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수도에 도착한 엘렌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가문에서 운영하고 있는 부티크의 본점이었다.
그곳을 통해 가문에 연락을 넣은 그녀는, 다 쓴 편지를 담당자에게 맡기자마자 매장의 물품들을 선별해 방으로 가져오도록 했다.
“모두 매장 내 최고급품들로만 엄선해 왔습니다. 먼저 이 드레스부터 말씀드리면…….”
“설명은 괜찮네. 다 가져가지.”
“전부 말씀이십니까?”
“그래. 모두 포장해서 여기로 보내게.”
엘렌은 메모지에 자신이 잡은 호텔방의 호수를 적어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중간쯤에 걸려 있던 드레스를 집은 뒤, 곧장 피팅 룸으로 들어가 갈아입고 나왔다.
그렇게 드레스, 장갑, 구두 등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갈아치운 엘렌은, 자신이 벗어던진 것들을 바닥에 툭툭 떨구고는 말했다.
“전부 태우도록.”
들고 있는 것도 혐오스럽다는 듯 가차없이 모든 것을 빼낸 그녀는, 그것들을 모두 소각장에 처박을 것을 명령한 뒤에야 부티크를 나섰다.
‘아버지께 편지는 부쳤고, 여기는 황제 직할령인 황도이니 길리언이 함부로 행동하지도 못할 테고…… 좋아.’
이제부터는 어떻게 하지?
엘렌은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바깥을 돌기보다는 호텔에서 아버지의 연락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한 번 행동을 개시하자 마음에는 여유가 조금 생겼다.
하지만 아직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은 없었다.
‘당장은 이혼이 급선무라도 그 이후에 대한 대책은 있어야 해. 생각해 둔 방향은 있지만 아버지를 설득하려면 조금 더 구체적인 계획이…….’
그때였다.
“아, 제기랄. 돌겠군.”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호텔로 걸어 들어가던 엘렌의 귀에,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제 갈 길 가기 바쁜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우뚝 멈춰 선 채 주머니를 뒤지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사람이야 지나가건 말건 그저 다급한 손짓으로 제 온몸을 더듬는 중이었다.
“젠장, 어떤 자식인지……!”
‘누구지? 목소리가 익숙한데.’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저렇게 입이 거친 사람이 있었던가.
그때, 엘렌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남자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크렘벨 부인?”
“설마, 전, 케이든 님이십니까?”
황태자가 지금 왜 여기에?
엘렌은 당황했다.
황궁에 있어야 하는 자가 여기엔 무슨 일로 와 있는 것인가?
그러나 이유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이 호텔은 일전에 황태자가 그들 부부를 데리고 들렀던 곳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그러고 보니 부인을 뵙는 것은 신년 연회 이후 처음이로군요.”
케이든 이스타지오.
그녀의 남편인 길리언 크렘벨의 종형제이자, 그녀가 적을 두고 있는 이스타지오 제국의 황태자.
“혼자 예까지는 어쩐 일이신지요?”
“그럴 일이 조금 있었습니다. 부인을 만나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군요.”
그는 아까까지 하고 있던 욕설은 착각이라 오해할 정도의 밝은 미소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곤란하신 일이라도 있으셨나 봅니다.”
“예. 그나저나 부인께서는 부군은 어찌하시고 이 수도까지 혼자 와 계십니까?”
아, 부군.
현실을 상기시키는 단어에 엘렌의 머릿속에 있던 잠시간의 당혹이 순식간에 걷혔다.
엘렌은 그에게 조금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하지만 케이든 님. 저희는 이제 곧 부부가 아니게 될 예정이니, 앞으로는 크라이언트의 이름으로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부가 아니게 될……? 설마 이혼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그가 도장만 찍으면 끝난답니다.”
생각보다 담담하게 나간 자신의 목소리에 엘렌은 아주 작은 놀라움을 느꼈다.
이런 말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황태자는 퍽 놀랐던 모양인지, 해쓱해진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녀석이…… 원래 무뚝뚝한 구석이 있지요. 부인께서 받으셨을 상처를 어찌 감히 짐작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여인의 몸으로 그런 큰 결정을 내리는 데는 조금 더 시간, 을 갖고 숙고하심이 어떠한지.”
듣다 보니 중간에 살짝 더듬을 뻔한 것인지 어색하게 끊긴 구간까지 있었다.
‘그렇게나 의외인가.’
그녀는 이맘때쯤의 저희 부부가 어떠했는지를 회상해 보았다.
‘딱히 지금과 별다를 바 없었던 것 같은데.’
자신은 그렇게 평생을 별다를 바 없이 살다 죽었다.
그녀의 입가에서 피식, 작은 숨이 새어 나왔다.
‘하긴, 나도 내가 놀라운데 저이로서는 오죽할까.’
이혼이라니.
불과 며칠 전까지 그녀 자신마저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충분히 숙고한 뒤 내린 결론이랍니다.”
“……괜한 오지랖이 되었군요.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케이든은 엘렌의 부정에도 난처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하지만 따지자면 이 사건은 황태자라면 충분히 당황할 만한 일이 맞았다.
혹자는 이 이혼을 두고 제3계승권자가 레이스에서 이탈하게 되는, 황태자에게 있어서는 행운이 아니냐는 소리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제2계승권자인 그의 친동생이었고, 오히려 사촌인 공작가는 빠르게 황위에 대한 욕심을 접고, 제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안정성 있는 패, 즉 케이든을 선택한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런 크렘벨가의 실세를 두 눈 멀쩡히 뜬 채 보고 있게 생겼으니.
엘렌은 그에게 문득 미안해져서는 말했다.
“그보다, 혹 지금 겪고 계신 곤란한 일이 무엇인지 여쭤봐도 될는지요?”
“아, 그렇지. 내가 영애를 걱정하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지요.”
케이든이 멋쩍은 듯 웃으며 제 뒷머리를 헤집었다.
“내가 그만 돈을 잃어버려 용건 해결도 못하고 귀가도 곤란해졌지 뭡니까. 그런데 이거 벼룩의 간을 빼먹을 수도 없고…….”
아, 왠지 열심히 주머니를 뒤지고 있더라니.
엘렌은 그가 보이던 이상 행동의 의미를 깨달았다.
‘무단 외출부터 사고 치기까지 참 가지가지 하는군.’
“어머, 벼룩이라뇨.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보았답니다.”
다행히 그가 직면한 문제는 그녀가 도와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짐작하기로 지금 그는 옛 이 시절 버릇 그대로 부황 몰래 잠행을 나온 것일 테다.
엘렌은 머릿속을 스쳐 간 여러 가지 생각 중 빠르게 몇 가지를 추렸다.
길리언 크렘벨의 반역.
케이든 이스타지오 황태자.
수도.
그리고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이 기회.
그녀는 결정했다.
“언제쯤 귀택하실 예정이신지요? 오늘은 이 엘렌 크라이언트가 모시겠습니다.”
엘렌이 처음 건네었던 인사만큼이나 우아한 동작과 함께 짝짝, 손뼉을 쳤다.
손뼉이 울리자 곧 한구석에 서 있던 호텔의 급사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가서 삯마차를 불러오게. 자네는 오늘 우리를 수행해야 할 듯하니 가서 고용주에게 이것을 전하고, 여기 이것은 자네의 몫이네.”
그녀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장인의 섬세한 세공이 돋보이는 패물들이었다.
커팅이 훌륭한지 스스로 빛나는 듯 영롱한 보석들과 그것을 감싸며 예술품과 같은 아름다움을 뽐내는 백금의 조화.
홀린 듯 그녀가 들고 있던 것을 쳐다보던 급사는, 그것들이 제 손바닥 위에 놓이자 아주 소중히 손바닥을 말아 쥔 채 부리나케 뛰어갔다.
그녀는 생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결혼 패물은 제 것이니까요. 그러니 오늘은 크라이언트의 장녀인 이 엘렌이 모시겠습니다, 케이든 님.”
나 이혼할 거야. 그렇지만 당신과는 여전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그 사실을 피력하는 그녀의 행동에, 케이든의 시선이 저 멀리 멀어지고 있는 급사의 뒤꽁무니로 향했다.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눈꼬리를 부드럽게 풀며 말했다.
“고맙군요. 그러면 오늘은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영애.”
좋아.
엘렌은 작은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황태자가 그녀의 말을 들어 보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기회였다.
우연이 겹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녀가 처음 개시한 행동이 없었다면 영영 놓쳐 버렸을 기회.
‘이제 비로소 시작이야.’
엘렌은 진심으로, 입술 끝을 활짝 들어 올리며 웃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케이든 님.”
* * *
“원래는 어딜 향하실 생각이셨습니까?”
“구시가지의 시장 거리를 조금 돌아볼 생각이었습니다. 민심과 이야기는 그런 곳에 많이 모이니까요.”
그 말에 엘렌은 못 들을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전하. 저는 전하의 지갑은 되어 드릴 수 있어도 호위가 되어 드릴 수는 없답니다.”
“알고 있습니다. 영애도 있으니 그런 위험한 짓은 생각도 못 합니다.”
“그리 말씀하시니 다행이군요.”
엘렌의 신랄한 말에 황태자는 헛웃음을 짓고는, 곧 반만 열어 둔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엘렌은 가장 먼저 환전부터 한 뒤 황태자에게 여비를 나눠 주었다.
“혹시 모르니 가지고 계시지요.”
“오늘 도움은 정말 고맙습니다.”
“신하로서…… 그러니까, 당연한 도리입니다.”
“당연하지 않은 자들이 더 많으면 보통 당연하지 않은 일이 됩니다.”
그건 확실히 그렇지.
황태자가 씁쓸한 낯으로 한 말에 엘렌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그대가 그런 표정을 하라고 한 말은 아닙니다. 그보다 오늘은 이런 곳까지 와 본 김에, 같이 즐기다 가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예?”
“괜찮아요, 괜찮아. 어차피 내게서 눈을 뗄 생각도 없을 텐데, 그럴 바에는 그냥 옆에 있으란 이야깁니다.”
이 황태자가 뭐라는 거야.
엘렌이 차마 생각한 바를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엘렌의 어깨를 감싸 안아 안쪽으로 당기며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나갔다.
“난 저기 꼬치구이 집을 좋아하는데, 어떻습니까?”
“……저는 됐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세요.”
그는 그녀를 길 한편에 세워 두고 꼬치구이 집으로 다가갔다.
“이봐, 영감!”
“어, 오랜만이구먼.”
케이든을 발견한 노인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네가 왔으니 오늘 장사는 일찍 마감하겠어.”
“기대에 부응해 보지. 일단 다섯 개 올려 줘. 그리고 나중에 영감은 장사 접기 전에 나한테 소스 레시피는 알려 주고 가.”
“거 새파랗게 어린놈이 말본새하고는.”
노인이 쯧쯧 혀를 차며 불판 위에 닭 꼬치를 올렸다.
황태자는 아무렇지 않게 킬킬 웃고는 안부를 묻는 듯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영감. 요즘은 장사를 언제까지 하기에 장사를 일찍 접을 수 있네 마네 하는 소리가 나와?”
“말도 마라. 요즘은 다 팔려면 밤까지는 있어야 해.”
그는 홱홱 꼬치를 뒤집어 가며 말을 이었다.
“이 근방에 얼마 전에 시체 하나 치운 것 알지? 그 이후로 해만 지면 사람이 씨가 말라.”
그 이야기를 들은 황태자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