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하문하시지요.”
케이든의 푸른 눈동자가 엘렌을 향했다. 폭풍 전야의 바다를 연상케 하는, 짙게 가라앉은 감색이었다.
“나는, 영애가 어째서 내게…….”
“…….”
호기롭게 화제를 꺼낸 것치고 그는 쉬이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니까, 영애가 어째서, 내게…….”
하지만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고도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 사이에 잔잔하게 남아 있던 웃음기도 어느새 사라졌다.
케이든이 다시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엘렌은 눈앞의 남자를 불렀다.
“전하.”
케이든의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무언가를 찾아내신 게로군요.”
“…….”
“제게 궁금하신 것은 아마…… 제가 어째서 전하께 그의 역심을 알렸는가.”
엘렌의 질문에 그는 침묵했다.
그저 연거푸 술병을 기울이며 독한 브랜디를 비워 내던 케이든은,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서야 입을 열었다.
“가만히 있었다면 그대가 제국의 정상에 서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처음 와 보는 도시에 홀로 떨어진 사람처럼 우두커니 말했다.
“어째서 그랬을까. 그냥……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인생에 다시없을 배반을 겪은 그를 엘렌은 그저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지나간 생각들은 많았다.
무엇이라 한마디로 콕 집어 표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것.
다만 그것들이 스쳐 가며 남긴 잔상들 속에는, 죽어 버린 그 옛날의 여인과 지금 눈앞의 저 남자가 아주 많은 장면을 차지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전하.”
그의 시선이 엘렌을 향했다.
“저는 전하께서 성군의 재목이시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거 참 뜬금없고 고마운 말이군요.”
“전하의 질문에 답해 드리자면, 저는 제 사람들이 암군의 폭정 아래 스러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이유이지요.”
“길리언은 암군이 될 것이다?”
“예.”
믿음을 저버린 자를 떠올린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전하. 앞으로는 사람이 아니라 조건을, 상황을 믿으십시오.”
“사람을 믿지 말라……. 그 말인즉 그대 또한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로 들리는데.”
“그렇지요.”
“그대는 내가 그대를 믿어 주길 바란 것이 아니었습니까?”
“바랐지요.”
“그런데 왜 그리 말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는데.”
“전하께서 저를 믿어 주시는 것이, 당연히 제게는 좋습니다. 하지만 전하께는 아닙니다.”
“…….”
“그것은 썩은 대들보로 당장의 붕괴를 막는 것과 같습니다. 분명 언젠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전하를 무너뜨리겠지요.”
케이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 속 까만 동공이 유독 선명했다.
“그것을 내게 말해 주는 이유가 뭡니까?”
그의 질문에 엘렌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게. 뭘까.
나는 왜 이 남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낱낱이 해 주고 있는 걸까.
“아마…… 진정한 성군의 통치 아래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제 꿈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당신에게 나를 투영하고 있는 것일지도.
하지만 엘렌은 뒷말을 자신의 속에만 담아 두었다.
“……그대는 내가 그렇게 그대까지도 경계하며 살길 바랍니까?”
“예.”
“그러면 영애는 손해를 보는데도?”
“전 전하께서 필요로 하는 조건 아래, 언제나 유능하게 있을 것이기에 상관없습니다.”
“하, 참.”
그는 심각하게 묻던 것도 잊고는 기가 차 웃고 말았다.
“우리의 관계는 변하지 않습니다, 전하. 전 제 목적을 위해 전하를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고, 전하 역시 안정적인 기반을 위해 저를 놓으셔서는 안 되지요.”
“난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차지한 황위에 의미는 있을까…….”
반쯤은 체념한, 혼잣말 같기도 한 말이었다.
하지만 엘렌은 알았다.
지금 그가 뱉는 말들은, 배신을 확인한 남자가 제 가슴에 새겨진 상처가 너무 아파 하는 말들이었다.
“그리해서 살아남는다면 의미는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모습.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일이 계획대로 잘 풀렸다는 것이었다.
황태자가 길리언의 배신을 확인했다.
좋은 신호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명확히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이 그녀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엘렌은 케이든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직시했다.
당신과 나는 그 남자에게 어떠한 형태의 정을 바랐던 시점부터 이미 한 길을 걷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리하여 우리는 만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상처는 쉬이 치유되지 않을 것이기에, 이것이 우리를 살게 할 원동력으로서 존재할 것이기에, 우리는 죽고 싶은 고통을 통해 삶을 좇는 그 역설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애써 침착하려 하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나 술기운 탓에 눈이 그렁그렁했고, 떨리고 있는 손은 미처 숨기지 못했다.
엘렌은 저보다 훨씬 큰 손을 단단히 붙잡으며 말했다.
“전하. 저는 목숨보다 명예와 신의를 택하는 자들을 알고 있고, 그런 이들이기에 그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
“혹 전하께서도 그러시다면.”
엘렌의 따스한 체온이 케이든의 손등 위에 내려앉았다.
“후회가 남지 않을 선택을 하세요.”
이것은 배반당한 자들의 연대다.
살아남기 위해, 죽임당하기 전에 죽음을 행하는.
“적어도 우리가 목표를 공유하는 한, 저는 언제나 여기에 있을 테니…….”
술병의 싸늘한 냉기로 젖은 손을 덮어 온 온기.
자못 뜨거움까지 느껴지는 그 손을, 케이든은 꽉 그러쥐었다.
달리던 마차가 멈추고, 제 손이 더 이상 떨리지 않을 때까지, 계속.
* * *
화려하기 그지없는 황실 마차가 체셔 저 앞에 멈춰 섰다.
문이 열리자, 그 안에는 주정뱅이 하나와 그 어깨를 붙잡은 엘렌이 있었다.
“테드, 여기 전하를 좀.”
“아니야. 나는 멀쩡하다고 …….”
“세상에, 전하! 만찬도 전에 무슨 술을 이렇게 드셨습니까!”
“아니……. 정말 멀쩡하다니까…….”
케이든이 흔들리는 몸을 애써 똑바로 가누며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깔끔하게 무시한 테리어드는, 제 상관을 엘렌에게서 떼어 낸 뒤 휘익 어깨에 들쳐 메었다.
“욱……!”
“전하, 뱉으시면 안 됩니다!”
“취객 취급을 할 거라면 최소한 섬세히는 다뤄 주게, 체셔 경…….”
위층 응접실에는 스파니엘 체셔와 코엔하임 경 모리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엘렌을 비롯한 모두는 서로 간단한 안부 인사를 주고받은 뒤 응접실에 자리를 잡았다.
손님의 상태가 어떻든 간에 필요한 인원은 다 모였다.
회의를 시작해야 할 때였다.
곧 사용인이 꿀물을 들고 올라왔다.
케이든이 그것을 병째로 받아 들이켜고는 말했다.
“……미안합니다. 내가 추태를 보였군요.”
“아닙니다. 그보다 상태가 괜찮으시다면, 이만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는지요?”
엘렌의 미소는 변함없이 친절했다.
그러나 경멸을 가득 담은 눈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테리어드의 시선에, 케이든은 또다시 연거푸 사과한 뒤에야 비로소 본론을 꺼냈다.
“아……. 그러니까…… 하역장. 그래, 하역장에서 압수한 물품 중, 무허가 거래 금지 품목인 화약이 있었던 건 기억할 겁니다. 그 이후 모든 화물을 검사한 결과, 우리가 제조하지 않은 머스킷까지 찾아냈습니다.”
“총까지……!”
테리어드가 놀라서 중얼거렸다.
“다만 그 출처는 철저히 세탁한 모양인지 정확한 출처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군요.”
“일단 화약 성분 분석을 의뢰한 결과, 배합률이 이스타지오에서 기존에 사용하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케이든의 보고에 엘렌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불법인 것은 확실해졌군요. 그렇다면 타국에서의 밀수냐, 국내에 우리가 모르는 초석 광산이 있느냐인데…….”
“정확합니다. 우리는 일단 미신고 광산이 있다는 쪽에 방점을 찍고 조사를 했습니다. 추려진 곳들이 꽤 있지만, 이 조사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겁니다.”
“중간 유통 경로와 출처를 알 수 없는 것이 낭패로군요.”
엘렌이 진한 아쉬움을 담아 말했다.
길리언은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치밀한 사내였던 모양이었다.
이렇게까지 연결 고리를 철저히 차단해 추적을 피해 갈 줄은 몰랐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다른 방면에서의 수확은 있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케이든에게 집중됐다.
“비교적 위험도가 덜한 일반 무구와 대규모 보급품 쪽에서 수상한 꼬리를 잡았지요. 거기에서 나온 이름이 바로.”
케이든이 엘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크렘벨.”
그녀를 응시하는 눈동자에 아픔이 담겼다.
“그래요, 정말 크렘벨이었단 말입니다.”
“……그렇군요.”
가볍게 주먹을 쥐고 있던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갔다.
“솔직히 아직 모든 것이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길리언의 그런 행동이 정말로 역심과 이어진 것인지 또한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황가를 기만했고…… 나는 그것을 좌시할 생각이 없다는 겁니다.”
이로써 황태자는 길리언의 배신을 확인했고, 그와 대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면 앞으로는 어찌하실 요량입니까?”
“일단 당장 무언가 행동을 취하기는 어렵습니다. 앞으로 이런저런 반발이 있을 게 뻔한데 공후 회의의 표를 하나 잃어버린다면 손실이 크지요.”
“아직 수중에서 놓기는 어렵다는 말씀이시군요. 동의합니다.”
“이해해 주어 고맙습니다.”
케이든은 다시 벌컥, 꿀물을 들이켜고는 말했다.
“그래서 꺼내는 말입니다만…… 내가 영애의 이혼을 어떻게 도우면 되겠습니까?”
케이든의 말에 테리어드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무릎을 탁 쳤다.
“아! 이혼으로 크라이언트와 완전히 관계가 끊어지면 크렘벨도 주춤할 수밖에 없겠군요!”
확실히 그랬다.
크렘벨이 활개 치고 다닐 수 있는 여러 이유 중, 크라이언트의 든든한 후원은 꽤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엘렌은 그저 씁쓸히 웃을 뿐이었다.
“그야 그렇지마는…… 생각을 조금 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황실에 이를 고발한 당사자가 저임을 밝히며 크렘벨과의 이혼을 청할 생각이었습니다만…….”
“확증이 없으니 그것도 어렵게 되었다는 소리군요.”
케이든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