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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31화 (31/128)

<31화>

길리언의 외침에 빠른 걸음으로 경기장을 벗어나던 케이든이 뒤를 돌아보았다.

“제가 가문의 의사들에게 보이겠습니다. 밖은 무슨 위험이 있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아니야. 아니지, 길.”

케이든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이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영애는 당분간 안전을 위해 내가 데리고 있겠어. 길, 자네도 조금만 더 냉정히 생각하도록 해. 누가 교사한 것인지 아직 밝혀진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그러니 더더욱……!”

“길!”

케이든이 외쳤다.

“지금, ‘크렘벨 공작 부인’을 암살해서 얻을 것이 있는 자는 누구라고 생각하나?”

그의 일갈에 길리언은 그제야 현재의 상황을 제대로 직시했다.

크렘벨 공작도 아니고 공작 부인이다.

그녀에게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묶여 있는 타 귀족들은 없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그렇다고 그녀가 암살당할 정도의 원한 관계라도 만들고 다녔느냐?

그 또한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상황에선 오히려 적은 외부가 아니라…….

케이든의 싸늘한 눈빛이 길리언에게 가 꽂혔다.

“나는 지금 누구보다 중립을 지켜야 하는 위치에 있기에, 그리고 자네가 나의 친우이기에…… 그렇기에 입을 열지 않을 뿐이야. 조사는 엄중히, 그리고 철저히 이뤄질 거다. 내 이름을 걸고 장담하지. 물론 영애의 안전도 말이야.”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황태자가 의혹을 입에 담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저희들의 추측을 뱉어 내기 시작했다.

“이거, 최근에 돌던 이혼설이 문제였던 것은 아닌가? 이혼하면 크렘벨은 크라이언트라는 든든한 우군을 잃어버리지만, 이혼 전에 부인만 의식 불명이 되면…….”

“쉿. 자네, 말을 삼가게.”

“그렇잖나. 숨만 붙어 있으면야…….”

“크라이언트와 크렘벨 간에 마찰이 생겼을 때부터 불안하더라니.”

“크렘벨의 면이 말이 아니게 됐군그래.”

“그건 그렇지. 결과야 어찌 되든 크렘벨은 당분간 고개 들고 다니기 어렵겠어.”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머, 세상에. 정말로 크렘벨 공께서요?”

“전부터 스토커처럼 쫓아다니시며 어떻게든 크라이언트 영애를 해코지하려 하셨다지 않아요.”

“저도 아까 봤어요. 너무 무서운 나머지 저는 눈을 돌리고 말았답니다.”

“이건 누가 봐도 크렘벨 공께서…….”

사방에서 떠들어 대는 소리에, 길리언은 꽉 주먹을 움켜쥐고는 소란한 회장을 빠져나왔다.

* * *

길리언은 분노로 세차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킬 생각도 않고 걸었다.

암살 교사라니!

그의 걸음이 고동 소리에 맞춰 점점 빨라졌다.

자신은 범인이 아니었다.

맹세코 그는 제 아내를 죽일 생각 따위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는 그녀를 황태자에게서 돌려받을 생각이었지, 죽여 없애 버릴 생각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혼설에 대처하기 위해 의식 불명으로 만들어 놓을 동기는 충분하지 않느냐고?

‘확실히 좋은 방법이지. 하지만 내가 왜 굳이 그래야 하느냔 말이야.’

애초에 오늘 저택으로 끌려 들어갈 여자였는데.

그런 방법은 아직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저였건만, 사람들은 스스로 가장 효율적인 길을 만들어 자신을 끼워 맞추고 있었다.

‘난 지시한 바가 없으니 이 암살은 다른 사람의 기획일 거다.’

하지만 엘렌을 건드려 이득을 볼 이는 없었다.

귀족파가 나서는 것도 어느 대귀족 정도라야지, 크렘벨 공작 부인에게 그런 짓을 해 봤자 아무런 득 될 게 없었다.

그렇다면 생각을 전환해서, 엘렌의 제거가 목적이 아닌, 오늘 지금의 이 결과 자체가 원래의 목적이었다고 쳐 보자.

크렘벨가와 크라이언트가의 골이 깊어져 그 두 가문이 파탄에 이르도록.

이야기를 이렇게 상정하면 이득을 볼만한 곳들이 생긴다.

가장 먼저 귀족파.

적어도 크렘벨 혹은 크라이언트 둘 중 하나는 황제파에서 뛰쳐나오게 될 가능성이 크고, 그러면 그들이 향할 곳은 귀족파일 것이 뻔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 트라이아 공작 부인이 엘렌에게 눈독을 들였었지.’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그것만으로 황실이 주최한 대회에서 일을 친다니. 지나치게 무모한 일이었다.

방금도 보라.

황태자는 황제를 들먹거리며 엄중히 조사하겠노라 선전 포고를 했다.

자신이 그런 목적으로 일을 벌이려 생각했다면, 다른 날과 다른 방식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는 생각이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느끼고는 거칠게 모자를 벗어 던졌다.

“빌어먹을!”

행사장에서 벌어진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크렘벨가의 수행원들은, 제 주인의 미친 듯한 행동에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 * *

그대로 응급 의료 막사까지 엘렌과 함께 온 케이든은, 의원 외에는 필요 없다며 모두 자리를 비우라 명령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다리는 괜찮습니까?”

“……그럼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얼핏 들으면 멀쩡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낯빛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이마에서는 연신 식은땀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러면서 걱정은 하지 말란다.

한 차례 헛웃음을 지은 케이든이 잇새를 꽉 물며 말했다.

“걱정을, 시키지 않으려면.”

무릎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걱정이 될 만한 일을 벌이질 말아야지요. 영애는 방금도 그러더니, 지금 또……!”

그는 정말로 화가 나서 소리쳤다.

장내를 울리던 총성, 말에서 떨어지는 엘렌.

그 순간 그는 사고가 정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했다.

두려웠다.

이렇게 또 한 사람을 잃게 되는 것인가 덜컥 겁이 났다.

어머니도, 친우의 배반도, 종내에는 저 여인까지.

두려움에 몸이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갔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자신은 마장의 한복판에서 그녀를 안고 있었다.

다행히 그녀에게서 총상으로 보이는 것은 찾지 못했다.

타박상과 다소의 부기가 있었을 뿐이다.

그것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머리를 뜨겁게 달구던 무언가가 가라앉았다.

그렇게 안도가 찾아오자, 곧 치밀어 오르는 것은 분노였다.

“영애. 제발…… 난 더는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아.”

“전하?”

케이든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난 왠지 그대가 내 기분을 이해해 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어. 그도 그럴 게, 영애의 말들은 모두 그 아픔을 직접 겪어 보고 난 경험담 같았거든.”

엘렌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그래서일까, 내가 생각해도 우습지만, 그대의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나는 얼핏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었지.”

케이든이 내뱉는 음절 하나하나에 그의 감정이 꾹꾹 눌러 담겼다.

“저 여자도 배신을 당했었겠구나. 그것은 높은 확률로 길리언 크렘벨이었겠구나. 저 여자는 나보다 더 먼저, 더 어릴 때 이런 일을 겪었을 것이고, 그때 정말…… 힘들었겠구나.”

그가 손을 꾹 말아 쥐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에게만은 상처를 주지 않는 사이가 될 수 있겠구나.”

“…….”

“그런데 내가 어리석었던 거지. 그대는 내 심정 따위, 전혀, 단 하나도 공감하고 있지 않은데. 그것을 듣는 내가, 봐야 하는 내가! 어떤 심정일지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는데!”

그는 제 속에 휘몰아쳤던 것들을 모두 쏟아 내기라도 할 것처럼 외쳤다.

엘렌은 지금 회귀 후 가장 큰 당혹과 맞닥뜨렸다.

황태자는 제대로 짚어 내었다.

닥쳐 온 배신, 그에 대한 연민, 그리고 동질감.

그것들은 분명 자신이 이 남자를 볼 때 투영했던 감정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모두 파악해 내고, 그로 인해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의미를 두게 되었을 줄이야.

“그래도 최소한 계약을 나눴으면, 약속은 지킬 줄 알아야지. 서로의 안전은 잘 챙기겠다고 말한 게 바로 얼마 전이야. 그대는 약속을 그리 허투루 하는 사람인가? 응?”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전하께서 수고하실 일을…….”

당혹에 빠진 엘렌은 당시의 제가 했던 생각을 곧이곧대로 뱉다가, 더욱 일그러지는 케이든의 얼굴을 보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아, 수고하실 일.”

케이든의 시선이 느릿하게 그녀에게로 향했다.

“이건 내가 수고하실 일이 아닌가 보군.”

“……죄송합니다.”

팩 째려보는 케이든의 눈길에, 엘렌은 또 제가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대답지 않은 언변이야. 그대도 당황이라는 걸 하기는 하는군?”

그가 빈정대며 말했다.

“축하해. 지금 막 그대는 세상에 둘도 없이 수상한 여자에서 그래도 사람다운 구석은 있는 여자가 되었으니까.”

케이든이 싸늘한 목소리로 마지막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그 계기가 이런 일이라는 게 별로 달갑지는 않지만.”

옷매무새를 다시 정리한 그가 이만 나갈 생각인지 천막의 바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전하!”

엘렌의 외침에 케이든이 발걸음을 멈췄다.

“심려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아니요. 오히려 나야말로 화내서 미안합니다, 영애. 그럼 치료 잘 받으시길.”

그렇게 짤막한 인사만 남긴 케이든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천막을 빠져나갔다.

* * *

케이든은 나오자마자 거칠게 제 머리를 헤집었다.

“젠장!”

처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다.

체셔 경이 위험하다며 말려도 꾸역꾸역 현장까지 같이 오던 여자다.

애초에 이럴 목적으로 자신에게서 총과 화약을 받아 갔던 거다.

출처를 쫓을 증거가 없다면 만들면 된다는 생각으로, 저를 던져 넣을 계획을 짜서.

‘뭐? 저는 이혼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고 나는 조사가 조금 더 수월해져?’

그의 발에 짓밟힌 잔디가 잔뜩 구겨졌다.

“전하!”

잔뜩 굳은 얼굴로 있는 그를 향해 기사 한 명이 달려왔다.

“뭔가?”

“연기가 올라왔던 곳에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을 찾았습니다. 넣다가 흘린 듯한 화약과 쓰고 남은 카트리지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찾은 것은 그것뿐인가?”

“아직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동 흔적을 쫓아 수색하고 있으니 곧 범인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계속 쫓게. 혹시 아나? 포위망이 좁혀지면 살기 위해 총이라도 버린 채 도주할지.”

보나마나 그럴 것이다.

그녀가 이 계획을 짰다면 분명 화약과 총기 둘 모두를 증거품으로서 수집할 수 있도록 판을 만들어 놓았겠지.

케이든은 반드시 증거를 찾아와야 한다며 한 차례 당부하고는 기사를 돌려보냈다.

막 진료를 끝낸 것인지 천막에서 의원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자네!”

“아이고, 전하를 뵙습니다.”

“됐네. 그보다 어떻던가?”

“예?”

“환자 말이야. 어서 대답해 보게.”

“아, 한동안 잘 정양하면 완치될 수준입니다. 일단 저는 부목을 가지러…….”

“한동안이 얼마나인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한 달 정도로 생각하시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달? 한 달씩이나 필요할 정도로 다쳤다는 말인가?”

케이든이 아연해진 낯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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