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74화 (174/203)

174. addiction - 탐닉, 중독 (7)

174.

***

“훌륭하군요.”

차갑게 굳어있던 제프리 음악 감독의 표정이 서서히 풀어진다.

“늦었지만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일하던 방식과 많이 다른 전개라 예민했던 것 같습니다.”

확실한 결과를 확인하고 나자 군말 없이 모든 상황을 인정하고 태도를 바꾼다.

내 예상대로였다.

그러나 제프리 감독의 행동은 단순히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프리 감독 역시 이번 작품에 최선을 다한 거야. 다만 그 최선이라는 기준에서 이견이 있었을 뿐인 거지.’

애초에 자존심만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면 이 먼 한국까지 올 이유가 없었다.

엔플릭스에 정식으로 요청하거나 언론 플레이를 통해 끝까지 반대하는 방법도 있었으니까.

그 마음을 알기에 나 역시 예의를 표했다.

“아닙니다. 처음 이 소식을 들으셨을 때 기분 상하셨을 건 당연합니다. 분업화가 잘 되어있는 헐리웃 시스템이 효율적인 것도 알고 있고요. 하지만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오히려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게 낫지 않을까요? 우린 각자의 보트를 탄 게 아니라 한배를 탄 사람이니까요.”

“...”

가만히 듣고 있던 제프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한배라... 맞습니다. 가끔 내 역할에만 집중하다 보면 그걸 잊을 때가 많은 것 같네요. 따지고 보면 분업화된 시스템도 보다 나은 결과를 위한 건데, 각자의 입장에서 목소리만 내다보니 작품이 산으로 가는 경우도 많고요.”

결정을 내린 뒤에 제프리 감독의 반응은 호쾌했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덕분에 이렇게 다시 한번 기본을 배우게 되네요.”

제프리 감독의 눈빛이 어느새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기분을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이거 사죄의 의미로 제가 식사 대접을 하고 싶은데,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제프리 감독과의 식사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영화에서 음악의 요소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고, 그와 관련된 대화를 충분히 나눌 수 있는 자리라면 내가 먼저 제안해야 할 정도니까.

“물론입니다.”

우리는 기분 좋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

늦은 밤.

와이즈 출판사 편집실.

모두가 퇴근했지만 한 명만은 늦게까지 남아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네, 네. 그렇게 진행해주세요. 교열은 다시 한번 확인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네, 네. 감사합니다.”

경쾌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권지연.

늦은 밤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야근을 자청한 상태였다.

권지연이 이토록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한가지였다.

‘내가 맡은 작품들의 성공 여부가 내 손에 달려있으니까.’

작가의 손에서 멋진 이야기가 탄생했지만 그 이야기가 오랫동안 살아가게 해주는 게 바로 편집자인 자신의 역할이었다.

“역시, 지연 씨 아직도 퇴근 안 했구나?”

그때,

사무실로 돌아온 주상진 편집장이 묻는다.

“아, 이것만 하고 가려고요. 퇴근하신 거 아니었어요?”

“근처에 미팅이 있었는데 끝나고 잠시 들렀어. 아무래도 이러고 있을 거 같아서. 자.”

주 편집장이 편의점 봉지를 내민다.

안엔 각종 군것질거리와 에너지 드링크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아,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그래. 잘 먹고 힘내야지. 열심히 하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아. 근데 그거 알지? 너무 무리는 하지 마. 야근 수당 꼬박꼬박 청구하고. 알았지?”

“네? 아니에요. 제가 좋아서 야근하는 건데요.”

“에이, 그래도 안 되지. 누굴 악덕 편집장으로 만들고 싶은 거야?”

“저, 절대 아니죠.”

“그러면 빠짐없이 야근 수당 청구하라고. 알았지?”

이쯤 되니 권지연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어? 근데 이건 뭐야?”

주 편집장은 책상 옆에 놓인 원고를 집어 든다. 바로 권서준 작가의 그림동화 원고였다.

“이야. 얼마나 많이 봤으면 이렇게 해졌냐?”

주 편집장의 반응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누가 보면 몇십 년 바란 종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 그게...”

권지연이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어라?”

주 편집장은 원고 여백을 가득 채운 메모를 확인한다.

일종의 마인드맵이었다.

작품 세계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수정 보완 계획이었다.

[죽음과 상실의 진원지를 찾아서]

죽음 -> 상실의 시작.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세계의 탄생.

Q. 부모의 죽음은 네로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생소할 수 있는 콘셉트를 토대로 얻어낼 수 있는 마케팅 효과는? -> SNS를 통한 마케팅으로 연결.

깨알 같은 메모는 하나같이 작품의 콘셉트와 잘 어울리는 내용들이었다.

“오호, 동화에 대한 문제 제기를 통해 관심을 이끈다? 이 마케팅 포인트 좋은데?”

주 편집장이 호기심을 보인다.

권지연은 마지못해 대답한다.

“그게, 서준이 작품이 아무래도 기존 동화와는 결이 다르니까 첫 진입장벽이 높을 수도 있을 거 같아서요. 최대한 호기심을 자극해서 작품만 읽게 만들면 그 뒤엔 걱정할 게 없잖아요.”

주 편집장도 고개를 끄덕인다.

“맞지. 읽기만 하면 헤어 나올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다가 이내 권지연을 바라본다.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자 권지연이 먼저 입을 연다.

“왜 그렇게 보세요?”

“음. 내가 지금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거든.”

“좋은 생각이요?”

“그래, 아주 좋은 생각.”

주 편집장이 들고 있던 원고를 툭 내민다.

“이번 권 작가님 작품. 지연 씨가 한 번 해봐.”

원고를 받아든 권지연의 눈이 커진다.

“네, 네? 제가요?”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목소리도 평소보다 올라간다.

“그래. 지연 씨가 이번 연도 가장 타율이 높잖아. 게다가 작가들 평가도 좋고.”

“하, 하지만...”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권서준의 작품은 와이즈 출판사에서도 매출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작품이니까.

게다가 정영만 회장님이 특별히 관심이 갖는 작품이기도 했고.

“내 생각엔 아무래도 이번 작품이 큰일 낼 거 같아. 잘만 나오면 안데르센 수상도 혹시 모른다고.”

안데르센이라는 말에 권지연이 눈이 더욱 커진다. 그만큼 동화 쪽에서는 최고 권위를 가진 상이 바로 안데르센 상이었다.

“그만큼 초고가 잘 나왔어. 마무리랑 마케팅만 잘 되면 확실해. 내 촉이 또 잘 맞거든.”

확신에 찬 주 편집장.

농담을 자주 하지만 가벼운 사람은 아니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연 씨가 적격이야. 그동안 보여준 모습도 그렇고. 게다가 누구보다 권 작가님의 작품 세계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잖아. 아닌가?”

“그거야 맞지만...”

“지연 씨가 책임지고 해 봐. 권 작가의 누나라서가 아니라 누구보다 이 작품을 깊이 살펴본 사람이니까.”

자신은 없었다.

그만큼 동생의 작품은 훌륭했으니까.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 편집장의 말도 맞았다.

이 세상 누구보다 권서준의 작품을 내 작품처럼 열정을 다해 작업할 사람은 친누나인 자신밖에 없었으니까.

‘안데르센이라...’

순간 권지연이 입술을 야무지게 다문다.

하나뿐인 동생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래. 해보자...’

굳은 결심 끝에 권지연이 고개를 끄덕인다.

“저, 해볼게요.”

결연한 의지가 담긴 대답.

그 결심을 읽은 주 편집장이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

제프리 감독과의 술자리가 끝나고, 손주환은 권서준 작가와 함께 술 좀 깰 겸 가볍게 산책했다.

“어후. 제프리 감독, 엄청난 주당이네요.”

“그러게요. 두둑하게 나온 배가 술배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아차렸어요.”

너스레를 떠는 권서준의 말에 손주환이 미소를 짓는다.

권서준의 말대로 제프리 감독은 술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고, 덕분에 술자리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끝이 날 수 있었다.

그나마 내일 오전 비행기라 이 정도로 끝난 것.

“그래도 한편으로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요.”

유명 음악 감독과의 대화라 두 번 다시 없을 기회이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모두 권 작가님 덕분이에요.”

진심 어린 감사에 권서준은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언제나 겸손하고, 과하게 드러내지 않는 권서준의 성격을 알기에 손주환도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린다.

“하아. 다시 생각해도 짜릿하네요. 제프리 감독이 이 곡으로 가시죠, 라고 했을 땐 온몸이 떨렸다니까요.”

손주환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다시 한번 감동을 되뇌었다.

“제가 제프리 감독에게 인정받다니...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다 손 선생님의 곡이 훌륭한 덕분이죠.”

“제가 잘한 게 아니죠. 작가님이 답을 다 알려주셨잖아요.”

손주환이 말을 잇는다.

“가장 중요한 건 윤서원이 가지는 이미지였어요. 그게 주제와 연결된 부분이니까. 그런데 작가님이 다 알려주셔서 연상하기가 쉬웠죠.”

권서준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설명해도 다른 그림을 그리는 게 예술이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합이 잘 맞았던 거죠.”

“하, 언제나 그렇게 좋게 포장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고마운 듯 고개를 끄덕이던 손주환은 갑자기 궁금증 하나가 떠올랐다.

“아, 근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솔직히 곡만 보내달라고 하셨어도 될 텐데 왜 제프리 감독과 함께 제 작업실까지 오신 건가요?”

“유명 감독과 인맥이 생길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요.”

“...네?”

“앞으로 올란 감독, 정 피디님, 그리고 제프리 감독까지 누구 하나 선생님의 곡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만큼 인상 깊었던 곡이었으니까요.”

“그럼 설마... 절 위해서...”

권서준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 자신을 위해섭니다. 앞으로도 손 선생님껜 계속 신세를 질 거 같으니까요.”

“...”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권서준의 배려가 전해진다.

‘이 사람... 왜 이렇게 큰 거야...’

사람이 크다는 말.

평생 느껴보지 못했는데, 권서준을 보니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만 같았다.

‘아마 앞으로 더욱 큰 사람이 되겠지...’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그런 사람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게.

손주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네, 얼마든지요. 언제든지 말씀만 하세요. 최고의 곡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최선을 다한 곡으로 꼭 보답할 테니까요.”

괜한 말이 아니었다.

그 어느 때보다 결심에 찬 대답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제프리 감독은 기분 좋게 공항으로 향했다.

뒷좌석에 앉아 맑게 갠 하늘을 보며 같은 음악을 재생했다.

행진곡.

바로 손주환 작곡가의 OST이었다.

제프리 감독은 음악을 들으며 권서준의 대본을 다시 읽었다.

단순했던 윤서원의 모습이 다채롭게 다가온다.

빛과 어둠, 광기와 절제, 복수와 용서, 흔히 대립한다는 개념이 그 안에 공존하고 있었다.

‘하긴, 인간은 그 자체로 모순적인 존재니까.’

삶의 모순은 자연스럽게 존재론적 질문을 연이어 던지게 했다.

아버지를 죽인 숙부를 용서하는 게 맞을까?

아니면 똑같이 복수하는 게 맞을까?

황금 탑을 좇아 살인까지 마다하지 않는 저들에게 행복은 있을까?

그들이 쫓는 인생은 가치 있는 삶일까?

‘엄청난 작품이군...’

감탄이 절로 흘러나온다.

권서준 작가의 작품은 거대한 늪처럼 계속해서 안으로,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 늪으로 더 깊이 끌어당기는 게 바로 손주환의 곡이었다.

‘수십 번을 넘게 들었는데도 질리지가 않아.’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비행기에 올라탄 뒤로 계속해서 들었다.

그런데도 매번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음악 감독이 감탄할 정도의 OST.

제프리 감독은 이륙 전 휴대폰을 꺼내 매니저에게 전화를 건다.

“어, 나야. 하차 보도 자료 보내지 마.”

-...네?

“보내지 말라고. 이 곡으로 갈 거니까.”

간단히 내용을 전달하고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다시 헤드셋을 껴 음악을 듣는다.

‘이거 중독된 건가?’

피식 웃던 제프리 감독이 또다시 곡을 재생한다.

둥둥둥.

단순한 리듬이 가슴을 울린다.

동시에 주옥같은 대사들이 가슴을 두드린다.

순간순간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사건.

해답을 낼 수 없는 깊이 있는 질문들.

그러나 그 질문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달라진다.

감탄이 나오는 작품성.

제프리 감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 작품,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거야.’

곡을 들을수록, 대본을 읽을수록 확신을 커져만 간다.

그렇게 제프리 감독은 10시간이 넘는 비행 내내 손주환의 곡과 권서준의 대본을 탐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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