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뭐?”
길리언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기본적으로 표정 관리에 철저했던 크렘벨 공작이다.
그런 그가 오늘은 저런 얼굴도 보이다니.
엘렌은 어쩐지 유쾌하다는 생각을 하며 말했다.
“그럼…… 다음에 뵐 때는 그 서류에 당신의 인이 찍혀 있기를 바라지요.”
엘렌과 길리언의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에 이 상황에 대한 의문과 당혹이 가득했다.
이전의 삶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던 낯이었다.
당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내가 그리 당혹스러운가?
그렇다면 내 평생을 당신의 생각대로 살아갔던 그때는, 어째서.
가슴이 선득했다. 끈적한 무언가가 가슴 사이로 번지는 느낌이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엘렌은 길리언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이렇다 할 인사도 없이 곧장 뒤로 돌아 집무실을 나섰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길리언이 뒤늦게 제 집사를 향해 외쳤다.
“……제임스!”
이어진 다른 말은 없었지만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저 여자가 나가지 못하도록 붙잡아 와’.
황당함과 당혹스러움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공작저의 집사 제임스는, 제 주인의 외침을 듣고 나서야 허겁지겁 엘렌의 뒤를 쫓아 나가며 외쳤다.
“마님!”
제임스가 엘렌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공작 부인이 갑자기 그의 손을 뿌리치더니, 사나운 기세로 일갈한 것이다.
“어딜 감히 한낱 평민 따위가 귀족의 몸에 손을 대는 겐가!”
“……주인님께서 부르십니다. 들어가시지요.”
“그 명령, 나는 이제 크렘벨일 생각이 없기 때문에 따를 이유도 없네. 크라이언트로 돌아갈 생각이니 그만 돌아가도록.”
“마님, 그러시다간…….”
제임스가 계속해서 그녀를 붙잡았다.
그러자 엘렌은 크렘벨 저에 머무르면서는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던, 아주 노골적인 비웃음을 띤 얼굴로 말했다.
“마님? 자네가 날 진정으로 마님으로 섬긴 적은 있었나?”
“마님,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같잖은 가식은 집어치우고 가서 자네 본분에 맞게 크렘벨의 세간이나 살피게. 난 크라이언트로 돌아갈 것이고, 한 번만 더 이 대거리질을 했다간 내 필히 자네의 손목을 자를 테니.”
그 서슬 퍼런 엄포에 제임스의 낯이 퍼렇게 질렸다.
마님을 그냥 보내서는 안 되는데, 그렇다고 방금처럼 저 팔을 무작정 붙잡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그가 망설이는 사이, 엘렌은 이미 공작저의 정문을 나서고 있었다.
‘이거 정말 큰일이 났구나!’
제임스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쨍그랑!
크리스털 재떨이가 바닥에 부딪혔다.
“그것 하나 똑바로 못하나?”
길리언이 짜증이 얼룩진 미간을 좁힌 채 말했다.
“저 여자가 왜 갑자기 돌아 버린 거지? 어제까지만 해도 가만히 있던 여자가, 왜 오늘 갑자기 저런 짓거리를 한 것인지 아는 대로 말해.”
공작의 물음에 제임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래도 사용인들의 문제가 꽤나 큰 듯한데, 그 말을 차마 주인의 앞에서 뱉어 낼 수가 없었다.
사실 그가 부정하고 싶을 뿐, 그 짐작은 높은 확률로 정답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주인은 천천히 대답을 기다려 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자네는 입이 없나? 필요 없는 부위라면 잘라 내도 문제없겠군.”
냉랭하게 굳은 목소리로 떨어지는 재촉이 살벌했다.
제임스는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용인들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사용인이? 왜지? 내 눈엔 여기만큼 잘 관리된 사용인들이 없는데.”
길리언이 의문 섞인 눈으로 물었다.
언제나 시간 맞춰 준비되는 일상.
자신의 취향에 어긋나지 않는 식사와 깔끔하게 정리된 외관.
아무리 생각해도 제 저택에는 문제가 없었다.
길리언이 코웃음을 치며 어떤 창의적인 대답이 나올지 궁금하다고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그간 마님의 시중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던 듯합니다. 아무래도 저택의 일은 모두 주인님께 맞춰져 돌아가기에, 마님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잡설은 됐고 핵심만. 그래서 무엇이, 왜 문제라는 거지?”
“마님의 시중을 들다 실수를 하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화가 쌓이신 것이 아닌지…….”
제임스가 우물쭈물 대답하자 길리언이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하며 목뒤를 주물렀다.
“하, 일이 서툰 녀석을 그런 곳에 배치해 시중을 들게 한 제 잘못인 줄은 모르고? 아주 가관이군.”
그러자 눈치를 보고 있던 제임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의 착각을 정정해 주었다.
“그것이…… 그 아이들의 처벌에 대해 마님께서 건의하셨던 부분은, 모두 주인님께서 반려하셨던 탓에.”
“……뭐?”
길리언의 반문에 제임스는 재빠르게 제 주인이 요구한 대답을 읊었다.
“가장 최근의 일로 말씀드리면, 시녀가 마님께 찻잔을 미끄러뜨려 엎었고, 마님께서는 팔에 얕은 화상을 입으시어 해당 시녀의 처벌을 논하셨으나 주인님께서 반려하셨습니다.”
그 말에 정작 캐물은 당사자인 길리언은 약간의 당혹을 느꼈다.
감히 안주인의 몸에 상해를 입히고도 멀쩡히 일을 했다고?
“……그런 경위서가 올라왔음에도 내가 처벌을 하지 말라 반려했다는 말인가?”
자세한 경위서를 보지 못했던 것일까.
그는 그리 생각하며 물었지만, 대답은 기대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 그 일이라면 그렇습니다.”
길리언은 머리가 띵해져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간 벌여 놓은 일들이 많아서 바쁘기는 했었다.
자신이 해결해야 할 일들이 아니면, 적당히 기존에 내렸던 결정을 그대로 취하거나 아예 멀찍이 치워 버렸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다른 일들도 있다는 거군. 말해 보도록.”
“이와 비슷한 사건들이 누적되면서, 가문의 사용인들 중 시중에 익숙한 베테랑은 모두 주인님의 시중을 맡았고, 미숙하여 아직 적응이 필요한 아이들이 마님의 시중을 들게 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의 시중을 드는 이들은 모두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때문에 몇 번 그도 제 부인이 올린 문서를 읽은 기억은 있지만, 그것참 예민하고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여자라 생각하며 집어 던졌었던 기억이, 그제야 스멀스멀 떠올랐다.
당연히 집사가 알아서 교육시키고 단속하리라 생각했었을 뿐인데.
그중에 이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네가 잘했다고 생각해서 내 앞에서 그렇게 족족 읊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죄송합니다.”
이 순간 제임스가 할 수 있는 말은 제 주인에게 사죄를 올리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억울한 부분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주인이 애초에 제 부인을 조금만 더 잘 챙겼더라면 저희도 그러지 않았을 게 아닌가.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라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고, 다만 이곳에서 공작 부인은 후순위로 조금씩 밀려났을 뿐이다.
물론 그리 말한다고 해서 용납할 상대가 아니니 그는 잔뜩 웅크릴 뿐이지만.
할 말을 잃은 길리언은 한 번 마른세수를 한 뒤 말했다.
“……근무 태만은 해고 사유다. 당장 너부터, 그리고 그따위로 일한 시녀들까지. 모든 인력을 갈아 치울 테니 그리 알고 전부 조사해 와!”
길리언은 고함을 질렀고, 분기에 찬 공작의 명에 제임스는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 * *
엘렌은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홧김에 달려 나온 도시는 언제나 그러했듯 활기찼다.
자신은 죽음을 겪고 돌아왔는데, 이 기적도 이 분노도 모두 혼란스럽기 그지없는데.
잠시 넋 놓은 듯 거리를 쳐다보고 있던 그녀는, 곧 정신을 차리고는 착착 제 뺨을 두드렸다.
‘아니, 시간이 아깝다. 우선은 생각하고 행동해야 해…….’
그녀는 일단 마차를 수배하기 위해 삯마차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지? 일단 아버지를 뵈려면…… 상회? 안 돼. 너무 뻔해. 그렇다고 영지로 바로 내려가면…… 분명히 인력을 풀어서 날 잡으러 올 테지. 그것도 안 돼.’
길리언은 집안의 소란스러움이 바깥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러니 당장은 함부로 바깥에 드러날 만한 행동을 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바꿔 말하면, 그녀가 외부에 알려질 정도로 요란한 행동을 취하면 그가 즉각적으로 행동을 개시할 것이라는 말도 되었다.
‘크렘벨령을 벗어나되, 수상해 보이지는 않는 곳.’
무턱대고 멀리 가려 하면 길리언이 행동하게 되는 빌미만 될 수 있다.
우선은 잠시 숨을 고르러 나온 척, 조용히 해결하는 게 좋을 수준의 작은 해프닝인 척.
‘수도 정도가 적당하겠지. 그쪽까지는 우리 영지에서도 크렘벨령을 거치지 않고도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닦여 있으니.’
하지만 수도의 크라이언트 저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길리언이 자신을 지나치게 빨리 찾아낼 테니까.
그렇다면 어디로?
‘아, 그래. 그 호텔이 있었지.’
황태자와 함께 들렀던 적이 있는 곳.
지나간 시간 속에서, 황태자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간혹 황궁을 빠져나와 돌아다니고는 했었다.
그러다 마음이 내키는 날이면 공작을 꼬드겨 함께 나오곤 했는데, 그때 들르던 곳이 바로 그 호텔이었다.
당시의 황태자는 공작 부부의 시종 행세를 하며 돌아다니는 것을 나름 철저한 변장이라고 생각했었던 듯했다.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옷을 입고는 그들의 시종인 척 바깥을 돌아다니는데, 옆에서 농담을 건네거나 파안대소를 하거나 해 댔던 탓에 어느 모로 봐도 그가 시종처럼 보이는 일은 전혀 없었다.
‘이 넓은 땅에서 연고지 외에 떠오르는 곳이 그곳뿐이라니.’
그것도 결국 제 남편의 손에 죽임당한 사람과 들렀던 곳을.
엘렌은 자조적인 미소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삯마차 집엔 대기 중인 마부가 있었다.
마부가 흘끗, 홀로 찾아온 그녀의 행색을 살피며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수도로. 대금은 여기 있네.”
엘렌은 챙겨 왔던 그녀의 결혼 패물 중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진짜 금임을 확인한 마부가 만면에 화색을 띠더니 냉큼 마차 위로 올라탔다.
마차가 출발하고, 그들은 대로를 달려 그대로 크렘벨령의 외곽으로 향했다.
외곽 경계인 운하 위로 탁 트인 정경이 눈부셨다.
흔들리는 눈부신 반사광과 강 위를 지나 불어오는 바람의 내음.
엘렌의 가슴속에는 묘한 설렘이 몽글몽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저를 가로막는 것 없이 트인 강과 하늘이 퍽 기꺼웠다.
“왜 진작 이리하질 못했을까…….”
벗어나는 것은 이리도 쉬운 일이었는데.
사랑을 위하는 것이 곧 저를 위하는 것이라 착각했던 어리석은 여자는 살해당했다.
이제 자신은 엘렌 크라이언트.
새 삶을 꾸려 나갈 여자다.
비로소 가슴에 숨이 들어차는 기분이었다.
엘렌은 홀로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