충분히 치르고 계십니다. 그 이상은 폐를 끼치지 않도록 할 생각이니, 정말로 걱정 마시지요.”
그녀의 단호한 말에 케이든은 무언가 한마디를 더 하고 싶은지 입술을 열었다가, 곧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나저나 길리언이 많이 압박을 받기는 한 모양입니다. 이렇게 시선이 모이는 바깥에서, 그것도 영애들끼리만 있는 때를 노리다니.”
“그러게요. 보기 좋게도.”
케이든이 자신이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이냐는 얼굴로 물었다.
“……뭐라고 했습니까?”
“보기 좋다고 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예정된 덫에 걸려들어서 버둥버둥…….”
그런 엘렌의 말에, 케이든은 외려 질린 듯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지요. 마이어스 영애가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
그녀가 마이어스 영애가 기다리고 있는 저쪽 한편을 곁눈질하자, 케이든도 제게 필사적으로 눈치를 보내고 있는 이들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아, 그래야지요. 내가 금방 갈 테니, 그전까지는 반드시 체셔 경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분부대로 하지요.”
엘렌이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마이어스 영애와 함께 체셔가의 천막으로 돌아온 그녀는, 간단히 자리를 만들어 권한 뒤 제 미안함을 전했다.
“그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해요, 마이어스 영애.”
엘렌은 마이어스 영애의 가지런한 손가락 위로 제 손을 얹으며 말했다.
“하지만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웠어요.”
그러자 마이어스 영애는 그 손 위로 남은 제 한 손을 겹치더니 도리어 웃으며 물었다.
“아니에요. 제가 곁에서 도움이 되었을까요?”
“물론이죠.”
엘렌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적절히 소리치고, 적절히 화를 돋우고.
무력과 권력을 갖지 못한 이들이 할 수 있는 대처란 그런 것이었고, 조금 전의 마이어스 영애는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주었다.
“그렇죠? 제가 제법 눈치가 괜찮답니다.”
충분히 겁먹을 만한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정말로 재미있다는 듯 재잘대었다.
“맞아요. 영애 덕분에 이렇게 이곳에 앉아 있네요. 고마워요.”
엘렌이 다시금 인사를 건네자 마이어스 영애는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크라이언트 영애. 제가 왜 이렇게 호의적인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그녀가 그 밝은 낯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주 의뭉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전 지금 제 동년배들 중 가문도, 눈치도, 교양도 제가 제일이라고 생각해요.”
자칫 자만심에 젖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리 말하는 마이어스 영애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전 크라이언트가와의 혼담을 원한답니다.”
“혼담? 엘시어와 말인가요?”
“네. 절 곁에 두세요. 분명 도움이 되실 거랍니다.”
“……그대는 제 동생 엘시어를 본 적이 있나요?”
“아니요. 오늘 처음 뵙게 되겠군요.”
“그런데 왜?”
“귀족들 간의 혼인이 어디 그것 하나만으로 이루어지던가요.”
마이어스 영애의 눈웃음 사이로 씁쓸한 빛이 비쳐 들었다.
“들은 것도 있고, 본 것도 있고…… 무엇보다 영애와 같은 이를 길러 낸 가문인 것을요. 어머니도 저도 크라이언트를 최고의 혼처로 치고 있답니다.”
“영애 정도라면 현재 독신이신 아발란쉬 후작이나 포트 후작과의 혼담도 고려해 볼 만한데요.”
“아니요.”
그녀는 단호히 말했다.
“적어도 제가 후작가 이상의 가문과 결혼하는 일은 없을 거랍니다.”
이건 어머니의 뜻이기도 하지요.
그리 말하는 그녀의 눈에는 무언가 애잔한 슬픔이 스쳤다.
마이어스가는 중립파의 핵심 세력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한 곳.
가주인 마이어스 백작은 중립파의 거두인 아발란쉬 후작과 절친한 사이로,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보조하며 중립파의 영역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니 마이어스의 여식인 그녀는 중립파 내에서, 같은 계파의 결속을 다지는 전형적인 귀족들의 혼사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황제파인 우리에게 혼담을 넣다니…… 이것은 앞으로 황제파로 전향하겠다는 신호일까?’
엘렌은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 닥친 것에 대해 고민했다.
이것은 내가 바꾸어 낸 미래일까.
“말씀은 알겠습니다. 저로서는 환영할 만한 이야기지만, 아무래도 동생과 아버지의 의견도 필요한 일이니.”
“이해해요.”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군요. 그럼 일단 우리는, 친구부터 할까요?”
두 여인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