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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10화 (10/128)

<10화>

열어본 편지의 첫머리는, 가벼운 인사말과 함께 남겨진 ‘면목이 없습니다.’였다.

“……그래, 그런 것 같군.”

아무래도 제 부인이 바깥에 있는 동안 백작에게 연통을 넣었던 모양이었다.

면목이 없는 것을 알면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어야지.

그리 생각한 길리언은 읽던 편지를 접어 한구석에 던져두고는 말했다.

“마침 잘 됐군. 백작이 여기 있으면 그 여자도 더는 다른 생각을 못하겠지. 곧 내려가겠다고 전해라.”

“예, 주인님.”

길리언은 옷매무새와 제가 흩뜨린 머리칼 등을 정리하며 백작에게 전할 말들을 정리했다.

당신의 딸이 제정신이 아니다, 내게 감히 무슨 이야기까지 꺼냈는지 아느냐, 바로 이혼을 하잔다…….

그러면 분명히 백작은 펄쩍 날뛰며 그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냐 외칠 것이다.

이 결혼은 분명히 제게도 필요한 일이었지만, 훨씬 더 안달복달하며 매달렸던 것은 크라이언트 백작이었던 것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어서 오시지요, 크라이언트 백.”

“공,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저번 신년 연회였으니 그리 오랜만이라 말할 정도도 아닙니다.”

백작의 인사를 딱 잘라 내는 것으로 자신의 심기가 불편함을 드러낸 길리언은, 고갯짓으로 위층을 한 번 가리키며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방금 우편국에서 온 편지를 확인하고 내려오는 길입니다. 문제가 생긴 것은 맞지만, 고작 사과를 위해 백작이 여기까지 행차할 필요는 없었는데…….”

이렇게 말하면 얼굴에 화색을 띠면서 더욱 고개를 조아려 오겠지.

그러고는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며 비굴하게 선처를 빌 것이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백작이 만면에 미소를 띠며 두 손을 모아 말했다.

“공께 폐를 끼쳐 송구한데, 제가 어찌 그리 안면몰수하고 지낼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찾아뵈어 말씀을 드려야지요.”

그럼 그렇지.

예상에서 한 치도 빗나가지 않은 그의 행동에, 길리언은 비웃음이 잇새로 새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부인의 미친 짓은 이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제 자신은 나중에 이 일을 빌미로 크라이언트 백작에게 선물이라는 명목의 돈을 받아 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적당한 몇 마디와 함께 백작을 돌려보낼 생각을 하고 있는 길리언의 귀에,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딸이 그렇게 말썽을 부려서야 아비 된 자로서의 체면이 서지 않는 법이지요. 제가 덜 가르친 탓입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제가 그 아이를 데려가 다시 제대로 교육을 시켜서 보내겠습니다.”

“……데려간다고?”

“예. 서간을 보셨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미리 언급한 바 있지만, 제가 잘 달래고 가르쳐서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백작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했다.

길리언의 낯에 미세한 실금이 갔다.

저 여자를, 누구 맘대로 다시 꺼내 간다고?

하지만 평소라면 그런 상대방의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차렸을 백작은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제 할 말만 하기에 바빴다.

“공, 이것은 제 성의입니다.”

다니엘이 손짓하자, 뒤에서 대기하던 인원들이 무엇인가 짐들을 들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길리언은 골치 아프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이것은?”

“수도로 올라온 김에 이것저것 살펴보다 발견했지요. 수준이 제법 괜찮지 않습니까? 제가 거두어 투자할 예정이라 공께도 한 번 선보여 드리고자 가지고 왔습니다.”

그가 그리 말하며 가리킨 것은 아주 세밀하게 조각된 매의 조각상이었다.

“……그러면 저것들은?”

“아, 엘렌에게 줄 드레스들입니다. 자고로 사람을 움직이는 데는 채찍과 당근이 함께 가야 하는 것인지라…….”

그는 산더미 같은 선물을 소개하는 것이 하필 딸의 교육 운운한 직후라는 것이 겸연쩍었는지, 조금 민망한 얼굴로 변명을 붙였다.

“엘렌이 북부에 들른 지는 오래되어 한 번 맞출 때도 되었기도 하고 말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북부.”

거기까지 들은 길리언은 밀려오는 두통에 제 관자놀이를 짚었다.

크라이언트 백작이 제 딸이 북부에서 입을 드레스를 구매해 갔다.

그것도 크렘벨 공작에게 보낼 선물까지 사 들고서.

이제 상가에는 소문이 돌 것이다.

크라이언트 백작의 딸 사랑이 지극하구나. 북부에서 입을 드레스를 구매하다니, 크렘벨 부인이 모처럼 친정 나들이에 나서겠구나…….

엘렌을 저택 바깥으로 내돌릴 생각 따위 전혀 없었던 길리언으로서는 생각지도 않게 맞닥뜨린 변곡점이었다.

‘예정에는 없던 일이지만, 냉정히 따지면 딱히 손해랄 것은 없는 일이다.’

길리언은 짜증이 치솟는 것과는 별개로 침착히 계산기를 두드렸다.

일단 영지민들과 주변 귀족들로부터는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겠지.

가문 간의 단단한 결속을 자랑할 수 있는 일 또한 될 것이다.

그리고 저 여자 또한 지금은 저택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저러고 있지만 친정을 다녀오면 조금 괜찮아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적어도 여기에서 크라이언트 백작의 청을 거절하며 그를 빈손으로 돌려보낸 뒤, ‘크렘벨 공작 부인은 저택 내에 감금당했다’라는 소문이 퍼지는 것보다는 백번 나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길리언은 곧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 좋습니다. 백의 면을 보아 그리하도록 하지요.”

“앞으로 신경 쓰실 일 없도록, 잘 해결해 보이겠습니다.”

“부디 그러길 바라지요. 제임스!”

“예.”

“가서 부인을 모셔 와라.”

“……예.”

제임스는 힘없이 대답하며, 만약 자신이 주인마님께 귀족 모독죄로 고발을 당한다면 주인님께서는 자신을 감싸 주실까, 하는 생각을 했다.

* * *

“마님.”

“이딴 곳에 가둬 놓고 왜 또 찾아왔는지 모르겠군.”

역시나 공작 부인은 아주 날이 서 있었다.

싸늘한 일갈에 제임스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것이 아니고…… 부친 되시는 크라이언트 백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예. 지금 나가 보셔야 합니다.”

“넣을 땐 언제고 이제는 다시 나오라? 물건 취급도 신물 나지만, 그 공작의 명령이라는 것도 참으로 변덕스럽구나.”

“…….”

제임스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여 보였다.

1층 응접실로 내려가자, 그녀가 오길 기다리고 있던 크라이언트 백작이 아주 반가운 기색으로 외쳤다.

“엘렌!”

“아버지. 오셨다는 말씀을 듣고 내려왔어요.”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갈 듯했던 백작은 딸의 차분한 태도에 저도 금방 조용해져서는 말했다.

“아, 그래. 그렇지.”

그러고는 제가 언제 그러했냐는 듯, 차분한 미소와 함께 길리언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럼 공, 저희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러십시오. 멀리 나가지 않겠습니다.”

길리언은 엘렌이 서 있는 방향을 지그시 보았다.

엘렌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시선이 맞닿자마자, 엘렌은 보기도 싫다는 듯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길리언이 으득, 이를 갈고는 말했다.

“……부디 빠른 시일 내로 문제를 해결해 주길 바랍니다.”

“물론입니다. 그럼 공, 다음에 뵙지요.”

인사를 마무리한 백작은 엘렌의 손을 잡고 나오며 공작의 집무실 문을 닫았다.

이제 복도에는 크라이언트 부녀와 그들을 안내할 집사, 제임스만이 남아 있었다.

두 부녀의 눈이 마주쳤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엘렌이었다.

“아버지. 그럼 출발할까요?”

“당장 떠나자꾸나. 어서 가자.”

크라이언트 백작은 한시바삐 이런 곳을 떠야겠다는 듯, 딸의 손을 잡아 세게 이끌었다.

언뜻 보기에는 연행되듯 끌려 나가는 모양새였지만, 정작 끌려 나가고 있는 그녀의 입가에는 아주 상쾌한 미소가 달려 있었다.

* * *

짧은 마차 여행을 지나 보내고, 크라이언트 부녀는 크라이언트 영주성에 도착했다.

엘렌은 새삼스러운 감회에 젖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 년이고 일기장의 잉크로만 그렸던 고향이었다.

겨울 명소로 유명한 새하얀 성.

비록 기억 속 눈 내린 풍경은 아니었지만, 봄빛 머금은 싱그러운 초목들이 푸르러 여전히 아름다운 곳이었다.

영주성의 문이 열리자 옅은 풀 내음을 향수 삼아 살아온 노년의 사내가 도착한 이들을 반겼다.

“오셨습니까, 주인님. 아가씨.”

나직한 목소리가 울리자, 제 주의를 끈 이를 향해 엘렌의 고개가 돌아갔다.

목소리의 주인을 본 엘렌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녀는 노인에게 뛰어들며 외쳤다.

“해리!”

“어이쿠 아가씨! 여태 그리 부르십니까!”

젊음과 생기 대신 세월이 새겨진 얼굴.

그녀를 걱정하느라 파인 미간의 주름, 그녀를 챙기느라 거칠어진 손끝.

주름이 제법 져 빈말로도 잘생겼다 말할 수는 없는 낯이었지만, 엘렌이 사랑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었다.

“나이도 다 차신 분께서 그러시면 안 되십니다!”

“괜찮아, 해리슨. 뭐라 할 사람도 없으니.”

“아가씨.”

해리슨이 한숨을 쉬자, 다니엘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저 반가우니 그런 게지.”

해리슨의 품에서 떨어져 나온 엘렌은 이번엔 저를 반기러 나온 시녀를 껴안았다.

“샐리. 그동안 잘 지냈어?”

집사의 뒤에 가만히 서 있던 샐리는 느닷없이 엘렌의 품으로 끌어당겨졌다.

그러면 보통은 놀라서 한마디 할 법도 하건만, 샐리는 오히려 차분히 엘렌을 마주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가씨. 잘 돌아오셨어요.”

“응.”

엘렌의 대답 또한 담담했다.

서로의 등을 두드리는 토닥임이 몇 번인가 이어지고, 곧 두 사람은 서로를 품에서 놓았다.

결혼 전 보드라운 뺨이 발그레한 소녀였던 그녀는 이제 몸도 마음도 메마른 여인이 되었다.

엘렌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돌아왔어.”

그녀는 저를 만든 이 공간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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