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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28화 (28/128)

<28화>

길리언이 케이든의 앞에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전하를 뵙습니다.”

“길! 이제 오는군.”

얼핏 보이는 모습으로는 그들을 여전히 좋은 친구 사이라고 부를 만했다.

“올해도 좋은 경기 보여 주길 바라겠어.”

“실망시켜 드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제가 우승을 놓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지, 길리언의 목소리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역시 우승을 연이어 거머쥔 자는 자신감부터 달라. 기대하겠어.”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보다…….”

그는 말하다 말고 엘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아주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엘렌 크렘벨. 이만 있을 곳으로 돌아가지.”

길리언이 엘렌에게 한 발자국 성큼 다가섰다.

이 이상의 일탈은 두고 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전하께 그만 폐를 끼칠 때도 되었어. 어서 돌아가지.”

“하하, 뭘 그런 것을 가지고 폐라고 하나.”

심상찮음을 느낀 케이든이 그의 앞을 슬쩍 막아섰다.

“전하께 수고를 끼쳤으니 폐지요. 아내의 외유는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우리 사이에 무얼. 내가 신경 써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자네와 나 사이잖아.”

그러게 수상한 짓 말고, 있을 때 잘했어야지.

케이든은 그런 말을 속으로만 삼켰다.

“아닙니다. 이만 안사람은 제가 데리고 돌아가겠습니다.”

“사양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닙니다. 전하의 배려는 충분히―”

“내가 이 정도도 못해 줄 사람으로 보이나?”

길리언이 자꾸 딱 잘라 거절하자, 케이든이 자신을 걸고넘어지는 강수를 두었다.

‘이제는 네 사람이 아니라, 내 사람이다. 길리언.’

케이든은 속으로 어떤 우월감을 느끼며, 불쾌하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려 보였다.

실랑이가 길어지니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모이기 시작했다.

‘보는 눈이 너무 많군. 계속 거절만 하는 것은 남들 보기에 좋지 않아…….’

길리언은 애써 치미는 짜증을 삼키고는 말했다.

“……알겠습니다. 전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지요.”

“그래, 잘 생각했어. 내 자랑스러운 친우가 올해에도 우승의 영예를 얻길 바라지.”

케이든이 천연덕스레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툭툭, 저를 건드리는 손길에 길리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것을 본 엘렌이 비소를 지었다.

미처 숨기지 못할 정도로 기분이 나쁜 모양이지.

피식, 작은 웃음이 샌 그 순간이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길리언이 돌아서다 말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오늘을 충분히 즐겨 두도록.”

대수롭잖은 어조의, 언뜻 듣기로는 즐거이 놀다 오라는 의미로도 들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글거리는 그의 눈동자는 엘렌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저것은 그가 제 부인에게 던지는 경고였다.

오늘 이 자리가 너의 마지막 외출이 될 것이라는.

* * *

예고한 시각이 되었다.

황제의 입장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엘렌은 진행자의 안내에 따라 행사장으로 움직였다.

길리언은 자신의 위에 누군가가 있는 것을 용납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 대상에 황족까지 포함될 줄은 몰랐지만.’

그녀는 대체 그런 욕망은 어디서부터 자라난 것인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그랬기에 그는 자신이 요구한 역할을 엘렌이 충실히 수행한 날이면 가끔 작은 친절을 남기고는 했었다.

‘잘했다’라는 한마디와 함께 어깨 위로 내려앉던 커다란 손.

그 사소한 행동 하나에 정말 어찌나 가슴이 떨리던지.

그때는 심장이 터져 나가면 어떡하느냐며 혼자 괜한 걱정을 했더랬다.

이곳은 그런 기억이 깃든 곳이었다.

크렘벨가가 첫 종합 우승을 거머쥐었던 그때를 떠올린 엘렌이 고소를 지었다.

진행자가 여성부 1조를 호명하기 시작했다.

대회는 장애물 비월과 마장 마술의 두 종목으로 나뉘어, 각각 여성부와 남성부 즉 총 네 부문에서의 경기를 치르게 된다.

그중 장애물 비월 여성부의 시합이 먼저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몇 여인들의 이름이 지나가고 그녀의 이름이 불렸다.

“엘렌 크렘벨!”

그 호명 소리에 엘렌은 주먹을 꽉 쥐었다.

멀리에서 길리언의 시선이 느껴졌다.

각자의 말을 끌고 온 여인들이 모두 잘해 보자며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크라이언트 영애.”

한 여인이 대범하게도 엘렌의 처녀 적 성을 사용해 그녀를 불러왔다.

중립파의 실세에 속하는 마이어스 백작가의 영애였다.

“네. 오랜만에 뵙네요, 마이어스 영애.”

엘렌은 반가이 인사를 나누며 경기장의 면면들을 확인했다.

“어쩜. 소문은 들었어요. 크렘벨 공은 확실히 좋은 남편은 아니었지요.”

마이어스 영애가 크렘벨에 관한 이야기를 화두에 올렸다.

그런데 웬걸, 그러자 주변에 있던 다른 영애들이 한 마디씩을 보태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맞아요. 저도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크렘벨 공에 대한 소문 말이지요? 저도요. 어쩜 영애께서 맘고생이 심하셨겠더라고요.”

“염려…… 감사합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엘렌은 고민했다.

“영애 같은 인재를 그리 대하다니, 크렘벨 공은 사람 보는 안목이 부족한 모양이에요. 당장 탈리아의 성과만 보더라도 이리 극명한데.”

“맞아요. 저도 영애의 선구안에는 정말 깜짝 놀랐답니다! 이후로는 탈리아에서만 구매하고 있지요.”

“그러고 보니 제가 살롱 카라밀로에서 차를 마시다 크렘벨 공께서 오신 것을 본 적이 있어요. 공께서 거칠게 영애를 찾아다니시더라고요.”

“어머, 제가 들었다던 소문도 바로 그거예요.”

“세상에, 무서워라!”

영애들은 작은 새들처럼 지저귀기 시작했다.

황궁 연회 때와는 판이한 분위기.

엘렌은 아무래도 상회의 일에 매진하던 동안 무언가 제게 좋은 흐름이 있었던 모양이라 추측했다.

이야기꽃을 피우던 여인들은 곧이어 울린 진행자의 목소리에 각자의 자리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 모두 잘해 봐요.”

마이어스 영애의 말과 함께, 그들은 1번 주자만을 남기고 모두 대기 구역으로 흩어졌다.

넓은 마장에는 여기저기 장애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커다란 목책, 적당한 크기의 연못 등 사람 기준으로는 꽤나 커다란 장애물들이었다.

첫 번째 주자가 나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부담이 되는지 속도가 그다지 빠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속도 조절에 실패해 점핑 타이밍이라도 어긋났다가는 크게 넘어지기 십상이므로, 무리하게 달리지 않는 점은 칭찬할 만했다.

이후 두 번째, 세 번째…….

몇 차례가 지나가고, 엘렌의 순번이 왔다.

그녀는 모든 기수가 그러하였듯, 말을 달래며 달리기 시작했다.

적절한 타이밍에 고삐를 바꿔 쥐며 신호를 주고, 말은 그녀의 신호를 인식하고 안정적으로 뛰어오른다.

펄쩍 뛰는 순간 몸을 웅크리고, 내려오면서 웅크렸던 허리를 편다.

그렇게 리듬감을 맞추며 다시 점프.

그것을 몇 번 반복하자 시곗바늘은 눈에 띄게 벌어져 있었다.

명실공히 1위의 기록으로 달리고 있는 이는 하나로 질끈 묶은 금발이 아름다운 여인.

엘렌이었다.

그녀의 실력을 아는 이들은 올해에도 역시나 하는 소리를 했고, 그녀에게 망신을 당했던 가문들은 못마땅한 눈으로 그녀의 모습을 쫓았다.

그렇게 다들 올해에도 어차피 1등은 텄다며 그녀의 경기를 관람하고 있던 때였다.

모두의 눈을 의심케 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대로 달렸으면 1조 1등의 주인이 바뀌는 이변은 벌어질 수가 없는 기록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장애물을 넘기 전, 엘렌이 갑자기 감속하더니 멈춰 선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웅성웅성 저마다 말을 주고받았다.

“저게 대체……?”

길리언조차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인가?

대기하고 있던 인원들이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그리 대답하는 그녀의 얼굴은 평온했다.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러나 그 평온한 얼굴에서 나온 말은, 전혀 평화롭지 못한 말이었다.

“기권하겠습니다.”

“……예?”

그녀의 말을 들은 진행자는 제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느냐는 듯 반문했다.

그에 엘렌은 몇 번이고 다시 말해 주겠다는 듯 또박또박, 근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들릴 정도의 큰 목소리로 말했다.

“엘렌 크렘벨은, 기권입니다!”

길리언의 눈이 경악으로 뜨였고, 엘렌은 이 상황이 못내 유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부인. 기권이라 함은 부인의 성적이 점수로 기록되지 않고, 종합 점수 합계를 낼 수 없다는 말이 된다는 것. 알고 계시지요?”

진행자가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는 듯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엘렌은 즐거움이 가득 배어난 목소리를 굳이 숨기지 않고 말했다.

“네. 잘 알지요.”

1등을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겠다.

의도가 너무도 명백히 보이는 행위였다.

크렘벨에게 줄 점수 따위는 없다는 의지의 표명.

멀리서 길리언이 벌떡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성질 같아서는 무어라 한마디라도 소리를 쳐야 하는데, 군중의 앞이라 차마 그럴 수 없는 답답함이 보였다.

그 반응은 엘렌을 더욱 큰 즐거움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파핫, 맑은 웃음을 터뜨리며 제 말에 쐐기를 박아 넣었다.

“크렘벨의 이름으로 제 점수가 올라가도록 할 수는 없는지라. 아, 애초에 마지막 장애물은 넘지도 못했으니 점수도 없군요.”

연이어 터지는 그녀의 말에 길리언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듯, 제 자리를 빠져나와 경기장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엘렌 크렘벨, 기권으로 처리해 주십시오.”

“에…… 엘렌 크렘벨, 기권입니다! 크렘벨가는 여성 장애물 비월 부문 기권으로, 자격 미달로 인해 종합 심사에 오를 수 없음을 알립니다!”

진행자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렸다.

그 장면을 구경하고 있던 귀족들은 그야말로 장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시끄럽게 떠들어 대었다.

기권이라니.

그럴 바엔 그냥 참가를 않는 게 낫지 않나?

그러니까 고의인 게지.

그래. 저건 누가 봐도 명백한 시비지.

대놓고 망신을 주려 작정했군.

이혼한다더니, 진짜인가 봐.

고스란히 들려오는 이야기들에 길리언의 얼굴은 터질 듯 붉게 타오르고 말았다.

저 여자가 누구 마음대로 저런 일을 벌이는 것인가.

‘아니, 왜 진행자는 가주인 내게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일을 처리하는 거지?’

그는 정말로 화가 났다.

하지만 그녀의 말마따나, 어차피 장애물을 끝까지 넘지도 않았으니 점수를 계산해서 받아도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 경기 진행자들에게 토를 단다는 것은 황실의 진행에 토를 단다는 것과 동의문.

여기다 대고 곧이곧대로 제 분을 쏟아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길리언은 머리끝까지 차오른 화를 참고 행선지를 바꾸었다.

그는 크라이언트의 천막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디며 중얼거렸다.

“제기랄, 엘렌 크렘벨……!”

주먹 쥔 손가락이 그의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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