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싸늘한 바람이 피어오르는 사형장.
“저 반역도의 목을 베어라.”
한때 사랑했던 이의 목소리가 집행장에 울렸다.
일말의 죄책감 따위 흔적도 찾을 수 없는 낯. 그 얼굴을 마주한 엘렌은 실소했다.
‘반역도라니, 내가?’
너무나 허탈한 나머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저이를 위해 노력했는데. 친우의 죽음까지 모르는 척해야 했던 내가, 당신에게는 반역도란 말인가!
비통함, 고통, 분노, 회한.
채 셀 수 없는 비탄의 소용돌이.
‘반역도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섬기던 황제를 벤 네놈 아닌가!’
엘렌은 이를 꽉 악물었다.
혀가 잘리지 않았다면 목이 찢어질 때까지 외쳤을 것이다.
천하에 둘도 없을 패륜아.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금수.
찬탈자, 길리언 크렘벨!
저 멀리 상석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길리언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오만함에 엘렌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아무리 그 피가 이어졌다 한들, 이러한 행위가 용납될 것이라 진정으로 믿는가.
그러나 어찌되었든 길리언 크렘벨은 살아남았다.
죽음이 목전에 놓인 것은 저 남자가 아닌 그들이었고, 엘렌의 앞에는 체념한 듯 눈물을 흘리는 아비와 두려움에 젖어 몸부림치는 동생만이 남아 있었다.
칼을 든 사형집행인이 다가왔다.
시린 금속의 빛을 머금은 칼날.
그것은 정해진 바의 소임을 수행하기 위해 움직였고, 곧 그녀가 사랑하는 이들의 목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하나.
아아, 아버지.
둘.
엘. 가여운 내 아우…….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칼날이 엘렌의 눈에 담겼다.
피를 토하는 심정을 그려 놓은 듯 붉게 물든 날.
사형집행인의 팔이 높게 들리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죽어서도 너의 앞길을 막으리라. 네 앞에 절망과 비애만이 가득하기를……!’
내리쳐진 칼날, 들이닥친 고통.
비명도 허락하지 않는 통증은 그녀의 상념을 끊어 놓았고, 그렇게 엘렌 크렘벨은 배신으로 얼룩졌던 삶을 끝냈다.
그 시간이, 또 한 번 다시 시작될 줄은 모르고.
* * *
양모 사업으로 성공한 북부 백작가의 영애, 엘렌 크라이언트.
가문의 막대한 부 덕에 부족할 것이 없었던 그녀는 그런 제 가문을 사랑했다.
이미 많이 가졌기에 딱히 더 바랄 것이 없는 삶.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부친인 다니엘 크라이언트는 달랐다.
부족했다.
명예 없는 부란 의미 없는 것이었다.
결국 백작은 딸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황위 계승 서열 3위인 크렘벨 공작과 그녀의 혼인을 계획했다.
엘렌 크렘벨. 이제부터는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 혼인에 있어서 크라이언트 백작의 목적이 명확했던 만큼 크렘벨 측의 목적 또한 분명했다.
그것은 일종의 계약이었다.
백작가의 막대한 부와 공작가의 명예를 교환하는, 전형적인 정치적 행위.
그곳에 사랑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한 소녀의 외사랑만이 있었다.
열여섯 소녀는 다부진 몸과 날렵한 선, 강인한 눈매를 가진 남자에게 반했다.
그녀는 어차피 귀족이라면 모두 팔리듯이 하는 결혼, 이렇게 멋진 남자와 하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리석었다.
시간이 지나 풋풋한 사랑을 간직했던 소녀는 사랑하는 남자가 요구하는 현숙한 안주인을 연기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그녀의 삶은 평탄할 줄 알았다.
미련했다.
앞서 있는 두 명이 사라지면 황위를 얻을 수 있다는 말, ‘제3황위 계승권자’.
공작은 언제나 더 높은 곳을 바라고 있었고, 그 욕망은 실낱같은 가능성조차 놓치지 않았다.
크렘벨 공작은 먼저 제2계승권자인 크레센트 황자를 암살했다.
황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여러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황태자가 건재하니 흔히들 그렇듯 황권 다툼이라 생각했을 뿐.
이후부터는 쉬웠다.
공작은 저를 측근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 황태자를 꼬드겨 그의 결혼을 무산시켰다.
병색이 짙던 황제가 붕어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황태자는 곧 다음 대 황제로서 즉위하게 되었고, 공작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기회는 이때였다.
황태자가 군주로서 자리매김도 채 마치지 못한 그때.
공작은 반란을 일으켰다.
황궁은 빠르게 점령당했고, 갓 즉위한 황제는 제가 충신이라 믿었던 자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제위에 앉은 길리언 크렘벨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입에 다시 한번 더 배신을 담는 것이었다.
피로써 황좌를 약탈한 자가 제국의 가장 높은 곳에서 말했다.
“당장 저 반역자 크라이언트를 추포하라!”
선고된 죄목은 국가 반역.
군사 기밀을 타국에 팔아넘겼다는 이유였다.
물론 크라이언트 백작에게 군사적 정보에 접근할 수 있을 만한 권한 따위 없었다.
그럼에도 크라이언트 백작은 처형당했다.
이는 그 일가 역시 마찬가지로, 그날 사형장에서 떨어진 목 중에 엘렌 크렘벨, 아니 엘렌 크라이언트의 것 또한 있었다는 것이 그녀의 비극이었다.
<1화>
깜박, 깜박.
눈을 뜬 엘렌은 잠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다시 깜박, 깜박.
‘아…….’
한참을 눈만 깜박이며 몽롱한 머리를 깨우던 그녀는, 이윽고 정신이 들자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의 풍경이 익숙했다.
일부러 똑같이 꾸며 둔 곳이 아니라면, 이곳은 그녀가 알던 크렘벨 공작저 공작 부인의 방이었다.
‘뭐야, 왜……?’
분명히 아까까지는 감옥에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끌려 나가서, 나는―
“……흡!”
엘렌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제 목덜미를 더듬었다.
그녀가 미쳤다거나 말도 안 되는 꿈을 꾼 것이 아니라면, 그녀의 목은 분명히 잘렸었다.
그 비통함. 그 분노.
죽음, 죽음, 죽음.
엘렌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목 뒤부터 목젖, 그 아래를 지나 뛰고 있는 가슴을 만졌다.
멀쩡했다.
그녀의 시선이 움직였다.
팔. 다리.
모두 멀쩡했다.
엘렌은 급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다급하게 디딘 발이 한 번 휘청, 균형을 잃을 뻔했다.
발목이 조금 시큰했지만 그녀는 그런 통증이 인다는 것마저도 믿을 수 없었다.
이럴 리가 없다는 듯,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정면을 응시했다.
거울 속에 비친 것은 사지가 멀쩡하고, 목이 제자리에 붙어 있으며, 그 어떤 고초도 겪지 않은 듯 깔끔한 인상의 레이디.
엘렌 자신이었다.
* * *
한참을 더 멍하니 서 있고 나서야 엘렌은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한 바퀴 방을 빙 둘러보았다.
잘 아는 벽지, 익숙한 커튼.
침구, 장식장, 테이블, 카펫까지 모두 그녀가 모를 수가 없는 것들이 가득한 이곳.
빼도 박도 못할 크렘벨 공작저 공작 부인의 방이었다.
‘대체 뭐지?’
엘렌은 대체 어찌된 영문으로 이런 이상한 상황에 놓이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이 방에 있는 것도 이상했고, 제가 쓰던 물품이 모두 그대로 있는 것도 이상했다.
반란죄로 처형된 이의 물품이 모두 그대로 보존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게다가 이곳은 그녀에게 직접 처형 명령을 내린 자가 가주로 있는 곳이지 않은가.
아니, 정확히는 ‘있었던’이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지금 이 상황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사실은 똑같았다.
그때였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잠시 사고가 멈춰 있던 엘렌의 시야에 한 물건이 잡혔다.
“저 화병이 어째서? 저건 분명히…….”
그녀의 부친인 크라이언트 백작이 직접 선물한 화병.
하루가 고되다고 느끼는 날이면 턱을 괸 채 멍하니 바라보곤 했던, 이제는 사라져 버린 지 오래된 물건이었다.
제법 소중한 물건이었기에 똑똑히 기억했다.
“저건 분명 깨졌었는데.”
엘렌은 그날의 기억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고립된 이곳에서, 그저 보고만 있는 것으로도 가족을 떠올릴 수 있게 해 주었던 물건.
그래서였다.
멀쩡히 테이블 중앙에 올라가 있던 화병이 떨어져 깨진 날, 그날만은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내오지 말란 재료를 쓴 요리가 나온다. 아끼는 드레스를 잘못 세탁해 망가지는 일이 자꾸 생긴다.
‘자신의 모든 명령은 등한시된다’.
그러나 그녀는 참았다.
나는 외부에서 온 익숙하지 않은 마님이니까.
길리언은 바빠서 정확한 경위를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얼마나 일을 성의 없이 하면 창가도 아닌 테이블 중앙의 화병을 깰 수가 있지?]
[죄송합니다, 마님!]
[자네가 한 그 죄송하다는 말이 대체 몇 번째인지 알 수가 없네. 이번 일은 엄중히 다룰 생각이니, 그리 알고 있도록 하게.]
[마님!]
그런데 그렇게 몇 마디 오가기가 무섭게, 응접실 한쪽에서 미간을 찌푸린 길리언이 나타났다.
[무슨 소란이지?]
[……이 아이가 실수를 한 가지 하여 그것을 묻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보아하니 화병이 깨진 모양이군. 가서 트라이아산 자기를 꺼내 오도록. 그 정도면 수준에 맞겠지.]
[하지만 이것은…….]
[그것으로도 만족을 못하나? 그럼 원하는 것으로 꺼내 와. 이 이상 저택 내에서 큰소리가 나지 않게 하도록.]
결국 언제나 그렇듯, 안주인인 그녀의 권위란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것이었을 뿐.
그녀는 처벌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이미 사라졌던 물건이 어째서?”
정말, 혹시 설마.
엘렌은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지금 자신이 이렇게 눈을 뜨고 있는 것부터 일단 불가능한 일이지 않은가.
엘렌은 냉정히 가라앉은 눈으로 주변을 다시 살폈다.
상황을 알려 줄 만한 것.
달력.
2월이 펼쳐져 있다.
곧바로 맨 앞장으로 넘겼다. 제국력 767년이 표기되어 있다.
가끔씩 쓰던 일기.
마지막으로 쓰인 페이지를 펼쳤다.
<767년 1월 28일. 눈이 내렸다. 이곳은 눈이 제법 내리면서도 소복이 쌓인 풍경을 보는 것은 힘들어, 그 점이 항상 아쉽다. 겨울날의 우리 성이 참 아름다웠는데…….>
767년 1월에 멈춰 있다.
친우와 주고받았던 편지.
마찬가지로 767년 1월의 소인이 찍힌 것이 마지막이다.
그녀는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엘렌, 파트너 없이 참석하지 말고 우리 집 멍청이라도 좀 데리고 들어가. 친한 가문끼리 그러는 것은 별로 이상하지도 않으니까…….>
익숙한 친우의 필체.
그리고 눈에 띄게 어려진 자신의 외양까지.
주어진 단서들을 한참 곱씹던 그녀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지금은 제국력 767년.
다시 눈을 뜬 그녀는 지금,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스무 살의 봄에 있었다.
* * *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었다.
크렘벨 저택은 여전히 엘렌에게 차가웠다.
부르면 들어오지만, 그전까지는 먼저 나서서 무언가를 하지 않는 시녀들.
오늘은 차라리 그래서 다행이라 자조하며 엘렌은 침대에 털썩 누웠다.
이것은 어쩌면 기회였다.
예기치 않게 주어진 또 한 번의 시간.
이유는 몰랐다. 다만 중요한 것은 현상이었다.
어찌 되었든 제게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미래가 있었고,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자가 있었으며, 지금 제게는 그 모든 것에 대한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다.
엘렌은 자신이 눈을 감던 순간까지 되뇌던 저주를 다시 한번 가슴속에 새겼다.
‘내 모든 것을 바쳐, 네게 절망과 비애를 안겨 주겠다.’
그러니 너는 황위도, 명예도, 그리고 공작으로서의 지위마저도.
그렇게 모든 것을 잃고 좌절하기를.
엘렌의 눈 속에 불꽃 같은 무언가가 피어났다.
맹렬한 불꽃 같기도, 한낮의 태양 같기도 한 이채가 그녀의 눈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정해져 있었다. 다만 어떻게 실행하느냐의 문제였다.
그녀는 떠올리기만 해도 설레는 두 음절의 단어를 나직이 읊조렸다.
부친인 다니엘 크라이언트 백작은 분명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권력을 탐함과 동시에 아비로서의 면모 또한 갖췄던 사람이었다.
비록 제 결혼 생활에 행복은 없었지만, 기억 속의 부친 다니엘은 다정했고, 딸의 행복을 빌어 주며 헤어짐을 슬퍼하던 이였다.
거기까지 떠올린 엘렌은 결심했다.
한 번 정도는 정면으로 부딪쳐 보는 것이다.
정 어렵다면 공작저를 나가서라도 도모하면 그만이니.
이제 그녀는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엘렌은 침실의 종을 울렸다.
달칵. 문이 열리며 시녀가 들어왔다.
“하명하실 것이 있으신지요.”
인사만은 깍듯한 예의 바른 냉대.
“세숫물을 가져오고, 종이와 펜도 좀 가져오너라.”
엘렌이 하명하자 시녀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나갔다.
이윽고 그녀의 침실로 물건들이 실려 왔다.
엘렌은 그 자리에서 곧장 쓰고자 하는 것들을 휘갈겼다.
크라이언트를 업신여기면서도 그 재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었던, 남편 길리언 크렘벨.
이것은 이곳에서 그에게 남기는 마지막 선물이 될 것이다.
서명까지 잊지 않고 멋들어지게 써넣은 그녀는 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제 가 볼까.”
엘렌은 처음 깨어났을 때와는 다른, 힘이 실린 발걸음으로 그녀의 침실을 나섰다.
* * *
탕!
길리언이 공작위를 승계한 이후로 한 번도 이리 취급받은 일이 없었던 문이 제법 거친 소리를 내며 열렸다.
크렘벨 공작저의 주인, 길리언 크렘벨은 고개만 슬쩍 들어 정면을 확인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엘렌 크렘벨. 그의 부인이었다.
“……제정신인가? 품행에 신경 쓰라는 말은 다 귓등으로 들은 모양이군.”
문을 열고 들어온 엘렌에게 한심하다는 듯 일갈한 길리언은, 다시 시선을 서류로 내렸다.
그리고 당연히 따라 나올 사죄의 말을 기다리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들려와야 할 말이 나오질 않았다.
대신에 그의 부인이자 금전적 원조를 위한 계약의 증거, 엘렌 크렘벨이 취한 행동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물론 제정신이지요. 그 말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도대체가 공작가의 일원이라는 자각이―”
무례한 언사에 길리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엘렌을 향해 무어라 말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정작 엘렌은 그의 말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없고, 가질 생각도 없습니다.”
그녀는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서류 몇 장을 책상 위에 탕 올리고는 말했다.
“자, 깔끔하게 도장 찍으세요.”
맨 앞장 최상단에 쓰인 것은, 바로 ‘이혼 합의서’였다.
“미쳤군.”
길리언은 정말로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를 향해 그런 눈길을 보내던 여자가, 이혼?
길리언은 실소했다.
그로서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었다.
그에게 있어 엘렌 크렘벨은, 언제나 그의 사랑을 갈구하며 결국 그의 눈길 한 번에 얌전해지던 여자였으므로.
하지만 지금 크렘벨이라는 이름을 버리기로 마음먹은 그녀는 그가 알던 엘렌 크렘벨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뭐, 그리 보이신다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더더욱 이것이 필요하겠군요.”
이미 한 번의 생을 보냈고, 실패를 겪어 보았으며, 끝내는 죽음에까지 내몰렸던 그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겨우 저런 것에?’
엘렌은 길리언이 이렇게나 하찮아 보일 수 있다는 것에 새삼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피식 실소했다.
그것을 본 길리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상처받은 듯 입술을 앙다무는 대신 이런 냉소를 내비치다니.
충격이라면 충격이라 할 수 있는 생경한 기분이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급변하다니, 아무래도 제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싶었다.
‘그런 것이야 나중에 차차 알아보면 된다.’
그는 정말로 미친 여자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지적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들어가서 오늘 일을 반성하고 있도록. 제임스!”
그는 그의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를 불렀다.
“예, 주인님.”
“이 여자를 데리고 가도록. 일주일간의 근신이다.”
“예.”
길리언은 엘렌의 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행동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엘렌은 평온했다.
이것이 그녀의 일상이었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일을 보며 새삼스레 놀라기도 어려웠다.
“근신이라뇨. 당치 않습니다.”
엘렌은 조곤조곤, 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공작저의 일원이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 제가 나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