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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24화 (24/128)

<24화>

“디스플레이 마네킹, 열 개에서 열다섯 개로 늘리라고 지시하지 않았던가?”

“죄송합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C열 코너 추천 액세서리, 3번은 다른 것으로 바꾸라고 해.”

“예. 담당자에게 전달하겠습니다.”

‘불티나다.’

물건을 내놓기가 무섭게 빨리 팔리거나 없어진다는 뜻의 말.

이 단어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곳이자, 수도 고급 의상실 거리에서 단연 눈에 띄는 곳은 바로 크라이언트 상회 산하의 부티크, 탈리아였다.

그곳은 일단 사람들이 붐비는 수준부터 달랐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마차 탓에 주차 안내 직원을 따로 세워야 했으며, 드레스 물량이 계속 빠져 댔기에 디스플레이 상품도 몇 시간 간격으로 새로 세워야 했다.

그에 비해 다른 의상실들은 그야말로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시즌은 이미 시작되었고 초기 물량도 이미 생산을 마쳤는데, 거짓말처럼 유행만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마진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당장 제작에 착수해도 판매까지 이 주일은 걸린다.

하지만 귀부인들은 지금 당장이 급했고, 때문에 그들은 결국 이런저런 것들을 감수하고서라도 크라이언트의 부티크로 향했다.

이야기를 들은 남편들은 내 돈으로 왜 황제파 놈들의 배를 불려 줘야 하냐 말하며 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부인들도 할 말은 많았다.

그럼 트라이아 공작 부인과 황녀 전하께서 직접 이끄시는 유행을 무시하고 파티에 나가란 말이냐, 그도 아니면 설마 아예 칩거라도 하며 이상한 소문이나 나게 만들라는 말이냐, 크라이언트는 알았던 것을 왜 당신은 몰라 일을 이렇게 만드느냐.

쏟아지는 부인들의 일갈에 결국 그들은 모두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렇게 본래라면 오세먼 남작가 산하의 의상실에서 드레스를 맞췄을 부인들까지도 선뜻 그 지갑을 열어젖히게 되었고, 이는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리며 크라이언트 저택에 웃음꽃을 가져다주었다.

가장 크게 기뻐한 것은 당연히 가문의 주인이자 이 상황을 설계한 자의 아비인 다니엘이었다.

그는 엘렌을 두고 청출어람이라 말하며 눈에 띄게 함박웃음을 짓고 다녔다.

다만 그의 표정은 얼마 가지 않아 굳어지고는 했는데, 그것은 제 딸의 신변이 걱정되었던 탓이었다.

가주는 가솔의 처분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다.

때문에 아직 법적으로 크렘벨 소속인 그의 딸은 크렘벨 공작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엘렌은 당분간 크라이언트 저로 돌아오지 않는 것을 택했다.

길리언이 일전에 했던 것처럼 그녀의 신병을 확보한 뒤 저택 내 감금을 시도할 가능성이 매우 농후했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가 함부로 하지 못할 타 귀족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것이 안전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금 그녀가 머무르고 있는 곳은 체셔가의 저택이었다.

“내가 준 리스트의 귀족들. 응대에는 차질 없었겠죠?”

“예. 모두 VIP룸으로 곧장 모셨으며, 가능한 한 제가 모시거나, 손이 겹칠 때는 가장 업무 숙지가 잘 된 직원에게 응대를 맡겼습니다. 해당 직원의 경우 그 자리에서 세 벌까지 판매를 마쳐, 응대에는 문제가 없었음을 확인했습니다.”

“좋아요.”

이 이상 매장을 관리인 없이 둘 수 없었던 그녀가 신중에 신중을 기해 나온 만큼, 서둘러 매장을 점검하던 중이었다.

엘렌의 시야에 아는 얼굴이 들어왔다.

“아, 코엔하임 백작 부인.”

“어머, 반가워라! 오랜만이에요.”

코엔하임 경 모리스의 친모, 코엔하임 백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이혼 소동에 대해 전해 들었는지 엘렌을 따로 지칭하지 않는 배려를 보였다.

“일전의 무도회에서는 인사를 드리지 못했었지요. 스위니와 함께 찾아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리 신경 쓰지 말아요. 오늘 안부를 나누었으니 된 것 아니겠어요.”

온화한 눈웃음과 함께 그녀는 제 입가를 부채로 가리며 말했다.

그런 그녀에게 엘렌은 정말 고맙다며 두 손을 그러모아 말했다.

“매번 저희 부티크를 찾아 주신 것을 알고 있답니다. 부인, 혹 앞으로 제작될 드레스들의 카탈로그를 먼저 보실 의향이 있으신지요?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시다면 우선순위로 빼 드릴 수 있답니다.”

“어머나, 고마워라.”

그녀의 제안이 정말로 기꺼웠는지 눈이 동그래진 코엔하임 백작 부인이 긍정의 말을 뱉었다.

엘렌은 미소와 함께 그녀를 직접 VIP 룸으로 이끌었다.

‘예약도 채울 수 있겠군.’

이것만 해치우고 바로 돌아가야겠다.

엘렌은 혼자 속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엘렌의 적극적인 응대로 코엔하임 백작 부인은 총 다섯 벌의 드레스를 구매, 세 벌의 드레스를 예약하고 돌아갔다.

그녀는 조만간 아들인 코엔하임 경 모리스와 함께 찾아오겠다며 제 아들의 휴일을 체크했고, 엘렌은 코엔하임 저택으로 남성복 카탈로그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녀는 마차 앞까지 부인을 배웅하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미소로 가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주차장에서 돌아오던 엘렌의 시야에 무언가 커다란 것이 잡혔다.

“저건 대체……?”

그것은 보통의 크기를 훌쩍 뛰어넘은 커다란 마차였다.

그런데 그 마차는 크기도 크기였지만, 문짝에 그려진 문장까지도 심상치 않았다.

무려 이스타지오를 상징하는 독수리였던 것이다.

‘황실?’

황실에서 내 가게에는 왜?

누구지? 나를 찾아온 건가?

내 행선지를 파악한 건가?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엘렌은 갑자기 벌어진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에 긴장으로 손을 꼭 쥐었다.

* * *

케이든은 지금 정말 딱 환장할 것만 같았다.

“없다고? 어딜 갔나?”

“부티크 탈리아로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혹시…….”

“아니, 되었네. 체셔 백작 내외에게 곧 다시 올 테니 미안하다고 전해 주게.”

그는 곧장 등을 돌려 제가 타고 온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전하?”

“부티크 탈리아로! 최대한 빨리!”

그가 쾅, 마차의 문을 닫으며 외쳤다.

‘설마 길리언이 알아채는 건 아니겠지. 그가 먼저 도착해서는 안 돼…….’

첫 조사 보고서가 올라온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일전에 조사 결과가 나오면 반드시 체셔 저로 오라며 당부했던 이가 있었기에, 그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애써 마음을 다잡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막상 도착했더니 그 체셔 저가 텅 비어 있는 게 아닌가.

심장이 추락하는 듯한 그 느낌은, 정말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모를 것이었다.

선득한 한기가 그의 목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케이든의 손이 다시 술병을 쥐었다.

‘……되는 일이 없군.’

꼴꼴꼴 흘러나오던 술이 두어 모금 만에 자취를 감췄다. 여기까지 오던 길에 다 마셔 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금방 바닥을 보이고 만 술병을 구석에 내던졌다.

부티크에 도착하자마자 케이든은 엘렌부터 찾았다.

멀찍이 주차장에서부터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다행이다. 아직 있어.’

그의 온몸을 바짝 옥죄고 있던 무언가가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벌컥, 케이든은 단숨에 문을 열어젖히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전하?”

갑자기 뛰쳐나온 인영에 놀랐는지 엘렌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높았다.

“영애! 그대는 정말이지……!”

“네?”

엘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그대가 길리언에게 잡히면 곤란해지는 것은 그대만이 아니다, 이것은 과감한 것인지 무모한 것인지 제대로 따져 볼 일이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그런데 막상 저 동그란 눈을 마주하고 말하려니, 어찌 된 일인지 쉬이 뒷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이…… 선물을 기다리기가 싫어서, 직접 받으려고 왔습니다.”

그는 궁색하게나마 변명을 만들어 냈다.

그러자 엘렌이 손뼉을 짝, 치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전에 말씀드렸던 선물들을 막 골라 둔 참이었는데. 바로 가져가시겠습니까?”

제 안전에 대한 생각은 일절 없는 듯 보이는 맑은 웃음에 케이든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골라 놨다니 됐습니다. 배송 지시도 해 놓았을 텐데, 그냥 영애를 마중 나온 셈 치지요.”

“마중이요?”

“갑시다, 체셔 저로.”

“아.”

엘렌이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낮은 감탄사를 뱉었다.

그것이 또 괜히 얄미워, 케이든은 짜증 섞인 말을 웅얼대었다.

“일단은 영애의 상황이 위험하지 않습니까. 밖은 아무래도 걱정이 됩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그건 마차에 오른 뒤 이야기합시다.”

케이든이 에스코트를 위한 손을 내밀었다.

그가 여기까지 온 목적이 선물 따위가 아니라 제 안전 확보였음을 알아챈 엘렌이 웃자, 케이든이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웃지만 말고, 제발, 빨리 갑시다.”

“예.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전하께서 이리 오실 일은 만들지 않도록 노력하지요.”

엘렌은 매장의 직원을 불러, 마차는 모두 기존에 지시받은 대로 움직이게 하란 전언만 남긴 뒤 곧장 마차에 올랐다.

케이든이 조금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기존의 지시라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도 됩니까?”

“별거 아니랍니다. 그저 일종의 데코이지요.”

이랴! 바깥에서 마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나저나 이리 오신 것을 보니 일전의 조사 결과가 나온 모양이군요.”

“조사……. 뭐, 그렇습니다.”

한동안 더 떠들 것 같았던 케이든이 일순 조용해졌다.

그 짧은 침묵 사이로 익숙한 냄새가 번져 왔다.

엘렌은 코끝에 닿은 향을 확인하고는 물었다.

“……혹시 술을 드셨습니까? 주향이 납니다.”

“오면서 조금 마시긴 했는데…….”

케이든이 제 몸에 코를 묻었다.

그는 몇 번 킁킁대더니 “잘 모르겠는데.”라며 중얼거리고는 물었다.

“주향이 거북합니까?”

“그렇진 않습니다만.”

“사실 지금도 조금만 더 마셨으면 하는데…… 영애가 거북하다면 어쩔 수 없고.”

그의 눈치가 정말로 술이 제법 고픈 듯했다.

엘렌은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음. 저는 독한 것보다는 달콤한 것을 좋아한답니다.”

케이든은 말없이 의자 밑에서 술병들을 꺼내 들었다.

“……보아하니 오면서 드신 양도 조금이라 표현하기엔 어폐가 있을 듯한데. 주향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겠군요.”

“그렇습니까?”

케이든이 피식 웃고는 한 모금을 꿀꺽 들이켰다.

그렇게 거침없이 들이켜길 수차례.

그가 술병을 내려놓더니 말했다.

“……영애.”

“예.”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이 있어서 그러는데. 하나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가 흐린 눈동자로 엘렌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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