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uncomfortable - 불편한 (1)
175.
***
LA에 위치한 엔플릭스 본사.
저녁노을을 바라보던 루카스 대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대체 왜 아무도 연락이 없는 거야?”
루카스 대표가 기다리고 있는 건 바로 제프리 음악 감독의 연락이었다.
OST 문제로 올란 감독과 담판을 짓겠다고 간 제프리 감독은 이틀이 지났지만 특별한 연락이 없었다.
“미치겠군.”
다른 OTT 플랫폼과의 경쟁으로 인해 가장 중요한 시기에 발생한 감독과 음악감독의 의견 대립.
그것도 각자의 분야를 대표하는 네임드들이었기에 루카스 대표도 섣불리 나설 수가 없었다.
답답한 루카스 감독의 원망은 애꿎은 곳으로 향했다.
‘그래.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바로 권서준 작가라고.’
보고 받기로는 OST에 대해 최초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권서준이었다. 게다가 괜찮은 작곡가가 있다고 소개해준 사람 역시 권서준이었고.
‘권 작가 그 친구 대체 왜 이렇게 나대는 거지?’
작품의 성공을 위해 꾹 참고는 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고작 해봐야 작가 주제에 여러 면에서 루카스 대표의 신경을 긁었다.
처음엔 베네딕트 때문에, 두 번째는 수준급인 대본 때문에, 세 번째는 올란 감독의 적극적인 추천 때문에 넘어갔지만 갈수록 정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더 화가 나는 건 끝내 권서준 작가의 생각대로 끌려간다는 점이야.’
계약 전 감독의 공동 연출을 제안한 것도 그렇고, 매번 권서준의 생각대로 진행되는 게 루카스 대표 입장에선 못마땅했다.
안 그래도 벼르고 있던 상황.
이번만큼은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그래. 어쩌면 이번 제프리 감독과의 갈등을 통해서 그 잘난 입을 다물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이미 대본을 받았고, 계약은 진행됐고, 촬영도 시작한 상황에서 작가의 역량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한 번쯤 어깨를 눌러줄 필요가 있지.’
헐리웃 스타들과의 기 싸움에 이미 익숙한 루카스 대표에게 작가하나 기죽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물론 아무 근거 없이 압박하면 문제가 되겠지만 이번처럼 적당한 이유가 있다면 오히려 적극 활용할 수 있었다.
지이잉.
단단히 벼르고 있는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자는 제프리 감독이었다.
루카스 대표가 서둘러 전화를 받는다.
“어, 제프리 감독. 왜 이렇게 연락이 없었어?”
-죄송합니다. 일정이 좀 바빠서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래, 직접 만나보니 어땠어?”
-하아. 힘드네요. 여러모로.
지쳐 보이는 제프리 감독의 목소리.
루카스 대표는 예상대로 상황이 어그러졌다고 판단했다.
“하아. 그래,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내가 생각해봤는데 문제는 권 작가야. 내가 그 친구한테 따끔하게 한번 얘기해두겠네. 아무리 생각해도 작가가 OST까지 간섭하는 건 아니지. 안 그래?”
자존심 센 제프리의 성격을 알기에 한 말이었다. 뒤에 이어질 말도 어느 정도 예상한 채 건넨 말.
그런데,
휴대폰 너머로 전해지는 말은 뜻밖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권 작가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순간 루카스 대표의 표정이 굳는다.
큰 눈만이 소처럼 끔뻑끔뻑 거린다.
“뭐, 뭐라고?”
-권 작가가 추천한 곡은 아주 잘 나왔습니다.
“그럼... 대체 뭐가 힘들다는 뜻이지?”
-아, 그게... 작품 해석을 제대로 못 한 제 자신한테 실망해서 힘들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번 만남을 통해 여러모로 자극받았거든요.
루카스 대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제프리 감독이라고?
“그, 그럼 곡은 어떻게 되는 건가?”
루카스 대표의 말에 제프리 감독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당연히 권 작가님이 추천한 곡으로 가야죠. 작품을 위해서도, 캐릭터의 이미지를 살리는데도 그게 훨씬 나을 거 같아서요.
“...”
루카스 대표는 말문이 막혔다.
제프리 감독이 어떤 사람인가?
헐리웃에서도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음악감독이었다.
오죽하면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감독에게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까지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지?’
루카스 대표의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믿기지 않는 루카스 대표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권 작가의 말대로 가겠다고? 자네, 그게 진심인가?”
-네, 윤서원의 테마곡은 권 작가가 추천한 곡으로 갈 겁니다. 한번 들어보면 왜 그런지 대표님도 이해하실 겁니다.
루카스 대표의 눈이 빠르게 깜빡거린다.
그만큼 믿기 힘든 태도의 변화.
한술 더 떠 제프리의 기분은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이게 대체...’
이해할 수 없는 제프리 감독의 반응.
루카스 대표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며칠 뒤.
나는 OST 문제로 다시 한번 타이거 스튜디오 본사를 찾았다.
마침 촬영이 없는 날이라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과 정은미 피디를 함께 만났다.
“엔플릭스와도 얘기가 잘 됐습니다. 아마도 제프리 감독이 잘 얘기 한 거 같아요.”
정 피디는 한결 편안해진 말투로 말했다.
“얘기 들었습니다. 권 작가님께서 제프리 감독에게 좋은 말씀을 해주셨다고 하더군요.”
“그저 오해하고 있는 부분들을 짚어줬을 뿐입니다. 월권이라 생각할 줄 알았는데, 다행히 잘 이해해줬고요.”
“권 작가님을 직접 만났으니 이해할 수밖에 없었겠죠. 저 역시 경험해봤잖아요.”
올란 감독이 짓궂은 미소를 짓는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이제 모든 건 올란 감독님의 손에 달렸네요.”
“아,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 몫이니까요. 월권하지 말아 주세요. 연출은 제가 합니다.”
올란 감독이 건네는 농담.
그 한마디에 회의실 안에 웃음꽃이 핀다.
좋은 징조였다.
그만큼 친해졌다는 뜻이었고,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도 허물없이 나눌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며칠 뒤,
미국에 도착한 제프리는 최종적으로 OST 목록을 보냈다.
들을수록 하나같이 주옥같은 곡.
몇몇 곡은 이전보다 훨씬 더 작품과 캐릭터에 어울리게 편곡된 상태였다.
‘각성했군.’
이제야 내가 원하는 작품의 콘셉트를 이해한 것.
대본과 연출.
그리고 OST와 배우의 연기까지 완벽한 상태.
더 이상 걱정할 일은 없었다.
‘이제야 좀 쉴 때군.’
나는 모처럼 가질 휴가에 느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
며칠 뒤.
나는 주말을 맞이해 엄마, 누나와 함께 근교 나들이를 떠났다.
연천에 위치한 허브 농원.
꽃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특별히 찾은 곳이었다.
“너무 예쁘다. 어쩜 이런 색깔이 나오는 거지?”
엄마는 연신 감탄을 터트리며 미소를 지었다.
유리 온실에서 자라는 허브.
그리고 야외 정원에 펼쳐진 각양각색의 꽃들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향기로운 꽃향기와 보랏빛으로 물든 아름다운 풍경이 눈과 코를 즐겁게 만들었다.
가만히 감상하던 엄마가 넌지시 입을 연다.
“서준아, 참 신기하지?”
“뭐가?”
“하나씩 있어도 예쁘지만 이렇게 모여 있으면 훨씬 더 예쁘니 말이야.”
엄마의 말대로였다.
저마다의 아름다운 색깔을 뽐내며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세상을 수놓고 있었다.
“좋아?”
“응. 행복하네. 아들 덕분에.”
엄마는 가만히 내 손등을 두드린다.
꽃잎을 보며 감동한 엄마의 표정은 마치 소녀의 얼굴 같았다.
“잠깐 여기 앉아서 구경하고 있어. 마실 것 좀 사 올게.”
나는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옆에 있던 누나가 얼른 뒤따른다.
“왜? 쉬고 있어. 내가 다녀올게.”
“어? 아, 아니야. 같이 가.”
누나는 종종걸음으로 나를 쫓아온다.
매점까지 가는 길에 계속해서 힐끗거린다.
“왜 그래? 할 말 있어?”
“어? 아, 어...”
고민하던 누나가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사실... 내가 네 작품 맡기로 했어.”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했는데 내 예상대로였다.
“알아.”
“어? 안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주 편집장님이 작가 의견도 묻지 않고 누나한테 맡겼을까 봐?”
“그거야 그렇지만... 그럼 혹시 너도 오케이 한 거야?”
“물론이지.”
“정말? 내가 맡아도 될까?”
누나는 걱정스러운 듯 되물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거 내가 아는데 왜 그렇게 자신이 없어? 내가 전에 말했잖아. 내 작품, 언젠가는 누나한테 맡길 거라고.”
“서준아...”
누나는 감동한 듯 말끝을 흐린다.
그러나 이내 주먹을 움켜쥐며 야무지게 입을 다문다.
“그래. 나 잘할게. 믿어줘.”
어느새 걱정은 사라지고 뜨거운 열정이 엿보인다.
‘그래, 누나는 천생 편집자라고.’
작가를 꿈꿨을 때보다 훨씬 더 살아있는 표정과 에너지는 누나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하긴, 제 옷에 맞는 옷을 입었을 때 사람은 더 아름답게 빛나는 게 당연했다.
‘마치 제철에 피어난 저 꽃들처럼 말이지.’
시원한 바람에 그윽한 꽃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행복하다는 말로 부족한 하루.
내가 그토록 바라던 삶의 모습이었다.
***
늦은 오후.
엄마와 누나를 집까지 데려다준 뒤 나는 황태규를 찾았다.
그동안의 진행 상황을 체크하기 위함이었다.
“작업은 어때? 잘 돼?”
“무조건 잘 돼야죠.”
“한번 볼까?”
내 말에 황태규가 자신 있게 원고를 내민다.
지난번 원고보다 훨씬 더 느낌 있는 그림체.
직접 캔버스에 그려서인지 이미지가 더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좋네. 게으름 피우진 않았나 보네?”
내 말에 황태규가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하죠. 이게 어떤 기회인데요.”
야무진 표정에선 숨길 수 없는 열정과 자신감이 엿보인다.
여러모로 안심이 되는 상황.
“참, 앞으로 편집 관련 내용은 우리 누나가 연락할 거야.”
“아, 네. 잘 부탁드린다고 연락드려야겠네요.”
“그래. 대신 일정은 빡빡할 거야. 늦어도 올해 안으로 생각하고 있거든.”
“와우, 정말 빡빡한데요? 그래도 뭐 걱정하지 마세요. 무조건 해낼 테니까요.”
황태규의 눈에서 올인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하긴, 모든 걸 포기하려던 순간 찾아온 기회.
그 간절함이 황태규를 더욱 열정적으로 만들었다.
‘이제는 기다리는 일만 남았군.’
마치 아름답게 피어날 꽃을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처럼 내 마음에도 어느새 설렘이 깃들기 시작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두 달이 지났다.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한풀 꺾이고, 여름의 기운도 시들해질 때쯤 영화 촬영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당초 예상대로라면 이미 촬영이 끝나야 했지만 무려 한 달 이상이나 길어진 상태.
그만큼 올란 감독이 촬영에 심혈을 기울인 탓이었다.
이미 본인 분량의 촬영을 마친 정은미 피디가 작업실을 찾아왔다.
“감독님 말씀으로는 내년 하반기에 개봉 예정이라고 하셨어요.”
헐리웃 시스템을 안다고 해도 꽤나 빠른 일정이었다.
“괜찮을까요?”
내가 묻자 정 피디가 고개를 끄덕인다.
“살인적인 스케줄은 맞는데, 감독님이 빨리 진행하고 싶다고 하셔서요. 요즘엔 거의 잠도 안 주무시더라고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몇 년째 해갈되지 않은 창작에 대한 욕구를 이번만큼은 마음껏 해소했으니까.
그 결과물을 누구보다 빨리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역시 그랬었지.’
문득 처음 연극 대본 ‘햄릿’을 썼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작은 등불 아래에서 밤을 새워가며 작업한 대본. 그 대본의 가치를 알기에 나는 세상에 빨리 보여주고 싶었다.
‘더 많은 사람이 웃고, 즐기고, 행복하길 바랐지.’
내 오랜 벗 리처드 버비지와 캐릭터와 연기에 대해 밤새 토론하고, 두세 장이 넘는 대사를 외워가면서도 우리는 기뻤다.
‘우리가 창조한 세상이었으니까.’
힘들고 피곤했지만 우리의 열정을 막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창조한 또 하나의 이야기가 세상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아마 이쯤일 텐데.’
나는 가만히 휴대폰을 바라봤다.
지이잉.
그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올리버 편집장이었다.
-권 작가님! 됐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외침.
그러나 격앙된 올리버 편집장의 목소리에 나는 단번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작가님이, 부커상 최종 후보에 선정됐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었다.
그러나 내 기분은 예상보다 차분했다.
기쁘지 않냐고?
아니, 내겐 더없이 기쁜 소식이지.
다만 이 소식이 누군가에겐 더없이 불편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게 내가 바라는 거지만.’
문화 선진국이라 착각하는 유럽도,
선민의식에 찌든 국내 문학계도,
조금은 불편하게 만들 필요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