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아하.”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겠다는 듯 트라이아 부인이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것이, 저희가 아직 안목이 부족하여…….”
“이상하네. 디자인만 문제가 아니라 상품의 질 운운하던 이야기도 들었던 것 같은데.”
그들의 행태를 보고 있던 스파니엘이 비웃음과 함께 툭 말을 던졌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말도 분명 들었던 것 같군요.”
엘렌이 대수롭잖은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긍정하자, 트라이아 부인의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
오세먼 부인이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트라이아 부인의 눈길을 피했다.
“일단 저희의 목표는 이 드레스만큼이나 우수한 질을 뽑아내는 것인지라, 저는 부인께서도 분명 만족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답니다. 어떠신가요?”
트라이아 부인이 오세먼과 페리윙클을 빤히 쳐다보며 대답했다.
“고맙게 받을게요.”
“수도의 저택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때 케이든이 그녀들 사이로 슬쩍 끼어들며 말했다.
“나는 어떻습니까?”
“네?”
“나도 홍보 모델로서는 제법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아……. 드레스 말씀이신가요?”
엘렌이 진심이냐는 듯 묻자 그가 눈썹 한쪽을 팍 찡그러뜨렸다.
“……남성복의 이야기입니다. 함께 취급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 물론이지요. 준비되어 있답니다.”
엘렌이 활짝 웃었다.
“이리 대단한 분들을 모시게 되다니 정말 기쁘네요. 이번 시즌은 무언가 잘 되려는 모양입니다.”
엘렌이 손을 모으며 말하자 케이든이 크흠, 하며 한 번 헛기침을 했다.
‘……대뜸 황실 디자이너를 두고 탈리아에서 옷을 맞추겠다고 해?’
스파니엘은 그런 케이든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다, 또다시 툭 한마디를 던졌다.
“그 남성복, 테드 것도 추천해 줄 수 있어?
“물론. 추천 카탈로그를 만들어서 보내 줄게.”
그러자 테리어드가 걱정 섞인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괜히 일 늘릴 필요 없이 네 취향대로 적당히 골라서 보내 줘도 돼, 엘렌. 너 바쁘다며.”
“그 적당히 고르는 작업이 더 시간이 들걸. 누구나 자네처럼 아무거나 휙휙 집어 입지는 않아.”
“아, 그렇습니까……?”
케이든이 가소롭다는 듯 흥, 하는 콧바람을 뱉었다.
“괜찮아요. 일이라기보다는 취미에 가까우니까.”
엘렌이 쿡쿡 웃자 테리어드가 머쓱한지 고개를 돌렸다.
케이든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던 스파니엘이 무언가를 더 물으려던 차였다.
“전하, 오늘도 번듯하십니다.”
황태자가 한곳에서 계속 머무르고 있자, 용건이 있는 이들이 그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아, 포트 후. 그대가 웬일로 이렇게 화려하지?”
“하하, 그럴 만한 파티니까요.”
그는 그곳에 함께 자리한 트라이아 공작 부인에게 시선을 두었다.
서늘하게 짓는 미소가 살벌했다.
‘일전의 회의가 어지간히 신경 쓰였던 모양이군.’
결국 한 수 접어들어 가는 모양새를 보여 주게 된 게 못내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었다.
고지식한 만큼 충성도가 높은 것은 좋은데, 이런 점이 참 피곤하다.
케이든은 그를 달래 주러 가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그럼 다음에 봅시다, 영애. 선물 기대하지요.”
“네. 기대하셔도 될 겁니다.”
그들이 멀어지자, 트라이아 부인도 자리를 옮길 생각이었는지 가벼운 인사를 꺼냈다.
“후후, 어쨌든 즐거웠어요. 부인의 성이 크렘벨인 것이 아쉽네요.”
“저 또한 그렇답니다.”
엘렌이 후후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이 이름은 내려놓기로 했지요.”
“음?”
“저, 이혼 예정이랍니다.”
아쉴리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혼?
작은 소리로 엘렌의 말을 되풀이한 그녀는,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말을 제대로 받아들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여러모로 놀라울 따름이네요. 조만간 크라이언트의 이름을 돌려받게 되면, 그대를 정식으로 초대할게요.”
이로써 그녀의 이혼설은 사교계의 뜬소문이 아닌 신빙성 높은 사실이 되었다.
게다가 트라이아 부인에게는 확실히 호감을 산 듯했다.
엘렌은 만족스레 웃었다.
“즐거이 기다리고 있지요, 부인.”
그런데 그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치고 들어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누구 마음대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짜증이 가득 묻은 목소리.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길리언 크렘벨.
현 크렘벨 공작이자 아직 그녀의 남편인 이였다.
엘렌은 길리언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답했다.
“제 마음대로지요.”
“……잠깐 이야기 좀 하지.”
길리언은 그리 일방적으로 선언하고는 성큼성큼 다가와 엘렌의 팔을 낚아챘다.
“윽!”
“꺄악!”
“무슨 짓입니까, 크렘벨 공작 각하!”
스파니엘이 작게 비명을 질렀고, 곁에서 보고 있던 테리어드가 화가 나 외쳤다.
그러나 길리언은 그녀의 신음도 체셔 경의 외침도 무시하고는 말했다.
“가문의 일이다. 외부인은 빠지도록.”
꽈악.
엘렌의 손목을 움켜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크렘벨 공. 여인들의 대화 시간은 조금 존중해 주심이 어떠십니까?”
“방금 말했듯, 가문의 일입니다.”
트라이아 공작 부인의 제지까지 무시해 버린 길리언은, 그대로 파티장을 등진 채 제 완력을 무기 삼아 엘렌을 끌고 나갔다.
그런 길리언의 행동에 엘렌은 헛웃음을 지었다.
평소라면 황제가 입장하기 직전쯤에나 연회장에 들어왔을 그였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이미 그가 와 있었고, 이번 무도회에서는 언제나처럼 주요 인사 몇몇과만 인사를 나눈 뒤 자리를 비울 생각은 아닌 듯 보였다.
아주 의외인 상황이었지만 그뿐.
‘이리도 사람이 그대로라니.’
엘렌은 속으로 혀를 찼다.
어차피 완력으로 반항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가지고 있는 것 중 방법을 찾으면 그만.
쾅!
테라스의 문이 닫히자마자 길리언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크라이언트 백작은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보는 눈이 사라지자, 길리언은 이제야 저를 구속하는 것이 사라졌다는 듯 사납게 말했다.
엘렌은 제 차림을 보라며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여러모로 공사다망하시지요. 보시다시피, 이번 시즌의 유행을 따라가느라.”
길리언의 시선이 잠시 그녀를 훑었다.
하지만 그는 그 말에 수긍하기보다 제가 못마땅한 바를 지적하는 것을 택했다.
“하, 일 처리를 이런 식으로 하는 가문이라니. 게다가 그 꼴은 대체 뭐지?”
그리 말하는 그의 표정은 언짢음을 노골적으로 내비치고 있었다.
그 행태가 가증스러웠던 엘렌은 픽 웃었고, 그녀가 이리 반응하는 것에 대해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았던 길리언의 얼굴에는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성실하시기 때문에 이만큼이나 해내신 게지요. 그리고 제 차림에 대해선, 전하께 직접 여쭈면 아주 자세히 설명해 주실 것 같군요.”
엘렌은 제 얼굴 위로 보란 듯이 미소를 올렸다.
이 상황에서는 그것이 눈앞의 남자를 가장 자극할 것을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길리언의 미간이 종이가 우그러지듯 구겨졌다.
“……전하께서 직접 선물하셨다는 말이 나오던데.”
“다 알면서 물으시다니, 제법 짓궂은 구석도 있으셨군요. 처음 알았네요.”
“네가 아무리 헛소리를 해도 넌 아직 크렘벨이다. 의상은 더 정숙한 것으로 갈아입도록 해. 그리고 어디 더 돌아다닐 생각 말고 얌전히 내 옆에 있어.”
저 강인한 눈매가 멋지다는 생각을 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저 눈에 담긴 것은 책임감과 인내가 담긴 강인함이 아닌, 제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분노일 뿐이었다.
“아, 제 행동에 불만이 있으시면 저와 이혼 후 공을 만족시킬 새로운 부인을 맞아들이시면 되겠군요.”
엘렌이 제 말에도 아랑곳 않고 말하자, 길리언은 한 차례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차마 이곳에서 소리를 칠 수가 없어 꾹꾹 눌러 담는 모양새로 입을 열었다.
“……하, 심각해. 아주 심각하군. 이 이상 널 바깥에 뒀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어. 오늘 당장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그때였다.
똑똑, 짧은 노크가 울린 뒤 벌컥 테라스의 문이 열렸다.
“아, 대화는 끝났나?”
감히 공작이 닫은 문을 함부로 열고 들어갈 수 있는 신분의 사람.
황태자 케이든 이스타지오였다.
“자네가 내게 인사도 없이 바깥으로 뛰쳐나가기에.”
케이든이 씩 웃으며 테라스로 걸어 들어왔다.
엘렌은 열린 문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체셔 경과 그 주변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안사람과 나눌 이야기가 조금 있었습니다.”
길리언은 제가 언제 그렇게 화를 내었었냐는 듯, 구겨져 있던 미간을 순식간에 다시 펴고는 말했다.
평소와 같은 무표정.
제 속내를 감춘 이에게 케이든은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하하, 아직 이야기 중이었던 모양이야. 자네가 없으니 찾게 되지 뭔가. 내가 시간이 별로 없어서 그러는데, 가서 나랑 한잔하지. 우리 꽤 오랜만에 보잖나.”
“죄송합니다, 전하. 생각을 정리할 것이 조금 있어서…… 잠시 뒤에 제가 찾아뵙지요.”
길리언이 그의 제안을 슬쩍 피해 갔다.
여기서 엘렌과 담판을 지어야 더는 시끄러운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었지만, 상황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 그래, 그렇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럼 파티가 지루해서, 나는 부인과 먼저 연회를 즐기고 있도록 하겠어. 자네는 생각이 조금 정리되면 찾아와 줘.”
“전하?”
길리언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반문했다.
하지만 케이든은 그 말은 듣지 못한 척 엘렌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엘렌은 그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영광입니다, 전하.”
그러게 잔머리를 쓰려면 제대로나 써야지.
비웃음 어린 시선이 머물렀지만, 길리언은 눈치채지 못한 듯 그의 시선을 맞잡은 두 남녀의 손에 붙박아 둘 뿐이었다.
“그럼 안녕히, 각하.”
피식 새는 듯한 웃음소리와 함께 떨어진 인사는 상황에 종지부를 찍었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은 닫혔고, 테라스에는 길리언 혼자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