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84화 (184/203)

184. informal - 비격식적인, 허물없는 (3)

184.

***

퀸엘리자베스 홀(Queen Elizabeth Hall).

오페라, 연극, 무용 등 각종 공연이 일 년 내내 진행되는 공연계의 메카.

런던의 명소답게 조지 학회장에게도 익숙한 곳이었다.

‘세계 민속 음악 페스티벌, 해외 유명 오케스트라 초청 공연, 레오나르도 다빈치 화가전과 같이 중요 행사 때마다 영국 왕실 대표로 참석했으니까.’

뒤늦게 자리를 잡은 조지 학회장은 다른 관객들의 방해가 되지 않게 맨 뒷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늦지 않았군.’

약 900석 가까이 되는 객석은 이미 가득 차 있었다.

어두운 무대.

관객들은 하나같이 한 권의 책을 든 채 한 사람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지 학회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들고 온 책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당신이 머물던 자리에」

오랜 벗인 베네딕트의 추천으로 마지못해 읽기 시작한 책이었다.

‘술을 사겠다는 약속이 없었다면 절대 읽지 않았을 책이지.’

그런데,

첫 장을 넘기자마자 왜 베네딕트가 추천했는지 알 수 있었다.

서로가 부재한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

그 둘의 모습을 통해 진실된 가족의 사랑이 무엇인지 되뇌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상실을 가슴 아파하면서도 잊지 않았어.

자연스럽게 어머니를 상실한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나도 그랬지.’

갑작스러운 사고로 돌아가신 어머니.

전 세계 언론은 어머니의 비보를 전하느라 바빴고, 엘리자베스 여왕을 비롯해 왕가의 어른들은 사건을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혈안이 된 상황이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 어린아이의 상처를 위로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은 오로지 9살 어린 아이의 몫이었지.’

왕가의 어른들은 무덤 앞에서 우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찰리, 울면 안 돼. 카메라가 있잖아.’

‘참아야 해. 왕족은 쉽게 눈물을 보여선 안 된다고.’

그래서 참았다.

강압에 의해 억지로 슬픔을 눌렀다.

그렇게 흐르지 못한 눈물은 그대로 가슴에 남아 돌처럼 굳어졌다.

흔히 말하는 응어리.

빼낼 수도, 밀어낼 수도 없이 가슴 속에 박혀버린 상처.

그런데 처음으로 그 응어리가 흔들린다.

바로 책에 담긴 온기 덕분이었다.

‘참 따뜻한 글이야. 내 평생 받아본 적 없는 위로였지.’

특히 위로받은 문단.

친히 책갈피를 끼워 넣은 페이지를 펼친다.

형광펜으로 길게 칠해진 두 페이지.

단 하나도 빼놓을 수 없어서 색칠하듯 채워진 단락이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담담하게 묘사한 부분.

가족의 부재를 위로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 어느 음악보다, 그 어느 심리 치료보다 오히려 그의 마음을 위로한 장면.

억지 위로가 아닌, 두 사람의 담담한 기억을 더듬어가는 내용이 조지 학회장의 마음을 건드렸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는지 궁금했다.

잠시 뒤,

조명이 켜지고 한 사내가 무대 위에 나타난다.

동시에 기대감에 찬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공연장에 울려 퍼진다.

‘저 사람이 권서준 작가군.’

얼굴은 이미 사진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본 모습은 훨씬 더 키가 크고, 단단한 모습이었다.

‘배우라고 해도 믿겠는데?’

핀 조명을 받은 연극배우처럼 그는 무대 가운데 앉아 미소를 짓는다.

“이렇게 먼 곳까지 초대해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중저음의 듣기 좋은 음색.

게다가 원어민과 다름없는 자연스러운 발음에 몰입감이 확 올라간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단락을 여러분들과 함께 읽어보려 합니다.”

잠시 뒤,

권서준이 첫 구절을 읽어간다.

“아버지의 걸음은 한없이 느렸다...”

순간 조지 학회장의 눈이 커진다.

‘어? 저 부분은...’

조지 학회장은 들고 있던 책을 서둘러 넘긴다.

바로 자신이 밑줄 친 그 단락이었다.

먹먹해지는 마음에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던 바로 그 부분이었다.

“힘겹게 내뱉는 호흡만큼이나 느리고 더뎠다. 그러나 아버지는 기어코 걸음을 옮겼고, 언제나 그렇듯 내게 와 닿았다.”

권서준 작가는 담담하게 읽어 내려간다.

분명 아버지로 묘사된 장면이었다.

그런데 조지 학회장은 머릿속엔 자연스럽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넘어져 울면 어디선가 달려와 자신을 안아주던 어머니의 손길이 떠오른다.

‘어, 어머니...’

어디서 불러도 괜찮냐고 달려와 안아주던 어머니.

그러나 어머니는 더 이상 불러도 올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

어디선가 따스한 기운이 느껴진다.

마치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길이 뺨에 와닿는 느낌.

아니,

그건 손길이 아닌 다른 느낌이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무언가.

그건 눈물일 수도 있고, 어머니와의 기억일 수도 있고, 수십 년을 참아온 슬픔일 수도 있었다.

한 번 흘러내린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뒤이어 감정이 격해지더니 어깨마저 들썩인다.

‘안 돼... 안 돼...’

조지 학회장은 애써 입을 막은 채 서둘러 낭독회장을 뛰쳐나온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내달려 간신히 차에 올라탄다.

조지 학회장은 핸들에 머리를 묻은 채 입술을 깨문다. 그러나 단단히 문 입술 사이로 울음이 터져 나온다.

그래.

단순한 울음이 아니었다.

그건 수십 년 동안 심장에 박힌 응어리였다.

조지는 마침내 울음을 토해낸다.

마치 9살 어린 애처럼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

낭독회는 성공리에 마무리됐다.

나는 길게 줄을 선 독자들을 위해 한참이나 사인을 했다.

1시간 가까이 지나서야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고생했어. 진짜 완벽했다.”

장현웅이 엄지를 척 세운다.

나는 미소를 짓고는 주변을 살폈다.

“왜? 누구 찾아?”

“올 사람이 있어서.”

“누구?”

나는 대답 대신 주변을 둘러본다.

내가 찾는 사람은 조지 학회장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그를 기다리는 건 며칠 전 받은 베네딕트의 연락 때문이었다.

‘작가님의 책을 친구에게 선물했습니다.’

그 친구가 바로 조지 학회장이었다.

나는 그의 상처는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를 수 없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고스란히 언론에 공개되니까.’

왕족의 삶이란 그랬다.

화려해 보이지만 결코 아름답지 못한 게 그들의 삶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건 달라지지 않지.’

한 가지 다행인 건 그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했다는 점이었다.

나는 낭독회를 진행하는 와중에 급히 뛰쳐나가는 조지 학회장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좋은 징조였다.

울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감정이 살아났다는 뜻이니까.

‘뭐 인연이 있다면 다시 볼 수 있겠지.’

나는 마지막 사인을 끝으로 낭독회장을 빠져나왔다.

이제 영국에서 남은 일정은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부커상 시상식.

***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부커 낭독회.

권서준 작가의 근황 보도가 한국에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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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서준 ‘당신이 머물던 자리에’ 부커 낭독회 성료]

권서준은 특유의 차분하고 울림 있는 목소리로 113페이지의 문단을 읽어 내려갔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아들의 에피소드로, 상처인 줄 알았으나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 아들의 모습을 통해 가족의 사랑을 전해주는 내용. 작품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오해와 이해의 두 측면에 대해서 깊이 있는 설명과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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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서준 작가는 “제 이야기가 인종과 국가를 넘어 독자 한분 한분의 가슴에 닿기를 바라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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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과 국가를 떠나 세계인을 위해 활짝 열린 그의 작품은 이번 부커상 후보를 통해 전 세계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부커상 후보에 오름으로써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말에 권서준 작가는 ‘송영도 교수와 같이 먼저 그 길을 닦아준 선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겸손한 소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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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와이즈 출판사 회장실.

기사를 보던 정영만 회장이 천천히 입을 연다.

“송영도 교수와 같이 먼저 그 길을 닦아준 선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라...”

정 회장이 일부러 소리 내서 읽는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송 교수는 생각에 잠긴 듯 차를 마신다.

“자네, 제자 하나는 잘 키웠군.”

“스스로 큰 거죠. 제가 더할 게 없는 친구였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 회장이 고개를 젓는다.

“스승이나 제자나 어쩜 저렇게 한결같은지. 겸손도 지나치면 교만처럼 보여. 이럴 땐 좀 즐기라고.”

정 회장의 너스레에 송 교수가 피식 미소를 짓는다.

“그나저나 대단해.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더니, 이제는 왕립예술학회 추천도 거절했다고? 참나, 아주 이슈 메이커구먼.”

말과 달리 정 회장의 표정에선 흐뭇함이 가시지 않는다.

“생각이 있겠죠.”

“그래. 녀석이 아무 생각 없이 그런 일을 벌일 놈은 아니니까.”

“기다려보시죠. 아마 좋은 소식이 있을 테니까요.”

확신에 찬 송 교수의 말.

당연히 근거 있는 확신이었다.

***

이틀 뒤, 이른 저녁.

런던에 위치한 이벤트 홀엔 수많은 취재진과 유명 인사들로 붐볐다.

바로 이곳에서 부커상 시상식이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최종 발표만 남은 상황.

나는 촬영과 함께 언론들과 간단한 수상 기대감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권서준 작가님께서는 현지 낭독회에서 뜨거운 호응을 받으셨는데요, 이번 일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지구 반대편에도 제 작품을 사랑해주는 독자가 있다는 사실이 뜻깊었습니다. 그 독자들과 제가 좋아하는 구절을 읽으며 생각을 나눌 수 있어서 더욱 의미 있었던 시간이었고요.”

“몇몇 평론가들은 벌써부터 작가님의 작품이 상실의 아픔을 겪는 현대인들에게 큰 위로자의 역할을 했다는 평가입니다. 그만큼 독자들의 감동을 이끌어내는 작품이었다는 반응일 텐데요.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이었나요?”

“전 언제나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이야기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다룬 이야기죠. 사랑, 희망, 그리고 분노처럼 우리가 쉽게 느끼고, 바라고, 해결하고 싶은 것들이 바로 그런 소재가 되겠죠. 저 역시도 벗어날 수 없는 기본적인 것들은 다루는 게 바로 제 작품의 매력이지 않을까요?”

기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이내 가장 하고 싶었던 질문을 꺼낸다.

“그렇군요. 그럼 마지막으로 이번 수상 결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최종 후보에 오른 작가의 생각이 궁금한 것. 그러나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수상 결과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넘어서기 위한 문학은 제게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저 제 작품이 메마른 현대인의 가슴에 심기는 한 알의 꽃씨가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나는 시상 결과와 상관없이 앞으로도 내 작품 세계를 보여주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며 인터뷰를 마쳤다.

최종 후보를 위해 마련된 원형 테이블로 돌아오자 먼저 기다리고 있던 올리버 편집장이 나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한국에서는 인터뷰도 거의 안 하셨다고 들었는데, 이 정도면 프로 인터뷰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안 한 거지, 못 한 건 아니니까요.”

옆에 있던 장현웅이 슬쩍 끼어든다.

“아하. 그건 생각 못 했군요. 괜찮으시다면 나중에 저희 출판사 인터뷰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잠시 뒤,

축하 공연과 함께 부커상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들뜬 분위기.

최종 발표를 앞두고 잠시 긴장감이 흐른다.

최종 후보에 오른 6명의 작가.

후보들이 앉은 테이블 중심으로 뜨거운 관심이 전방을 향한다.

그리고 잠시 뒤,

부커상 발표가 이어진다.

부커 재단의 매튜 이사장이 강단에 선다.

‘재미있군.’

나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수상 결과를 발표하다니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카드를 든 매튜 이사장은 호흡을 고르더니 천천히 입을 연다.

“제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부커상 발표를 맡게 되어 영광이네요.”

잠시 말을 멈춘 매튜 이사장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한 번 문다.

매튜 이사장은 이내 숨을 고르며 천천히 입을 연다.

“...이번 연도 부커상은 ‘당신이 머물던 자리에’를 쓴 권서준 작가입니다.”

발표와 함께 조명이 어지럽게 나를 비춘다.

“서, 서준아!!”

장현웅은 감격했고,

올리버 편집장도 온 힘을 다해 손뼉을 친다.

지이잉.

그 순간 내 휴대폰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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