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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23화 (23/128)

<23화>

“아, 제가 들으면 화를 낼 만한 내용인가 보군요. 어디 말씀해 보시지요.”

“아니, 그것은 아니고…….”

은근한 일침에 당황한 케이든의 스텝이 살짝 꼬였다.

엘렌이 자연스럽게 그의 발을 피했다.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춤을 이어 나갔다.

케이든이 조금 붉어진 낯으로 말했다.

“일전에 이야기를 나눈 5할에서 조금 초과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초과…….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7할까지 이야기가 나왔는데, 가능한 한 줄여 볼 생각입니다.”

그는 조심스레 엘렌의 낯을 살폈다. 하지만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역시 예산 초과라는 말이…….’

그는 손에 힘이 들어가려는 걸 참았다.

자신이 안건을 받아들이게 하는 데 급급해 제대로 부딪치지 못했던 탓이었다.

자신의 잘못으로 초래된 결과이니, 그만큼 고개를 더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내 가능한 만큼 최대한 그대를 도울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 당장은 확실히 내가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홍수가 일어나도 괜찮을 지역과 아닌 지역을 내 손으로 선별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는 비굴하더라도 상황을 타개하길 택했다.

“지원이 어렵다면 대부라도 괜찮습니다. 몇 년이 걸리더라도 황실에서 나오는 내 몫의 돈으로 변제하겠습니다.”

‘얼마나 해 준다고 할까. 1억 골드? 아니, 사실 5천만 골드만 해 줘도…….’

5천만 골드만 돼도 상전으로 모신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백성의 일인 데다, 시기를 놓치면 복구가 훨씬 돈이 들어가는 일이지요. 압니다.”

엘렌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럼 5억 골드면 될까요?”

“어, 그…… 5억?”

케이든이 잠깐 벙해져서 묻자 엘렌이 싱긋 웃었다.

“네. 5억.”

그들이 함께 발을 맞추던 곡이 끝났다.

케이든과 맞잡고 있던 손을 놓은 엘렌이 우아한 몸짓으로 인사를 남겼다.

케이든은 멍하니 서서 그 장면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

그는 그녀의 인사에 화답하는 것도 잊은 채 몇 초를 더 서 있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고, 뒤늦게 한마디를 뱉었다.

“영애, 이리로.”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는 부리나케 홀의 중앙 플로어를 빠져나왔다.

벽에 기대어 서서 곡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테리어드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아, 엘렌―”

하지만 케이든은 엘렌의 손을 잡은 채 그대로 그를 지나쳤다.

앗. 엘렌이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나 케이든은 그것 또한 듣지 못한 채 테라스의 문을 열고 나가 버리고 말았다.

탁.

문을 닫은 그가 한 차례 심호흡을 하더니 물었다.

“영애. 그러니까, 5억 골드가…… 어디까지가 지원금인지.”

케이든은 지금 심장이 쿵쾅쿵쾅 미친 듯이 뛰고 있는 것이 아주 정신이 없었다.

설마 그게 전부 다 빌려주는 거라고 하지는 않겠지. 아니, 그래도 일단 돈을 내주는 게 어디야.

그의 속에서 갈등이 휘몰아쳤다.

아냐. 아무리 그래도 못 갚을 돈은 빌리지도 않는 게 맞지.

만약 5억 골드 전부가 대부금이면 그에게는 상환 능력 따위 없었다.

어쩌면 정말 만에 하나 그가 한 일백 살까지 산다면, 황실에서 나오는 품위 유지비와 궁 예산을 모조리 쓸어 모아야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아직 그가 알기로 일백 살까지 산 노인은 없었다.

“흠, 애매하군요.”

“무엇이……?”

쿵쿵 귓가를 울리는 맥박 소리가 시끄럽다.

“제가 이 돈을 드리는 것은 맞지만, 대가를 요구할 생각이기 때문에 이것을 채무라 해야 할지.”

“대가라 하면?”

“나중에 제 부탁을 한 가지 들어주시면 됩니다. 물론 전하께서 가능하시다고 판단되는 일만 부탁드릴 거예요.”

“그 가능하다는 일이, 설마 내 목숨을 끊어서 내놔라……라든가?”

“물론 아닙니다. 그래서는 저도 곤란해요.”

엘렌이 정말 별소리를 다 듣겠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웃음에 케이든의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울렸다는 것이다.

극도의 긴장감에서 해방된 탓일까.

시끄럽게 제 귓가를 울리던 고동 소리도 잦아든 것 같았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참 시원하게 들렸다.

어딘가 살짝 난처해 보이는 얼굴로 시원하게 숨을 내뱉으며 웃는 그 모습이, 그의 앞에서 처음으로 한껏 숨을 내뱉은 입술이, 둥근 호선을 그리고 있는 눈매가.

모든 것이 눈에 가득 박혀 왔다.

그는 생각했다.

정말 방심할 수 없는 여자다.

5억 골드라니, 이런 방식으로도 사람을 놀라게 할 수가 있었어.

‘아니, 이건 이 여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겠지.’

그래서 유독 그 장면이 선명하게 감각을 지배한 것이겠지.

그리 생각하니 그런 것도 같았다.

엘렌이 눈가에 살짝 맺힌 눈물을 정리했다.

그의 가슴을 관통했던 찌릿함은 어느새 그의 손바닥까지 파고들었다.

그것이 간지러웠던 케이든은 손바닥의 열기가 가득 고일 때까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 * *

테라스를 나오자, 그들이 들어간 곳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테리어드가 반색하며 그녀를 불렀다.

“엘렌!”

엘렌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문 옆을 돌아보았다.

“아, 테드. 미안해요. 아까 홀에서 쫓아오는 것을 봤는데, 상황이…….”

“괜찮아. 전하께서 무언가 하실 말씀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는 그리 말하며 이제야 비척비척 문을 열고 나오는 케이든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평소에는 제발 그러지 말라고 사정을 해도 사방팔방 뛰어다니던 양반이, 어째 지금은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전하?”

안 어울리게 왜 그러십니까?

테리어드가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아, 체셔 경.”

“전하. 어디 편찮으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궁으로 모실까요?”

“아니, 아니야. 괜찮아.”

케이든이 휘휘 손사래를 쳐 보였다.

테리어드가 영 못 미덥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엘렌. 괜찮은 거야? 아까…….”

“괜찮아요. 그가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전하께서 들이닥치셨으니까요.”

사실 그렇게 전하께서 빨리 오신 것도 테드가 한 일이죠?

엘렌이 미소 지으며 말하자, 테리어드가 살짝 시선을 피하며 의기소침하게 중얼거렸다.

“그런 것밖에 할 수 없었어……. 미안하구나.”

“그건 테드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래도 말이야.”

테리어드가 슬쩍 눈치를 보고는 케이든을 향해 말했다.

“전하, 명령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되었어. 상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자네가 그리 말할 일도 아니야.”

이제 좀 정신이 돌아왔는지 똑바로 선 케이든이 파티장의 한 곳을 흘겨보며 말했다.

그의 행동에 다른 두 사람의 시선도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을 향했다.

이클립스 황녀와 인사를 나누고 있는 길리언이 보였다.

황녀가 춤을 추지 않고 중앙 플로어에서 나오자 인사를 건네러 간 듯했다.

쯧.

케이든이 혀를 한 번 차고는 말했다.

“이만 가지.”

성큼성큼 걸어 나가던 케이든이 회랑을 걷다 말고 갑자기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더니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크레센트를 못 봤군.”

그의 말에 테리어드가 파티장이 있는 뒤를 힐끔 돌아보고는 말했다.

“황녀의 혼사를 먼저 치를 생각인 듯합니다.”

“흥, 내가 두 눈을 퍼렇게 뜨고 있는데. 웬만큼 간덩이가 부은 자가 아니라면 힘들겠지.”

케이든이 답지 않게 냉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꽤나 생소했던 엘렌은 저보다 앞서 걷고 있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턱 언저리와 입가만이 살짝 보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그의 안면 근육이 잔뜩 굳어 있는 상태라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럴 만도 하지…….’

엘렌은 그와 그의 형제들의 관계에 대한 사실들을 떠올렸다.

이스타지오 황실에서 황녀라 하면 단 한 명뿐이다.

그것은 이클립스 이스타지오로, 제2황자 크레센트 이스타지오의 누이동생이며, 후궁 벨라테스 이스타지오의 소생이다.

후궁 벨라테스와 황태자 케이든 이스타지오의 관계는 빈말로도 괜찮다 말하기 어려운 사이였다.

모두들 건강했던 황후가 급작스레 사망한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보다 당시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던 케이든이 가장 강렬했다.

이것은 흑막이 있는 죽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흑막은 누구인가?

누구도 묻지 않았고, 누구나 알았다.

케이든은 내 어머니를 살해한 인두겁을 둘러쓴 짐승이라 울부짖으며 벨라테스에게 달려들었다.

아직 사춘기를 겪는 중이었던 그의 인내심은 그리 크지 못했고, 어전에서 태연히 조의를 비치던 그녀의 모습에 눈이 뒤집힌 그는 결국 근위병에 의해 끌려 나가고 말았다.

여기서 케이든이 말하는 제 눈치를 본다는 것은 이런 것을 두루 포괄하고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중에, 아주 나중에 밝혀지지만 분명한 사실이었다.

길리언이 대체 어찌 찾아낸 것인지 모를 증거.

그것도 가로챌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엘렌은 그런 증거가 있다는 것만 알 뿐 그것이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까지는 몰랐다.

물증이 크게 남고 어쩔 수 없이 제게서 빠져나가는 돈의 흐름을 볼 수밖에 없는 도박장이나 무기 밀수 등과 달리, 그것은 정말 허공에서 나타난 듯 갑자기 등장했기 때문이다.

걷다 보니 어느덧 벌써 궁의 바깥이었다.

엘렌은 돌아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마차를 찾던 테리어드를 향해 말했다.

“테드.”

“응?”

“조금 무례한 부탁인 것을 알지만…… 당분간 체셔 저에 머물러도 괜찮을까요? 백작 부인께 인사를 드리지 못한 지가 너무 오래되었네요.”

그녀의 말에 테리어드가 환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분명 어머니께서도 네가 온다면 기뻐하실 거다. 방은 옛날처럼 스파니엘의 옆방이 좋겠지?”

“방이야 어디든 준비해 주시는 곳으로 쓰면 된답니다. 그보다, 오늘은 저만 가지만 조만간 전하께서도 인사차 한 번 들르실 거예요.”

“아……. 전하께서?”

테리어드가 정말이냐는 듯 케이든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케이든이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물었다.

“……언제부터 내가 그런 약속이 있었습니까?”

“아마, 방금?”

엘렌이 웃으며 말하자 케이든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 휘둘리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었던 탓이다.

“영애. 미안하지만 내가 지금 황궁 바깥으로는 거동이 그리 자유롭지 못해서.”

“아, 마치 이전에는 자유로우셨던 분이었다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그건 아니지만…… 아니, 지금 이 연금 사태가 누구 때문에 벌어졌는데!”

케이든이 기가 막혀서는 소리쳤다.

“일단 제 탓은 아닌 것 같군요.”

“그동안 탈출을 밥 먹듯이 하며 모든 신뢰를 말아먹은 전하?”

“경!”

테리어드가 빈정대자 케이든이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저를 찌를 듯한 눈빛에 테리어드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자, 케이든은 엘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웃음기 머금은 눈동자가 보인다.

고운 반달 사이로 숨은 보랏빛이 제법 어여쁘다.

‘참자.’

자그마치 5억 골드다.

5천만 골드의 10배다.

당초 다짐의 10배만큼은 상전으로 모셔 드려야 했다.

“……언제, 왜 부르는 건지나 좀 들어 봅시다.”

“일전의 하역장 조사에 대한 결과가 나오면, 그 결과의 공유 및 이후의 계획 상의를 위해 한 번 정도는 회의를 해야 하니까요. 그러니 정 안 되면 짐짝처럼 실려서라도 나와 주세요.”

상큼하게 하는 소리에는 또 이렇다 반박할 만한 말이 없었다.

결국 케이든은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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