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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22화 (22/128)

<22화>

케이든 이스타지오, 허례허식이 귀찮은 황태자는 오늘 아주 기분이 이상했다.

그는 매년 사교 시즌이 시작될 때면 치장하느라 쓰는 시간도, 친하지도 않은 이들 앞에서 계속 웃고 있어야 하는 것도 모두 싫어 아침부터 신경이 곤두서 있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분명 잘 어울리겠지.’

어째 오늘은 연회장에 있을 여자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시간이 훅훅 지나갔다.

‘다른 이들도 나만큼이나 놀랄 게 분명해. 저 여자가 저런 면모도 있었어, 하면서.’

그는 제 얼굴에 대어지는 이런저런 액세서리들을 쳐다보았다.

“아, 견장 장식은 그걸로 하지.”

맞춰 입는 건 곤란하겠지만, 그렇다고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면 곤란하지.

그는 제가 선물한 드레스에 맞추어 어울릴 만한 액세서리들을 골랐다.

그 여자는, 엘렌 크라이언트는 정말 탐이 나는 인재였다.

그 과감한 판단력과 실행력이란!

하지만 그러면서도 역시나 가슴 한구석에서 찜찜하게 올라오는, 그러니까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모습들이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크레센트에게 붙게 두었다간 분명 곤란해지겠지.’

그것은 이번 하역장 사건만 보더라도 그랬다.

적어도 초석 광산은, 드러내는 것보다는 숨기는 것이 훨씬 이득인 패였으니까.

그녀가 없었다면 후일 예상치 못한 머스킷 부대를 마주하고 큰 피해를 입어야 했을 것이다.

그녀에 대해 알아가야 할 것은 많겠지만, 어쨌든 확실한 것은 반드시 제 옆에 붙잡아 두어야 할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앞으로 크렘벨과의 불화가 불거질 테니, 지금부터 가문 간의 친밀함을 부각시켜 두는 게 나을 테지.’

그러니 인사는 충분히 친밀해 보이게.

“끝났나? 그럼 이제 가지.”

그의 머리를 만지고 있던 시녀가 손을 떼자마자 케이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시종장이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 그를 미심쩍은 얼굴로 쳐다보았다.

“전하? 오늘은 웬일로 일찍 걸음을 두십니까?”

케이든은 괜히 혼자 움찔해서는 톡 쏘아붙였다.

“자네야말로 오늘 나한테 왜 그러나? 이만큼 치장했으면 됐지, 뭘 더 하라고 그리 말하는지.”

그래, 내가 오늘 좀 들뜨긴 했지.

그는 시종장의 눈길을 피하며 속으로 제 이상 상태를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을 저이에게 굳이 말해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예……. 그냥 어서 가시지요.”

그냥 그와는 대화를 포기하겠다는 듯 한숨을 쉰 시종장은,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는 몸을 옮겨 문밖으로 나갔다.

“흠, 흠.”

괜히 멋쩍었던 케이든은 헛기침을 하며 제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시종장의 앞을 지나쳤다.

시종장이 그의 빠른 걸음을 쫓아 종종 그의 뒤를 따라 나왔다.

오늘의 목표는 크라이언트와의 친분을 확실히 보이고, 지원금에 대해 상의하는 것.

그 외의 것에는 절대 휘말리지 않으리라.

그는 굳게 다짐하며 연회가 열리고 있는 홀로 들어섰다.

들어가자마자 목표물이 어디 있나 물색하려던 그는, 회장을 한 번 휘둘러보기가 무섭게 그녀를 발견하고 말았다.

‘……드레스가 확실히 튀는군. 다들 가벼운 봄빛인데 혼자만 강렬해서인가.’

인사를 나누는 순서도 꽤나 중요하다.

그가 오늘 일부러 일찍 입장한 이유는, 늦게 와서 다른 공후들을 무시하고 엘렌에게 가는 것보다는 애초에 일찍 들어가 먼저 인사를 나눠 버리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녀와 가장 처음 인사할 테니까.

그런데 가까이 가다 보니, 그냥 담소를 나누는 중인 줄 알았던 여인들의 기색이 심상치 않았다.

보아하니 부인들 간의 기 싸움이라도 하는 중인 듯했다.

‘오호라. 이거 재밌겠는데. 크라이언트 영애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있을지 궁금하군.’

그는 금세 호기심으로 들떠서는 그녀들이 떠들고 있는 곳을 향했다.

주변에서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려 다가오자, 그는 이따 찾아가겠다는 손짓을 해 가며 그녀들의 곁으로 조용히 접근했다.

“부인. 내가 괜찮은 의사라도 알아봐 줄까요? 아무래도 기억력에 문제가 있어 매일같이 보는 드레스의 유행까지도 잊은 모양인데, 내가 걱정이 되어서 그래요.”

“그러게 말이에요. 그렇다면 저는 괜찮은 의상실을 알아봐 드릴 수 있답니다. 제가 관리하고 있으니 상품의 질은 장담해 드릴 수 있지요.”

오, 그러니까 내가 선물한 드레스가 문제란 말이지?

그는 아주 빠르게 핵심을―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들의 본의 아닌 제 험담을― 짚어 내었다.

‘마침 크라이언트에게는 도움을 청해야 하는 입장이겠다, 이게 조금쯤은 도움이 되겠지.’

케이든은 예상치 않게 주어진 행운에 기뻐했다.

“내 안목이 그리도 형편없나?”

“전하!”

“어멋, 전하!”

“유행도 모르고 선물한 내가 죄인이군그래.”

“전하, 그것이 아니옵고…….”

그는 눈앞의 여인들이 무어라 말을 하든 엘렌의 낯을 흘끗흘끗 살피느라 바빴다.

이 정도면 될까? 조금 더 몰아붙여 주는 것이 좋을까?

그가 엘렌을 신경 쓰며 한 마디 한 마디 뱉을 때마다, 그녀는 화사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행이다. 마음에 든 모양이군.’

그는 결과물이 좋아 보이자 본인도 만족해서는 씩 웃어 보였다.

‘일단 기분이 좋으면 그만큼 이야기도 조금 더 수월히 풀리겠지.’

그렇게 그가 지원금에 대해 말을 꺼낼 타이밍을 재고 있는데, 한쪽에서 그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전의 공후 회의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찾아온 포트 후였다.

그는 일단 후작과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 놓은 뒤 엘렌을 찾아오기로 하고는 잠시 자리를 옮겼고, 그렇게 한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이었다.

체셔 경이 다급히 그를 향해 달려왔다.

“전하!”

“경? 크라이언트 영애는 어쩌고 여기에…….”

길리언의 접근을 막아 보라고 붙여 놨더니 여기엔 왜 혼자 와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곧장 들려왔다.

“크렘벨 공께서 지금 크렘벨, 아니 크라이언트 영애를 끌고 테라스로 들어가 나오질 않고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감히 황태자의 말을 자르고 나온 그의 말에, ‘어어, 이것 봐라?’ 하던 케이든은 이어진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가문의 일이라며 선을 긋고 심지어 트라이아 부인까지 무시한 채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렇게 나오면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이…….”

“가지.”

케이든은 곧장 테라스를 향했다.

‘길리언이 이대로 그녀를 데리고 돌아가기라도 하면 나는 망한다.’

그녀와의 협상에 실패해 자금 원조를 얻지 못한다면 그는 정말 곤란해졌다.

케이든은 곧장 걸어가 크렘벨이 들어갔다고 하는 테라스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곳엔 냉랭한 분위기의 두 남녀가 있었다.

“아, 여기 있었군.”

그는 길리언을 제 둘도 없는 친우라 생각하던 때와 같은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평소와 같은 것은 그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정리할 것이 조금 있어서 잠시 뒤에 제가 찾아뵙지요.”

길리언이 지금 이 상황에 끼어들지 말라는 간접적인 축객령을 뱉었다.

저는 당신의 충실한 심복이라 말하며, 제 무해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황태자의 말이라면 항상 따랐던 그 길리언 크렘벨이.

“아……. 그래, 그렇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럼 파티가 지루해서, 나는 부인과 먼저 연회를 즐기고 있도록 하겠어. 자네는 생각이 조금 정리되면 찾아와 줘.”

그 미묘한 차이에서 어떠한 경계를 읽어 낸 케이든은, 그의 눈앞에서 엘렌의 손을 잡았다.

엘렌은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잡았고, 그는 곧 안도와 함께 찾아온 씁쓸한 고소와 함께 그곳을 빠져나왔다.

* * *

“별로 기분 좋을 일들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대는 표정 관리에 능하군요.”

케이든이 그녀의 얼굴을 흘끗 내려다보며 말했다.

“후후, 전하께서 모르셔서 그렇지 좋은 일은 충분히 있었답니다.”

엘렌이 웃으며 답하자 케이든은 장난기 어린 눈으로 그녀를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이를테면 내가 가서 난장을 부려 준 것?”

“물론 그것도 포함해서 말이지요.”

엘렌이 화사한 미소와 함께 감사를 전했다.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전하.”

그녀가 장난에도 쉬이 넘어오지 않자, 케이든은 곧 흥이 식은 얼굴로 다시 정면을 보았다.

“전하께서는 제가 지금 웃고 있는 것이 신기하신 모양이군요.”

“뭐, 이 바닥 처세야 다들 그렇지요. 포커페이스.”

그가 제 얼굴을 한 번 슥 손으로 훑었다.

그러자 엘렌이 쿡쿡 웃으며 말했다.

“원래 사람 속이란 알 수 없는 것이지요. 이렇다 생각하면 저렇고, 저렇다 생각하면 이렇고.”

그녀는 제가 비싸게 주고 얻은 인생의 교훈이라며 전하께서도 새겨들으시란 농을 던졌다.

분명 쓴맛을 제대로 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일 텐데도,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것이 못내 신경 쓰였던 케이든이 그녀에게 물었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그 말에 엘렌이 의외라는 듯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렇게 보아도 저 미소가 진실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알 수가 없다.

‘일단 몸이라도 움직이면 그래도 기분이 좀 나아지니까―’

그러면서 눈치를 보다, 오늘의 용건을 슬쩍 꺼내 보는 거다.

“권하신다면 기꺼이.”

엘렌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

두 사람이 홀의 중앙으로 다가가자, 무대의 주인공을 인식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옆으로 움직여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흘끔흘끔 그들을 곁눈질하는 것으로 보아 아까 있었던 사건들이 제법 궁금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들이 중앙에 서자 곧 악공들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홀을 채우는 음악 소리에 맞추어 두 사람은 사뿐히 첫발을 내디뎠다.

서로 스텝을 맞추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생각보다 능숙하시군요.”

엘렌이 작은 탄성과 함께 말했다.

케이든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거 칭찬입니까?”

“아무렴요. 평소 춤을 즐기시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던지라 드린 말씀이랍니다.”

“즐기지 않는데 못하기까지 하면 이 자리에 그리 오래 못 있습니다.”

“그거 언젠가 들어 본 말이군요.”

케이든이 엘렌을 힘 있게 당기자 엘렌의 치맛자락이 곱게 곡선을 그렸다.

빙그르르, 엘렌이 다시 반 바퀴를 돌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 반동에 케이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역시 자신이 보는 안목은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부드러운 몸의 곡선을 따라 나부끼는 드레스만큼이나 고운 호선을 그렸다.

“영애.”

“네, 전하.”

“내가 부탁이 한 가지 있는데. 일단 화내지 말고 들어줄 수 있습니까?”

그가 눈치를 보다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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