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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11화 (11/128)

<11화>

엘렌은 제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침대 위로 엎어졌다.

이불에서는 몽글몽글 꽃 비누 냄새가 피어올랐다.

깊은숨을 들이마시면 살짝 맴도는 잘 건조된 햇살 냄새와 열린 창문 사이로 날아드는 옅은 꽃향기.

자신이 평생을 그리워했던 것들.

그녀의 짐을 들고 들어온 샐리는 들어오자마자 그녀의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오시면 하고 싶으셨던 일이 있으신가요?”

먼 곳에서 샐리가 큰 소리로 그녀에게 물어 왔다.

“글쎄. 일단 지금은 그냥 집에서 취하는 휴식?”

엘렌 또한 목소리를 키워서 답했다.

“얼마 전에 정원수를 옮겨 심는 것을 보았는데. 한 번 가 보심은 어떠세요?”

“그래, 궁금하네. 날도 좋으니 오늘의 티타임은 거기서 갖도록 할까.”

“네. 곧바로 준비해 드릴게요. 곧 다시 들를 테니 쉬고 계세요.”

금세 마지막 드레스의 수납까지 마친 그녀는 탁, 탁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짐 정리를 끝내고는 방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샐리의 안내에 따라 바깥으로 나서자, 그곳엔 철 늦게 핀 동백과 매화가 흐드러진 정원이 있었다.

“아직 동백이 있구나.”

“예. 얼마 전에 옮겨 심은 것들은 매화랍니다. 홍매화 나무를 공수해 오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몰라요.”

“그러게. 구하느라 고생했겠어.”

샐리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여린 홍매와 가지를 집어 들며 말했다.

“고생은 집사님께서 하시고, 덕은 저희가 봤죠. 이렇게.”

샐리는 가지를 엘렌의 머리 옆에다 꽂은 뒤, 우리 아가씨 너무 예쁘다며 쿡쿡 웃었다.

그렇게 서로 이 꽃 저 꽃 찾아 떠들고 있는데, 뒤에서 트롤리 굴러오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나란히 뒤를 돌아보았다.

“해리!”

“어머, 집사님!”

샐리가 화들짝 놀라서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리, 그대가 여기까지 나오면 어떡해. 아버지의 곁에 있어야지.”

“그 주인님께서 저를 아가씨의 곁에 두시려는 것을요.”

해리슨이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찻잔에 향긋한 차가 차올랐고, 정원에는 세 사람이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번져 갔다.

하지만 베인 상처는 시린 물보다 따듯한 물에 더욱 아픈 법이다.

애정, 그 아늑한 온기.

그 따스한 느낌이 가슴속에 번져 갈 때마다 엘렌은 오히려 잊고 싶은 상처들이 떠오르곤 했다.

그녀가 결혼 후 처음 참석한 부부 동반 파티.

수도 중앙 귀족들의 파티라는 이름에는 설렘과 긴장을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그 홀에 첫발을 디딘 순간, 엘렌은 이곳이 제 우려보다도 더욱 냉혹한 곳임을 깨닫고 말았다.

영지와 사업 이야기가 오가고, 훨씬 내밀한 소문들이 흐르며, 친목보다는 견제가 목적인 말들이 쉴 새 없이 빈틈을 노리는 곳.

그런데 그런 곳에서 제 남편은 시종일관 자신감 넘치는 낯을 하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만나는 사람들이 그들의 결합에 대해 은근히 떠보더라도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자신은 그의 그런 점을 동경했던 것이라고, 엘렌은 씁쓸히 웃으며 생각했다.

이 남자는 참 멋진 사람이라고, 저도 이 사회에 섞여 들어 반드시 그의 도움이 되고 말리라고.

그런 생각들을 했었으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길리언은 그녀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당부한 것은 딱 한 가지. 그의 옆에 가만히 있을 것.

그것이 그의 배려 같아서, 그녀는 무뚝뚝한 얼굴의 남편이지만 제법 의지가 된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하여 엘렌이 그와 함께 이리저리 인사를 다니던 중이었다.

그가 막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귀족들의 무리에서 엘렌에게 익숙한 화제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디의 누가 또 새로운 기계를 만든다더라. 어떤 가문은 거기에 투자를 했다더라. 어느 연구소에서 무슨 기관을 만든다더라…….

그 이야기들을 듣던 그녀는, 지금이 제가 이 사회에 섞여 들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 새로운 기계라니. 저도 꼭 보고 싶군요.]

갑작스레 끼어든 여성의 목소리에 한창 말을 하던 남자가 옆을 돌아보았다.

이곳에서 처음 본 이였지만, 소개하기로 윌튼 자작이라 했던 자였다.

[아, 크렘벨 부인. 부인께서도 관심이 있으십니까?]

[그럼요. 저희 가문에서도 투자하고 있는 연구소가 있답니다.]

[부인의 가문이라면 혹 크라이언트를 말씀하시는지요. 오, 혹시 레토입니까?]

[알고 계시는군요? 그는 아버지께서 발굴하신 인재죠.]

[하하, 크라이언트의 레토를 모르고 어찌 이 사업을 하겠습니까. 저희도 레토의 방적기를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찾아낸 것은 이미 레토가 굳건히 자리를 차지한 방적기가 아니라, 차세대를 이끌어 갈 새로운 물건이지요.]

[그리 말씀하시니 정말 궁금하군요.]

[그렇다면 조만간에 제가 초대장을 보내 드려도 될는지요? 이야기를 들으신다면 분명 투자를 하시지 않고는 못 배기실 거라 장담하겠습니다.]

[좋아요. 고대하고 있겠어요.]

그녀는 그 대화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었고, 시작이 제법 괜찮다며 살짝 들뜬 마음으로 다음 말을 꺼냈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윌튼 경께서는 예술에도 제법 조예가 깊으시다고 들었는데…….]

[윌튼 자작, 미안하지만 잠시 실례하지.]

길리언이 갑자기 엘렌의 말허리를 자르며 끼어들었다.

[공?]

엘렌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녀의 어깨를 확 감싸 쥔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길.]

[아……. 길.]

애칭이야. 애칭이겠지? 앞으로 항상 불러도 된다는 걸까.

그녀가 살짝 설레는 마음으로 호칭을 정정하자,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다른 귀족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시간이 더 늦어지기 전에 이 성의 정원을 부인에게도 보여 주고 싶어서. 자네가 이해 좀 해 주게.]

[하하, 슈탓트펠트가의 정원은 유명하지요. 부부간의 정이 참 보기 좋습니다, 공.]

[그럼 실례하지.]

[다음에 뵙겠습니다, 자작.]

[초대장은 크렘벨 저로 보내겠습니다, 부인.]

그런데 그 말을 들은 길리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자작을 등지자마자 일그러지는 그 얼굴을, 엘렌은 보았다.

뒤에서 신혼이니 어쩌니 하는 남자들의 농담과 함께 왁자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티장의 불빛들이 그녀를 지나쳐 뒤로 흘러갔다.

저 멀리 정원수들이 달빛에 어스름히 보일 만큼 멀리 나오자, 길리언은 무섭도록 굳은 얼굴로 더욱 외진 바깥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무언가 문제가 있었음을 직감한 엘렌이 입을 열었다.

[갑자기 무슨 일…….]

[너.]

[……?]

[누구 맘대로 어디에 투자를 하겠다는 거지?]

아주 불쾌하다는 듯 찡그려진 미간. 파티장에서와는 다른 냉락한 얼굴.

[아. 그 얘기라면, 물론 최종 결정은 가주의 권한이 맞지만 방금은…….]

방금은 일종의 친교 활동으로, 실제로 투자 가치가 있을지 없을지는 둘 중 한 사람이 알아본 뒤 서로 의논하여 결정하면 되지 않을는지요.

그녀가 하고 싶던 말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길리언은 그녀가 그리 말을 끝맺을 수 있도록 기다려 주지 않았다.

[네가 해야 할 일은 내 일에 입을 보태는 게 아니야. 크렘벨 공작 부인으로서 할 일을 하라고. 좋아하는 것 아닌가, 지위.]

[…….]

[네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의 결속을 보이고, 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사교계의 일을 다루는 거다.]

[하지만…….]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적당히 웃으면서 즐기기만 해. 알겠나?]

하지만 길리언은 그녀의 의견 따위 일절 들어 주지 않았다.

서느런 향을 맡으며 엘렌은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래. 제 자금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들킬 만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겠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으니까.’

길리언 크렘벨, 제3황위 계승권자의 이름 아래 반란을 꿈꾼 남자.

그는 공작위에 오르자마자 반란에 대한 십년지계를 그렸고, 그를 위한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했다.

여느 귀족들이 그러하듯 가장 쉬운 방법은 두말할 것 없이 혼인이었다.

혼인 시장에 나온 매물, 그 사이에서 그녀를 선택한 것이다.

가장 만만한 돈줄로써.

엘렌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샐리.”

“네, 아가씨.”

“이따가 들어가면 남부에서 입을 만한 가벼운 것들로 짐을 좀 꾸려 줬으면 해.”

“네. 그런데 중부가 아니라 남부 말씀이신가요?”

“응. 아, 너도 같이 갈 예정이니 네 짐도 함께 싸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혹시 타 영주성에 들르실 일이 있으시다면 파티 드레스도 두어 벌 챙겨 넣을까요?”

“챙겨서 나쁠 것은 없을 테지. 조금만 수고해 줘.”

“……예, 아가씨.”

샐리는 갑자기 연고도 없는 남부로 간다는 그녀가 걱정이 되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나 그녀도, 집사인 해리슨도 엘렌의 결정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자코 믿어 주는 것이다. 그녀가 무엇을 하든.

“다들 나랑 같이 여기서 오래오래 살자.”

엘렌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머, 전 그래도 결혼은 하고 싶은걸요.”

“그럼 남편을 여기로 데리고 와. 샐리가 아이를 낳으면 내 조카처럼 살펴 주지.”

“그거 지참금 두둑이 챙겨 주신다는 이야기로 들어도 되나요?”

“지참금보다는 아이 학비라고 하자. 난 사실 샐리가 지참금 받아서 결혼하러 나가는 건 싫거든.”

“그렇다고 하시니 내 기억하고 있어야겠구먼.”

“집사님!”

정원에는 유쾌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고, 세 사람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귀가와 이해할 수 없는 남부행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그날 저녁, 엘렌은 곧바로 다니엘에게 가 제 결심을 이야기했다.

“벨레니오스에 좀 다녀올게요.”

물론 다니엘은 갑자기 튀어나온 선언에 아주 당혹스러운 얼굴을 보였다.

“아니, 오자마자? 게다가 벨레니오스라니? 타 영지도 아니고 타국에까지 갑자기 무슨 일로 가는 게냐?”

“태자 전하께 약속드린 바가 있으니까요.”

“전하와의 약속이라면…… 구황 말이냐?”

“네. 비엔나령에 가서 작물을 좀 수입해 올 생각이에요.”

“벨레니오스 비엔나령이라…….”

다니엘은 잠시 뜸을 들이다, 곧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너, 설마 감자를 가져올 생각인 게냐?”

“네. 우리가 작물 연구용으로 조금 가지고 있는 씨감자 가지고는 어림도 없으니까요. 물론 가능하다면 밀이나 옥수수 가루도 같이 가지고 와야죠.”

“허허……. 감자라. 과연 효과적이긴 하겠다만, 그걸 사람들이 좋아하겠느냐?”

“배를 곯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엘렌은 담담히 말했다.

생존의 문제 앞에서는 최선이나 차선 같은 단어는 없다. 그저 가능 불가능만 있을 뿐.

실제로 이전 급작스러운 밀 흉년으로 이스타지오가 흔들릴 때, 상대적으로 뒤처지는 나라라는 평을 듣던 벨레니오스는 큰 타격 없이 버텨 냈다.

“그래. 알겠다. 조심히 다녀오려무나.”

무겁게 허락의 말을 남긴 다니엘은, 제 품을 뒤져 무언가를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게 필요하겠구나. 지금 미리 주마.”

“이건 가문의…….”

“그래. 가문의 인장이다. 가서는 네가 크라이언트의 대표인 게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아버지. 그럼 사교 시즌의 준비는 부탁드릴게요.”

“알겠다. 하지만 거듭 말했듯이 정말 초기 물량뿐이야. 식량이야 빗나가면 전하의 이름으로 빈민가에 기부라도 한다지만, 드레스는 유행을 놓치면 고스란히 손해잖니. 이해해다오.”

“네. 그거면 충분해요.”

정말로 그 정도면 충분했다.

남들보다 빨리, 처음을 선점하는 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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