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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26화 (26/128)

<26화>

“당장은 문제의 증거들이 크렘벨 공과 관련 있음을 밝히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총과 화약을 포함해서, 압수한 물품 중 일부를 주시면 저희도 조사해 보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조만간 체셔 경을 통해 보내지요.”

“그러니 당분간은…….”

도움을 구할 것이 없습니다.

이어질 말은 그것이었다.

그런데 엘렌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어떠한 생각이 스쳤다.

“전하.”

케이든의 눈길이 엘렌을 향했다.

“조만간 열릴 황실 대회 말입니다만, 분명 전하께서 주관하시는 것이었지요?”

“승마 대회라면 그렇긴 합니다.”

그의 대답에 엘렌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다소 시끄러운 일이 생겨도 괜찮으실는지요?”

그녀의 물음에 케이든의 눈썹이 팍 찌그러졌다.

대체 무슨 사고를 치려고?

“무언가 다른 생각이라도 생긴 겁니까?”

“일단은 그렇다고 해 두지요.”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이야기하면 어떻습니까?”

“음, 자세한 건 지금부터 구상할 예정이라.”

엘렌이 의뭉스러운 미소와 함께 대답을 피하자, 케이든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허, 하며 헛바람을 내뱉었다.

요는 짜 둔 틀은 있으나 지금은 말해 주지 않겠다는 소리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것은, 그가 저 말에 무어라 더 반박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저 머릿속에서는 분명 그가 질겁할 만한 생각들이 날뛰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그녀라면 어떻게든 원하는 바를 얻어 낼 것이란 믿음이 어느새 마음 한구석에 도사린 것이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가.’

퍼덕퍼덕 난리를 쳐 대는 가슴께가 시끄러웠다.

묘하게 울렁이는 느낌이 참으로 생소했다.

‘그래도 뭐…… 충분히 그럴 만하지 않나.’

옛 왕들도 훌륭한 장수나 책사를 보면 그 능력에 반해 쫓아다녔다질 않나.

그런데 하물며 자신은 이런 이가, 그것도 바로 옆에 앉아 있으니.

케이든은 힐끔 제 옆에 앉은 체셔 경을 바라보았다.

술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얼굴이 제법 불그스름하다.

오랫동안 그녀를 알아 왔다던 체셔 경 역시 비슷한 듯했다.

그녀의 진면목을, 자신보다 더 먼저부터 알아 왔을 테니 당연한 일이다.

그는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다, 엘렌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자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불렀다.

“영애?”

그녀는 아까부터 방의 한구석에 비치되어 있던 상자들을 향해 다가가더니, 품에서 열쇠를 하나 꺼내 들고는 말했다.

“그리고 말씀드렸던 5억 골드는, 이것을 이후로 차근차근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철컥, 상자가 열리고 그 속에 있던 내용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전부?”

상자 속을 본 케이든이 벙한 얼굴로 물었다.

“전부는 아니고 더 드려야 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차근차근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이게 전부 다, 아니, 아닙니다.”

응접실 내부 조명을 온몸으로 반사하는 영롱한 황금들.

그의 심장이 뚝 떨어지더니 더욱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이만한 금을 이렇게 단시간 내에 유통할 수 있다니. 대체 크라이언트의 저력은 어느 정도인 걸까?

“지원금은 고맙게 쓰겠습니다. 그리고 황실 대회에서의 문제는…… 염두에 두고 있도록 하지요.”

길리언을 잃었지만 괜찮다.

적어도 우리가 같은 목표를 공유하는 한, 이 대단한 여자는 내 곁에 있을 것이니까.

그는 그것으로 어차피 제게 고민의 여지 따위는 없었음을 받아들였고, 그의 승낙에 엘렌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입수하신 총과 화약부터 크라이언트 저로 보내 주시길 바랍니다.”

* * *

길리언은 제 집무실의 벽 한편을 장식하고 있는 장식장을 열어 술병을 꺼냈다.

평소 업무 시간에는 술을 일절 입에 대지 않는 것이 그의 규칙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술 없이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하필 생산이 가장 까다로운 품목들을 들키다니.’

길리언은 다시금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황태자가 템트 하역장까지 나오게 되었단 말인가.

제멋대로인 황태자의 행동을 떠올리자 그는 또다시 열이 치솟기 시작했다.

‘그놈의 황태자.’

거슬리는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남편의 눈앞에서 부인을 채 가다니, 도대체 그게 대체 말이나 되는 일인가.

하지만 황태자는 그리했다.

게다가 보란 듯이 끌고 나가서 춤까지 추고, 곡이 끝나자마자 자신이 다가올세라 잽싸게 바깥을 향해 빠져나갔다.

주먹이 쥐어질 정도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다만 아직 황태자와 정면 대립은 좋지 않기에, 어떻게든 참아 냈을 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황태자뿐만이 아니었다.

근래 부인이 벌이는 짓들은 더했다.

정말 속된 말로 미치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 여자가 원하던 건 공작가라는 지위가 아니었나?’

서로 간의 거래는 충실히 이행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크렘벨 공작 부인의 이름을 쥐여 줬고, 정숙하게 차림을 해라 했을 뿐이지 입고 쓰는 것을 싸구려로 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이혼을 하자니.’

그래도 처음에는 들어 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공작가라는 지위를 탐냈던 이유가 무엇이겠나.

타인의 앞에서 내세울 수 있는 권위를 원했을 터인데, 막상 저택 내에서는 그것이 충족되질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실책이었고, 그렇기에 집안 관리 문제라면 권한을 위임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싫단다.

그러면서 막무가내로 이혼만을 부르짖는데, 대체 무슨 불만이 있어서 그러는 것인지 몰라 그로서는 정말로 미치겠는 것이었다.

‘감히 크렘벨을 아랫사람 보듯 깔보는 이는 없었고, 엘렌은 공작 부인으로서 어느 파티든 부족함 없이 휘젓고 다닐 수 있었다. 난 그것을 위해 항상 노력해 왔고. 그런데 대체 왜!’

길리언은 술잔을 들이켰다.

‘게다가 황태자와는 또 언제 친분을 만들어서…….’

그렇게 한 잔, 두 잔 술을 들이켜던 길리언의 머릿속에 문득 하나의 가정이 스쳤다.

설마.

‘……계승권 서열이 낮은 공작보다, 황태자로 재취를 알아보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을 한 건가?’

이리 생각하니 무언가 앞뒤가 맞는 것 같았다.

그간 제가 보아 왔던 여자라면 그럴 만한 담이 없다며 웃고 넘길 이야기였지만, 최근의 그녀는 달랐다.

그녀는 더 이상 혹여 제가 쥔 것을 놓치게 될까 노심초사하던 여자가 아니었다.

무엇을 들어도 필요 없다는 말만 반복했고, 그만큼 과감해진 행동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길리언은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정말로 황태자인가?

같은 피를 공유하고도 그저 누구의 밑에서 태어났는가에 따라 운명이 갈린, 그 멍청하기 짝이 없는 낯짝의 주인!

쾅!

길리언이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쌓인 서류들이 보였지만, 도저히 그것들을 읽을 정신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똑똑. 바깥에서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그의 신경질적인 대답에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마님께서 체셔 저를 나서셨답니다. 방향으로 보아 목적지는 크라이언트 저택인 것 같다는 보고입니다.”

“당장 마차를 준비하도록.”

길리언은 제게 들어온 보고에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황태자가 제 부인에게 무언가 더 술수를 부리기 전에 되찾아 와야 했다.

그 빌어먹을 자식에게 무언가를 더 빼앗기기 전에.

* * *

크렘벨가의 문장이 박힌 마차가 수도를 가로질러 달렸다.

크렘벨령은 기본적으로 수도 이스타잔과 거리가 가깝다.

두 도시는 템트 운하를 경계선으로 갈라져 있는데, 이는 바꿔 말하면 이 천연 해자만 건널 수 있다면 바로 도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덕에 크렘벨령에서 수도까지의 왕래는 마차로 한두 시간이면 충분했지만, 그 두 시간여 동안 크렘벨가의 마부는 정말 딱 죽고만 싶었다.

아직 멀었나?

왜 이리 기어가지?

길리언은 끊임없이 물었고, 그때마다 크렘벨가의 마부는 차라리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참아 내야만 했다.

그래도 어쨌든 시간은 지나, 마차가 크라이언트 저택 앞에 도착했다.

길리언이 문을 두드리자 저택에서 한 노인이 나왔다.

저를 저택의 집사라 소개한 남자는 길리언의 방문 목적을 물었다.

“실례지만, 어떤 용건으로 오셨습니까?”

“엘렌 크렘벨. 여기에 있지? 가서 데리고 오도록.”

하지만 남자는 공손한 어투로 딱 잘라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께서는 지금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 확인을 마치고 온 것이다. 감히 지금 거짓을 고하는 건가?”

“정말로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백작을 불러오도록.”

“죄송합니다. 주인님께서도 지금은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럼 백작은 어디에 있지?”

“죄송합니다. 주인님의 행선지를 밝힐 권한이 제게는 없습니다.”

길리언은 늙은이가 또박또박 떠드는 말에 슬슬 분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제 관자놀이를 짚고는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나? 길리언 크렘벨, 백작의 딸과 결혼한 크렘벨 공작이다.”

“크렘벨 공작 각하를 어찌 몰라 뵙겠습니까. 하지만 제겐 주인님의 행선지를 밝힐 권한이 없습니다.”

“……편안한 노후를 바라지 않는가 보군.”

“만백성의 어버이이신 황제 폐하의 뜻이라면 모를까, 그 이외의 타인에게 발설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

길리언은 어이가 없어 실소했다.

하다 하다 이런 놈도 황위를 운운하며 저를 깔보는가.

그는 진심으로 화가 나기 시작했다.

물론 크라이언트 저의 집사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분노로 한껏 비틀려 있던 길리언에게는 그것이 저를 깔보기에 나온 태도로 보였다.

“너…… 이 이야기는 네 주인에게 잘 전해 주도록 하겠다. 백작이 어디 있을지 짐작 가는 곳이 없는 것도 아니니.”

어차피 백작이 요즘 사업으로 바쁜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보나 마나 크라이언트가 소유의 공방 단지나, 지금이 사교 시즌임을 고려하면 부티크 혹은 살롱에 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말 한 마리가 급히 달려오더니 그의 뒤에서 멈춰 섰다.

“각하!”

그를 찾아온 전령이었다.

“마차가 한 대가 아니었습니다. 나머지 한 대가 크라이언트가의 살롱, 카라밀로로 향했다는 전언입니다!”

“그랬군. 당장 카라밀로로 간다.”

길리언이 짓씹듯 말을 뱉었다.

그는 곧장 마차를 돌려 전령이 이른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렇게 도착한 살롱 카라밀로에서도, 그는 엘렌의 흔적이라고는 머리카락 한 올조차 찾을 수 없었다.

당연했다.

엘렌은 그 시각, 부티크 탈리아에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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