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informal - 비격식적인, 허물없는 (4)
185.
***
환호성과 박수가 뒤섞인 자리.
매튜 저먼 이사장의 발표 이후 화려한 조명이 이리저리 헤매다가 이내 내 주위를 비춘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향한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무대에 서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플래시가 연이어 터진다.
잠시 뒤,
책 모양의 상패가 주어진다.
투명한 크리스털 안엔 내 책 「당신이 머물던 자리에」가 담겨 있었다.
“...축하합니다.”
매튜 이사장이 웃으며 악수를 권한다.
진심으로 축하할 리 없지만 주변에 시선이 많으니 어쩔 수 없겠지.
“고맙습니다.”
내가 미소를 짓자 반대로 매튜 이사장의 표정이 구겨진다. 속이 시원하지는 순간이었다.
사회자의 손이 자연스럽게 마이크 앞을 가리킨다. 수상 소감 할 차례라는 뜻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겨 마이크 앞에 선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짧은 인사를 하고 가만히 객석을 바라본다. 박수와 환호 소리가 잦아지며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나는 천천히 수상 소감을 꺼낸다.
“「당신이 머물던 자리에」는 인간이 겪는 가장 큰 고통, 부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얻기 위해 악에 받쳐 사는 우리의 삶에서 잠시 벗어나 우리가 놓친 것들, 잊고 있는 가치에 대해 말하자 했습니다.”
먼저 작품에 대한 의도.
그리고 주제에 대한 코멘트를 짧게 전했다.
“제 작품에 대해 너무 많은 얘기하는 건 피하자는 주의인데, 이 자리에 서니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네요. 나머지는 여러분들의 해석에 맡기겠습니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더 이상 작가의 것이 아닌 여러분들의 것이니까요.”
슬슬 소감을 마무리할 타이밍이었다.
“끝으로 이 영광을 전해드리고 싶은 사람이 한 명 떠오르네요.”
나는 잠시 목을 가다듬고 마이크 쪽으로 상체를 숙인다.
“엄마, 대학교 입학할 때 했던 약속을 이제야 지켰네. 많이 늦었지만 앞으로 호강시켜줄게. 기다려줘서 고마워.”
한국말로 내뱉은 소감.
가만히 듣고 있던 통역가들이 서둘러 통역을 시작한다.
잠시 뒤,
내 소감을 이해한 관객들은 하나같이 애잔한 눈빛을 띤다.
그래.
세계 만국 공통의 감동 포인트는 엄마였다.
“다시 한번 제 작품이 있게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와아아!”
잦아들었던 환호 소리가 다시금 퀸엘리자베스 홀을 채우기 시작했다.
***
5분 전.
거실에 앉아 부커상 시상식을 보던 엄마는 초조한 얼굴로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국내에선 라이브 방송을 송출하는 채널이 없었기에 현지 채널 영상을 볼 수밖에 없었다.
‘제발, 제발...’
엄마는 두 손을 모은 채 간절히 아들의 수상을 기원했다.
외국 사람이 뭐라고 떠드는데 번역도 없는 터라 엄마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잠시 뒤,
최종적으로 수상 발표가 이어진다.
여전히 못 알아듣는 외국어.
그러나 익숙한 세 글자가 귓가에 들린다.
“권서준... 우리 서준이?”
다른 건 몰라도 아들 이름 석 자만큼은 똑똑히 들린다.
엄마의 상체가 자연스럽게 모니터로 향한다. 역시나 카메라가 잡은 사람은 바로 아들 서준이었다.
“됐다. 됐다! 우리 아들이 해냈어!”
엄마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배우처럼 멋있게 앞으로 걸어가는 아들. 이내 마이크 앞에 서더니 능숙한 영어로 소감을 발표한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자체만으로 엄마의 마음은 행복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한국말이 들린다.
“엄마, 대학교 입학할 때 했던 약속을 이제야 지켰네. 많이 늦었지만 앞으로 호강시켜줄게. 기다려줘서 고마워.”
시상식을 보고 있을 엄마를 위한 배려.
그 따뜻한 마음을 알기에 엄마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우리 아들이 언제 저렇게 컸을까...’
엄마는 시큰대는 가슴을 두드리며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이 모습을 보면 누구보다 기뻐했을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
시상식 후 진행되는 만찬 자리.
나는 영국의 유명 인사와 대화를 나누며 작품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내가 창조한 이야기를 통해 수많은 해석을 나누는 시간은 언제나 질리지 않았다.
자정이 되어서야 끝이 난 축하연.
나는 올리버 편집장이 준비해준 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너 말이야. 아까 발표할 때, 어떻게 그렇게 차분했던 거야? 나는 오금이 저려서 죽을 거 같았는데.”
“맞아요.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엄청 담담하던데요?”
장현웅의 말에 올리버 편집장이 맞장구를 친다.
사실 반은 맞는 말이었다.
시상자를 발표하기 직전 매튜 이사장의 짧은 표정 변화로 어느 정도 시상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으니까.
‘재미있었지.’
나를 제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내 수상 결과를 발표 하다니, 얼마나 속이 불편했을까.
그러나 굳이 말할 필요는 없는 내용.
나 혼자 알고 있는 게 훨씬 더 즐거운 일이었다.
“순간 멍했는데, 그렇게 보였나 보네요.”
내 대답에 올리버 편집장이 미소를 짓는다.
“뭔가 더 있는 듯 하지만 묻진 않겠습니다.”
역시나 예리한 사람이었다.
“참, 이틀 동안은 많이 바쁘실 테니 얼른 쉬세요. 그럼 내일 아침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편집장님.”
올리버 편집장이 고개를 젓는다.
“고생은요. 너무 즐거워서 집에 가서 아내와 한 잔 더 하려고요.”
올리버 편집장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하긴, 자신이 먼저 알아보고 선택한 작품의 수상만큼 편집장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도 없었다.
‘게다가 송 교수의 작품을 놓친 기억이 있던 터라 오늘의 결과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겠지.’
나 역시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쉬자. 편집장님 말씀대로 내일부터는 더 바쁠 테니까.”
장현웅이 자연스럽게 앞장서서 로비에 들어선다.
그런데 그때,
한 남자가 저 앞에서 나를 향해 다가온다.
“작가님, 권서준 작가님!”
어딘지 다급해 보이는 발걸음.
나는 단번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조지 학회장이군.’
낭독회에서 못 본 게 내심 아쉬웠는데 조지 학회장은 숙소까지 찾아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전 조지라고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왕손을 못 알아보면 안 되겠지요. 물론 벤에게도 말씀 많이 들었고요.”
“아, 그랬군요.”
조지 학회장이 어색하게 웃더니 이내 책 한 권을 꺼낸다.
“그렇다면 제가 이 책을 선물 받은 것도 아시겠죠?”
“물론입니다.”
“그럼 실례가 아니라면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늦은 밤.
왕손이 찾아와 직접 사인을 청하는 상황.
장현웅은 믿기지 않는 듯 쳐다볼 뿐이었다.
“물론이죠.”
나는 흔쾌히 책을 받아 사인을 해줬다.
“정말 감사합니다. 작가님의 책 덕분에 큰 위로를 받았거든요.”
조지 학회장의 상처를 알기에 어떤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다행이네요. 다만 단순한 위로에서 끝나지 않길 바랍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조지 학회장이 되묻는다.
“책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각기 여행을 떠납니다. 추억을 되새기며 서로의 부재를 다시 한번 정리하죠. 결국 상처는 직접 마주 보지 않으면 그저 짧은 위로에서 끝나는 법이니까요.”
“...”
순간 조지 학회장의 표정이 멍해진다.
그리고 이내 내 말을 이해했는지 눈빛이 진지해진다.
“한 번 용기 내보시죠.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조지 학회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좋은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한번 고민해보겠습니다...”
조지 학회장의 얼굴에 짧은 근심이 드리운다. 무슨 걱정을 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안타깝지만 인생은 대신 살아줄 수 없으니까.’
이제부턴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
다음 날.
늦은 오후, 버킹엄 궁전 앞.
공원 주변을 산책하던 조지 학회장은 어젯밤 나눈 권서준 작가와의 대화를 떠올린다.
‘한 번 용기 내보시죠.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조지 학회장은 가만히 버킹엄 궁전을 바라본다.
상처로 얼룩진 공간.
어머니와의 추억으로 가득 찬 곳.
그의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후우...”
깊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조지 학회장은 이내 고개를 젓는다.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어...’
언제까지고 상처를 피해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두 부자처럼 나도 한번 가보는 거야...’
조지 학회장은 어금니를 지그시 문 채 천천히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보초를 서던 근위병이 조지 학회장을 보고 놀란다.
“조, 조지 학회장님?”
놀라는 근위병의 반응처럼 오랜만에 찾은 버킹엄 궁전.
“들어가도 되겠지?”
“그거야 물론입니다.”
수행원도 없이 오는 건 처음이었다.
아니, 몇 년 사이 방문한 적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정말 오랜만이군.’
조지 학회장은 천천히 버킹엄 궁전 안을 거닐었다.
어머니와 함께 앉았던 벤치.
손을 잡고 거닐었던 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상처가 되어버린 장소. 그 상처가 견디기 힘들어 버킹엄 궁전을 도망치듯 나와 지금에 이르렀다.
‘마주 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는데...’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어머니의 흔적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더듬었다.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따스하게 안아주던 그 품이 떠오른다.
그래.
어머니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렸다.
9살 어린 아이나, 다 큰 성인이나 그 아픔의 크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은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함께하지 못한다 한들 영원한 이별은 아니라는 것을...’
도망치려 했던 아픔을 가슴에 담아본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아픔 안엔 슬픔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와의 아름다웠던 추억도 함께 담겨 있었다.
“하아...”
깊은 깨달음과 함께 감동이 밀려든다.
애써 묻어놨던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다시금 피어난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자던 촉감.
잠들 때까지 토닥여주던 어머니의 손길이 느껴진다.
얼굴을 감싼 조지 학회장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렇게 조지 학회장은 오래전 떠난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그리고,
조지 학회장의 모습을 안쓰럽게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퀸 엘리자베스.
곧 백 세를 바라보는 영국의 여왕이었다.
***
늦은 오후, 헐리웃.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토크쇼 ‘지미쇼’.
진행자인 지미 스미스는 출연자 명단을 살펴보고 있었다.
‘하아. 다음 달 특집 쇼에 초대할 셀럽이 마땅찮군...’
제작진에서 섭외한 셀럽들은 하나같이 뻔한 인물들뿐이었다.
이미 다른 토크쇼에서 몇 번이나 출연한 탓에 뽑아낼 소스도 많지 않았다.
‘흠. 어디 새로운 인물 없나? 스페셜하고, 신선하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확 끌 만한 사람...’
머릿속을 더듬던 지미는 이내 고개를 젓는다.
‘하긴 있으면 벌써 섭외했겠지.’
흘러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며 PD가 안으로 들어온다.
“이봐, 지미. 올란 감독에 대한 자네 칼럼 때문에 난리가 났다면서?”
호들갑을 떠는 PD와 달리 지미의 표정은 차분했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대단한 일이지. 올란 감독 쪽에선 엄청나게 충격을 먹었을 걸?”
“팩트만 담은 거야. 불만이면 고소하라고 해.”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던 지미가 이내 말을 이었다.
“솔직히 한물갔잖아. 반짝이던 영감은 사라지고, 연출력은 평범해. 가끔 무리수를 두는 탓에 어렵기만 한 작품을 쏟아냈지. 어렵다고 다 예술인 건 아니니까. 대체 그걸 왜 모르는지. 쯧쯧.”
지미는 안타까운 듯 혀를 찼다.
“하긴, 그건 그렇지. 근데 이번 작품은 좀 다를 거라는 소문이 많던데?”
“왜? 어디서 말도 안 되는 대본이라도 떨어졌대?”
“어. 그렇다던데?”
“...뭐?”
PD는 되묻는 지미를 향해 신문을 내민다.
PD가 펼친 페이지엔 권서준 작가의 부커상 수상 기사가 담겨 있었다.
“이 친구가 올란 감독의 차기작을 쓴 한국 작가인데, 이번에 부커상을 수상했대. 현지 반응도 엄청나다고 하던데?”
기사를 읽어 내려가던 지미의 미간이 모인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소설도 썼다는 건가?”
“아니, 엄밀히 말하면 소설가가 시나리오를 썼다고 할 수 있겠지. 순서만 보면 그래.”
지미의 눈빛이 진지해진다.
“그래? 그렇게 양쪽에 모두 성공을 거두기란 쉽지 않은데... 대단하군.”
“사실 그뿐만이 아니야. 내년 상반기에 브로드웨이에서 런칭하는 뮤지컬 작가이기도 하거든.”
“뭐, 뭐?”
“게다가 평론가들의 반응을 보면 작품성도 어느 정도 갖춘 모양이야.”
이쯤 되니 지미는 믿을 수가 없었다.
부커상 수상자가 영화 대본을 쓰고, 브로드웨이에 진출하는 뮤지컬의 작가라니.
‘이건 거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전개 아닌가?’
그러나 다시 봐도 기사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영국 왕립예술학회 회원 거절까지.
그야말로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이 작가가, 올란 감독 작품의 대본을 쓴 작가라는 거지?”
기사에 담긴 권서준의 사진을 바라보던 지미의 표정이 진지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