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202화 (202/203)

202. transcendence - 초월 (3)

202.

***

노퍽주에 위치한 샌드링엄 하우스.

정원에서 티타임을 즐기던 엘리자베스 여왕이 감탄사를 터트린다.

권서준 작가에 대한 신문 기사 때문이었다.

“권 작가의 작품 말이야. 정말이지 놀랍지 않니?”

엘리자베스 여왕의 말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조지 학회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놀랍죠. 어떻게 그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신기하기도 하고요.”

진심으로 감탄이 나오는 작품이었다.

작품「황금 사과」

존재하지 않는 환상 속 이야기.

그러나 작품 속 모든 서사가 서로 긴밀하게 상호작용을 하며 더 큰 이야기로 발전한다.

‘우주라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배경지식이 없어도 충분히 감상할 수 있게 만들었어.’

예술 같은 서사는 시공간을 초월해 독자들의 관심과 욕구를 완벽하게 충족시켰다.

가짜임을 알면서도 감동과 전율을 느끼는 게 만드는 게 바로 권서준의 능력이었다.

여왕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권서준의 작품을 다시 한번 음미한다.

“권 작가의 글 속엔 아련하게 셰익스피어의 흔적이 느껴져. 어린 시절, 밤새 가슴에 품고 잠들었던 그의 작품 세계가...”

비단 엘리자베스 여왕만의 평가가 아니었다.

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 대부분이 현대판 셰익스피어라고 칭송할 정도였다.

‘벌써부터 권서준의 작품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 견주는 사람도 있으니까.’

비운의 천재, 크리스토퍼 말로를 다룬 「거장의 숨결」.

임박한 죽음 앞에 비로소 삶의 의미를 되찾는 「덧없는 행운이여」.

서로를 떠나보낸 부자의 상실을 다룬 「당신이 머물던 자리에」.

끝으로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끝끝내 살아내는 의지를 보인 「황금사과」까지.

이른바 권서준 표 4대 비극.

세상은 지금 그가 창조한 세계에 열광하고 있었다.

***

1년이 지났다.

내 책 「황금 사과」는 전 세계 110여 개국에 번역 출판되었다.

“엄청납니다. 30여 개국이 넘는 곳에서 베스트셀러고 여전히 판매량이 줄지 않고 있습니다.”

하이든 에이전시의 고용수 부장은 틈날 때마다 작품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벌써부터 헐리웃 영화계를 비롯해 전 세계 영화사에서 제작하고 싶다고 난리예요.”

고 부장은 자연스럽게 영화사에서 보낸 계약 관련 내용을 보여준다.

하나같이 엄청난 금액과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나 가장 뜨겁게 러브콜을 보내는 건 바로 엔플릭스였다.

“루카스 대표가 안달이 난 모양이에요. 감독뿐만 아니라 배우까지 작가님께 맡기겠다고 하네요.”

작가에게 연출과 캐스팅 권한까지 주겠다는 특급 제안.

더없이 탐이 나는 제안이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엔플릭스 쪽과 더는 하고 싶지 않네요.”

내 말에 고 부장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뜬다.

“정말요? 지난번 영화도 그렇고, 차기작까지 진행 중이라 좋은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모르는 부분이 있을까요?”

고 부장은 에이전시답게 내 속뜻을 물었다.

“이토 히나타의 작품을 영화화하려고 했잖아요. 아무래도 역사 왜곡 소설까지 영화화하는 곳이랑은 더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아...”

“이미 팔린 소설 판권을 제외하고는 이제 더 이상 그쪽과는 작업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제야 고 부장이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 작품은 어느 쪽과 계약하고 싶으십니까?”

“한 군데가 있긴 한데 제가 직접 만나보고 정해도 될까요?”

고 부장이 미소를 짓는다.

“물론입니다. 이건 작가님의 작품이니까요.”

***

고 부장과의 미팅이 끝난 뒤 나는 외출을 나섰다.

고 부장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엔플릭스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이젠 토종 OTT의 성장이 필요할 때니까.’

어떻게든 자기 입맛에 맞게 바꾸려는 해외 플랫폼보다는 앞으로의 원활한 작업을 위해서라도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국내 플랫폼이 필요했다.

내가 고려한 가장 좋은 수는 바로 타이거 스튜디오.

늦은 오후.

나는 하 본부장과 미팅을 잡았다.

“저, 정말이십니까? 「황금사과」를, 저희와 계약하시겠다고요?”

하 본부장은 믿기지 않는 듯 되물었다.

“네, 좀 전에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대신 조건은 이겁니다. 연출은 정은미 피디님으로 부탁드릴게요.”

“그거야 어렵지 않죠. 연출력만큼은 그 친구도 이미 검증됐으니까요. 다만, 작가님과의 계약 자체가 워낙 큰일이라...”

하 본부장은 고민이 되는 듯 대답을 망설였다.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등장했다.

모델 뺨치는 몸매에 고급스러움이 묻어나는 외모.

조예슬이었다.

조태강 회장의 손녀이자 나의 전 여친인 여자.

“아, 조 이사님.”

하 본부장이 조예슬을 알아보고 황급히 일어난다.

조예슬은 자연스럽게 내 앞에 앉았다.

“하 본부장이 선택하기 어려운 결정 같은데, 제가 좀 확인해도 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빛이 나는 외모였다.

“아, 그럼 전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하 본부장이 눈치껏 자리를 피해준다.

철컥.

문이 닫히자 조예슬이 나를 향해 시선을 든다.

잠시 침묵이 자리 잡고, 이내 조예슬이 입을 연다.

“...오랜만이네.”

“그러네. 정말 오랜만이다.”

나는 차분하게 인사를 건넸다.

잠시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보던 조예슬이 다시 말을 잇는다.

“왜... 우리한테 이런 기회를 주는 거야?”

책임자로서 궁금할 수 있었다.

나는 솔직하게 내 생각을 전달했다.

“그래야 내가 앞으로 작품 활동하기 편할 테니까. 아무래도 엔플릭스 쪽은 욕심이 많거든.”

“...그 이유가 전부야?”

“그럼?”

“...”

내가 되묻자 고운 입술이 잠시 달싹인다.

고요하던 눈빛도 살짝 흔들리고.

그러나 애써 마음을 다잡은 조예슬이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아니야. 내가 잠시 딴 생각을 했나 봐.”

아쉬움이 남는 말투

“고마워. 이런 큰 제안을 먼저 해줘서...”

“나야 말로 고마워. 잘 부탁해.”

우리는 짧은 악수를 나눴다.

나는 가만히 손끝을 매만진다.

짧게나마 머물다 사라진 온기가 애잔하다.

그래.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감정은 여기까지였다.

잠시 뒤,

회의가 끝이 났다.

나는 큰 줄기의 조건을 제시한 뒤 세세한 조율은 고 부장에게 맡기고 타이거 스튜디오를 빠져나왔다.

오늘 일정이 아직 남은 탓이었다.

***

늦은 오후.

나는 정영만 회장과 송영도 교수와 함께 서울 근교를 찾았다.

예전에 함께 온 적 있는 바로 그 백숙집이었다.

우리는 실한 백숙으로 든든히 배를 채우며 반주를 즐겼다.

물론 대화의 대부분은 내 작품에 대한 얘기였다.

“단순한 선악 대비가 아닌 악당과 주인공이 서로 얽혀있고, 심지어는 살아남기 위해 서로 협조를 도모하기도 해. 어떻게 그렇게 입체적인 캐릭터를 그럴 수 있지?”

고민 끝에 건넨 정 회장의 질문.

그러나 내 대답은 간단했다.

“우리의 모습이 그러니까요.”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고뇌하면서 나름의 길을 찾으려 고군분투하는 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다.

“하아,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 힘들다니까. 어떻게 고작 서른도 안 된 작가 머릿속에서 그런 묵직함이 나오는지 참나...”

정 회장이 혀를 내두른다.

나는 그런 정 회장을 위해 오래된 대사 하나를 읊조렸다.

“하늘과 땅 사이엔 우리의 철학으론 상상도 못할 일이 수없이 많다네.”

[There are more things in heaven and earth, Horatio, Than are dreamt of in your philosophy.]

햄릿이 호레이쇼에게 했던 대사였다.

그러자 정 회장이 미소를 짓는다.

“하. 그러고 보면 셰익스피어는 이미 알고 있던 거지. 하늘과 땅 사이엔 우리가 감히 상상하지 못 할 정도로 신비로운 일이 많이 있다고.”

고개를 끄덕이던 정 회장이 이내 송 교수를 바라본다.

“참 박성규 교수가 해임됐다며?”

“네, 그렇게 됐습니다.”

송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서준이를 흠집 내려고 하다가 역으로 당한 거죠. 그동안 대학원생들에게 갑질한 것도 드러났고요.”

“흠. 그래도 다행이야. 다른 사람들이 동참하지 않아서 말이야.”

사실 동참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거였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천재 작가를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무슨 수를 당할지 알 수 없으니까.’

그래도 박 교수의 실패 덕분에 문학계도 어느 정도 자정 작용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토록 바라던 일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중.

“참 그나저나 송 교수 자네 차기작은 언제 나오는 거야?”

“아마 내년쯤에는 나오지 않을까요?”

“뭐? 편집본 나왔다고 한 게 반년 전 아닌가?”

“다시 전면 수정을 하고 있거든요.”

그 말에 정 회장이 슬쩍 나를 쳐다본다.

“그것도 설마 서준이 피드백인가?”

송 교수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이제 세계적인 작가가 된 분이니 새겨들어야지.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대단하다니까.”

정 회장이 농담 섞인 칭찬을 건넨다.

그러다 이내 눈빛이 진지해진다.

“솔직히 네 목표가 노벨 문학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대로 가다 보면 언젠가는 받을 거야. 그 덕에 나도 이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고.”

나를 바라보는 정 회장의 눈빛에서 묵직한 신뢰가 느껴진다.

언제 들어도 듣기 좋은 덕담.

나도 받기만 할 순 없었다.

“그래도 직접 보고 가셔야죠. 그런 의미에서 한 그릇 더 하시죠.”

나는 일부러 백숙 한 그릇을 든든히 담아 내밀었다.

“녀석.”

피식 웃던 정 회장이 이내 차분히 말을 잇는다.

“솔직히 지금이야 나이가 어려서 그렇지 영향력으로만 보면 거장들에 못지않으니까 곧 받을 거야. 내가 확신한다니까.”

이쯤 되자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얼마 전에 비슷한 걸 하나 받기 했습니다.”

“...뭐?”

나는 정 회장에게 메일 한 통을 보여줬다.

전날 주 편집장에게 받은 메일이었다.

[「도둑고양이 네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수상]

“너, 너...”

메일을 본 정 회장의 눈이 커진다.

놀란 나머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아동 문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상이었다.

***

기쁜 소식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뮤지컬 「거장의 숨결」은 브로드웨이 공연을 마치고 영국 웨스트엔드까지 진출했다.

「당신이 머물던 자리에」와 「도둑고양이 네로」는 1년 넘게 베스트셀러 최상단을 차지한 채 내려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2년간 진행됐던 웹툰도 어느새 1부를 완결 짓고 휴재 기간에 들어섰다.

“후아, 이제 좀 쉬겠네.”

마지막 원고를 보낸 장현웅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다.

“뭐하고 쉴 건대?”

“글쎄, 여행을 좀 다녀올까? 너무 작업실에만 있었더니 바람 좀 쐬고 싶긴 하네.”

“그래? 그럼 이탈리아 어때?”

“이탈리아? 좋지. 근데 갑자기 거긴 왜?”

왜긴.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시상식이 열리는 장소가 그곳이니까.

***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

나는 엄마와 누나와 함께 예천으로 향했다.

엄마의 고향 집에 땅을 사고 집을 짓기 시작한 지 벌써 1년하고도 반.

집은 어느새 근사하게 완성되고 있었다.

“와, 여기가 우리 집이야?”

처음 본 누나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서준아...”

엄마 역시 마찬가지.

실감이 나지 않는지 몇 번이나 벽을 손바닥으로 쓰다듬는다.

“어때? 이제 좀 집 같아?”

내 물음에 엄마가 고개를 끄덕인다.

“좋다. 너무 좋아...”

엄마의 눈빛에 물기가 글썽거린다.

“울지 마. 기쁜데 왜 울어?”

“나이 들면 다 그런 거야. 슬퍼도 눈물 나고, 기뻐도 눈물 난다고...”

나는 흐느끼는 엄마를 보며 가만히 안아줬다.

“그럼 앞으론 기뻐서 울게만 해줄게.”

내 말에 엄마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잠시 엄마가 집 구경을 하게 두고 누나와 함께 옥상에 올랐다.

주변 경치와 함께 시원하게 펼쳐진 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참, 누나는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나? 나는 음...”

고민하던 누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땐다.

“편집장님 밑에서 일 좀 더 배우다가 독립 출판사 하려고. 우리처럼 어려운 작가들을 돕고 싶거든.”

누나는 당장의 성공보다 의미 있는 일을 꿈꾸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네. 가끔 내 작품도 봐주면 되겠다.”

내 말에 누나가 화들짝 놀란다.

“야,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작품을 맡으면 그게 독립 출판사니? 내가 좀 더 성장할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줘.”

“오, 듬직한데?”

“놀리지 마라. 집에선 내가 누나니까.”

“아이고 알겠습니다.”

우리가 투덕거리는 사이 엄마가 올라왔다.

우리는 난간에 서서 함께 호수를 내려다본다.

“행복하다.”

누나의 입에서 먼저 나온 말.

“그러게. 행복하다.”

마치 전염된 듯 엄마도 같은 말을 반복한다.

해가 저무는 아름다운 풍경.

이곳에서 여생을 살아갈 엄마와 간간히 들르며 웃음꽃이 필 우리 가족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어느 이야기보다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상상.

두 사람의 행복은 어느새 내 가슴에도 전염된다.

“정말 행복하다.”

내 평생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