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1층 로비로 내려가자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공작의 집무실이 있는 3층 청소를 맡고 있는 앨빈이었다.
그녀가 북적이는 로비에서 곧장 아는 얼굴을 찾아낼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 아는 얼굴이 그녀가 1층으로 들어서자마자 시선을 내리꽂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앨빈은 그녀가 코앞에 다다를 때까지도 연신 쳐다보기만 할 뿐, 이렇다 할 어떤 인사 한마디도 건네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원래도 무례한 것들이었지만 오늘은 특히 정도가 심했다.
그 행태를 보던 엘렌이 결국 마지못해 입을 열어 말했다.
“뭘 멀뚱히 보고만 있는 겐가, 마차 있는 곳으로 안내하지 않고.”
그러자 갑자기 앨빈이 고개를 홱 쳐들었다.
그는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용수철이 튕겨 오르듯 튀어 올라서는 말했다.
“죄, 죄, 죄송합니다, 마님! 그럼 모, 모시겠습니다.”
앨빈은 지금 한껏 긴장하고 있던 속을 누군가가 발로 뻥 차 버린 듯한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멀찍이서 붉은 드레스의 매혹적인 여인이 다가오기에, 어느 가문의 영애일까, 주인님을 수행하는 시종은 매번 파티에서 저런 영애들을 보는 거겠지, 따위의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고 있던 그는, 그 영애가 제게 계속 가까워지자 내심 긴장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꿀꺽.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고, 아름다운 여인이 꼭 자신에게 용건이 있는 것처럼 다가오니 도대체가 태연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곧이어 그 영애가 그에게 말까지 거니, 그가 놀라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정작 그가 눈을 홉뜬 이유는 그 아름다운 여인이 제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가장 놀란 것은 저 여인이 바로 크렘벨 공작 부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앨빈은 당황했다.
이 사람이 제가 알던 마님이 맞는가 싶었다.
하지만 또각또각, 흐트러짐 없이 맵시 있고 우아하게 걷는 저 영애는 분명 그가 모시던 공작 부인이 맞았다.
앨빈이 그 당혹감에서 빠져나오는 데는 그 이후로도 한참이 걸렸다.
그런데 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런 무례한 반응을 보인 것이 그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공작저에 도착하면서부터 마주치는 모든 이가, 그러니까 입구의 경비병부터 저택의 시녀들까지의 모두가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했다.
그동안의 공작 부인은 교양 있는 몸가짐, 현숙한 안주인이란 이름에 걸맞게 검소한 무채색 계열의 드레스를 입어 왔으며, 짙은 화장을 한 모습은 당연히 보이지 않았고, 구두 또한 단정한 것만 신어 왔었다.
그러니 지금 눈앞에 있는 저 여인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누가 저 화려하고 부티가 나는 여인을 두고 크렘벨 공작 부인이라고 하겠는가.
그들이 알던 공작 부인은 언제나 단정하고 절제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감상이 어찌 되었든 간에, 그래도 남들보다는 그 당혹을 빨리 겪고 빨리 빠져나왔던 앨빈은 그녀를 3층의 공작 집무실까지 수행했다.
“각하, 마님께서 오셨습니다.”
그가 보고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공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앨빈이 문을 열자, 엘렌은 그를 앞질러 지나치며 공작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완전히 안으로 들어서자 앨빈은 조용히 문을 닫았고, 집무실에는 엘렌과 길리언 둘만 남게 되었다.
엘렌은 그대로 정면을 응시했다.
고개를 드는 길리언이 보였다.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은 눈썹과 딱딱하게 굳은 입매.
거기에서 느껴지는 언짢음에, 엘렌은 어렴풋이 이 사람은 오늘 그녀가 원하는 답을 던져 주지 않을 것을 예감했다.
그렇게 무슨 소리를 하려나 기다리길 잠시.
“……?”
무언가가 이상했다.
당장이라도 무어라 소리를 칠 것처럼 매섭게 고개를 들었던 그가, 어째서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키고만 있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의아하게 쳐다보던 엘렌과 길리언의 눈이 마주쳤다.
순간적으로, 그의 눈에 어떠한 동요가 스친 것도 같았다.
‘……분명 곧바로 소리를 칠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말로 서류를 준비해 둔 건가?’
엘렌은 잠시 길리언의 모습을 위부터 아래까지 훑었다.
손. 책상. 책장. 그녀의 시선이 길리언 주변의 사방을 살폈다.
그러나 어디에도 이혼 서류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대체 오늘 부른 이유는―”
“시중에 문제가 있었던 놈들은 갈아 치웠다. 문제가 있었으나 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점은 인정하지.”
……뭐라고?
엘렌의 사고가 잠시 정지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그의 시인.
‘이 사람이, 정말로……?’
그녀는 잠시 멍하니 눈앞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어 터져 나온 것은 폭발적으로 쏟아지는 수많은 물음표였다.
이번에는 어째서? 이렇게 쉽게? 지금에 와서? 대체 왜 그동안은……!
밀물처럼 밀려드는 감정의 파도에 엘렌은 어찌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당혹에 빠져 길리언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눈앞의 남자가 그녀가 알던 이가 맞는지 의심스러워졌다.
어쩌면 저이에게도 어떤 종류의 기적이 임한 게 아닐까.
아니면 원래 이리 쉬이 변할 수 있는 이였는데, 어렸던 자신의 멍청한 대처로 그런 비극이 일어나고 만 걸까.
그렇다면, 나는?
그런 상념 속에 파묻혀 있던 그녀를 현실로 꺼낸 것은, 길리언의 목소리였다.
“앞으로 사용인의 관리에 대해서는 네게 권한을 맡기지. 혹 또다시 이런 불만 사항이 생기면, 이렇게 피곤한 잡음 만들지 말고 저택에서 나랑 직접 이야기하도록 해.”
그리 말한 길리언은 이제 제 할 말은 끝났다는 듯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그러나 엘렌은 무어라 다른 말을 하지도, 그렇다고 자리를 벗어나지도 못한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평소 같으면 벌써 자리를 비웠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엘렌이 여전히 제자리에 있자, 길리언은 그런 그녀를 다시 흘끗 보더니 말했다.
“나가지 않고 무얼 하고 있지? 옷차림은 그게 또 뭔지 모르겠군. 설마 그것도 내게 말할 불만 사항이라면…… 저택 내에서만은 눈감아 주도록 할 테니 알아서 자중하도록.”
길리언이 손을 한 차례 휙 저으며 이제는 정말 나가라는 손짓을 남겼다.
그리고 엘렌은 그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언제나 봐 왔던, 그가 그녀와의 단절을 선언하는 그 손짓을 보고 나서야.
“……그런 권한은 새로 들이실 크렘벨 부인께 드리면 좋을 것 같군요. 오늘도 인을 찍지 못하시겠다면 전 이만 가 보도록 하지요.”
그랬다. 그가 그리 쉬이 변할 리가 없었다.
그는 결국 자기중심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며, 그 해결에 그녀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을 것이다.
괜한 기대로 잠시나마 그의 주위를 훑었던 자신이 우스워졌던 엘렌은, 이만 가 보겠다는 말과 함께 곧장 몸을 돌려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대체 무엇이 그리 불만이지? 차라리 똑바로 말을 해!”
갑자기 길리언이 책상을 쾅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적반하장으로 소리를 치며 일어난 그는 찌를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엘렌은 그저 깊게 침잠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이제는 저 얼굴을 보고도 놀라우리만치 아무런 감흥이 없다.
그런 자신을 깨달은 그녀는, 분명 옛날과 같은 것을 보고 있는데도 그를 향한 감정은 외려 기가 막히는 감정이었음을 알아차렸다.
“지금 똑바로 말하고 있는데 못 알아듣는 건 당신이 아닐까요.”
“이혼 따위를 입에 담는 것이 바른 말이라고 생각하나? 이제 보니 비뚤어진 것은 입이 아닌 머리였군.”
“당신이 불만이라고 똑바로 말씀드렸는데 당신은 귀가 비뚤어졌나 보군요. 애먼 남의 탓은 하지 마시고 공의 행동을 먼저 되짚어 보시길.”
예상치 못했던 그녀의 말에 길리언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실소하며 제 앞머리를 걷어 올렸다.
“하, 하……. 뭐? 다시 말해 봐.”
“청하시니 다시 말씀드리지요. 제 불만 사항은 당신이고, 말씀하신 대로 전 교양이 없어 크렘벨가에 있을 자격이 없으니, 그 고귀하신 명예를 위해 저와는 그만 이혼하시길.”
“그건 크라이언트 백작도 알고 있는 사실인가? 이 결혼을 추진한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군.”
길리언이 짙은 냉소와 함께 짓씹듯 말을 뱉었다.
“어차피 네가 도망갈 곳은 없다. 내가 충분히 신경 쓰지 못했던 점은 인정하지. 내 불찰을 인정하겠어. 그러니 그쯤 해 두도록 해.”
하지만 엘렌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대로 뒤돌아서며 말했다.
“……다음에 뵐 때는 서류에 인이 찍혀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엘렌 크렘벨!”
그의 외침에도 엘렌이 아랑곳하지 않고 방을 나서자, 길리언은 곧장 그의 집사를 불렀다.
“제임스!”
“예, 주인님.”
“이건 가솔들을 책임질 의무가 있는 가주로서의 명령이다. 부인을 안전하게 모셔!”
엘렌은 이제 벌어질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아버지의 염려대로, 그리고 그녀의 염려대로 길리언은 그녀를 이 저택에 가두기로 결정한 것이다.
집사는 신속하게 가문의 기사들을 불러 모았고, 엘렌은 그들의 보호라는 이름의 감시 아래 끌려 나갔다.
“……결국 떠올리는 방법이 이런 것이라니. 옛날의 제가 부끄럽군요.”
당신 같은 이를 사랑하다니.
그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그 끔찍했던 저택에 갇혔다.
* * *
똑똑.
치밀어 오른 화를 가라앉히느라 차게 식힌 음료를 마시고 있던 길리언의 귀에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도록.”
“크라이언트 백작께서 오셨습니다. 일단 1층 응접실로 모셨습니다만.”
“뭐?”
길리언은 짜증이 묻어난 어조로 반문했다.
크라이언트, 크라이언트. 근래 들어 그 이름이 그렇게 귀에 거슬릴 수가 없었다.
“뭐 하러 온 것인지는 말하던가?”
“그것이, 따님의 문제로 오셨다고…… 그리고 여기, 우편국에서 방금 온 것들입니다.”
크라이언트 백작에게 있어서 딸이라고 하면 엘렌 크렘벨 하나다.
그는 제임스가 건네는 것들을 받아 들었다.
“……크라이언트?”
가장 위에 놓여 있는 것은 크라이언트 백의 인장이 찍힌 봉투였다.
“예, 아무래도 오늘 방문하신 목적과 관계된 것이 아닌지 하여…….”
길리언은 귀찮음이 역력히 묻어나는 손길로 편지의 봉인을 뜯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