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35화 (135/203)

135. money's worth - 쓴 돈만큼 값어치가 있는 것 (5)

135.

***

공연이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났다.

그러나 객석에 앉아있는 누구도 시간을 따지지 않았다. 그만큼 엄청난 몰입감을 선사하는 공연이었다.

사람들은 고풍스러우며 매력적인 음악에 빠져들었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크리스토퍼 말로의 매력에 흠뻑 젖어 있었다.

20대 초반에 시작된 크리스토퍼 말로의 이야기는 점점 그의 전성기로 이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희곡 「탬벌레인 대왕」이 런던 로즈 극단에 오르는 순간.

들뜬 분위기 속에 갑작스럽게 암전이 찾아온다.

인터미션(intermission).

공연 중간에 주어지는 쉬는 시간이었다.

“...”

그러나 대다수는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엄마와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끝난 거야?”

엄마가 물었다.

“아니, 쉬는 시간이야. 공연이 기니까 배우들도 좀 쉬어야지. 화장실 다녀오고 싶은 관객들도 있으니까.”

“아...”

“왜?”

“아니, 뒷얘기가 너무 궁금해서...”

엄마의 표정은 보기 드물게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침 드라마 엔딩을 보고 안타까워하던 그때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내 말이. 처음 보는데 뮤지컬 정말 재미있다...”

누나도 고개를 저으며 감탄을 쏟아낸다.

“근데 서준아, 이걸 정말 네가 썼다고?”

엄마가 다시 한번 묻는다.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이 작품이 놀라운 거겠지.

그 마음을 알기에 나는 엄마를 보며 답했다.

“응, 엄마 아들이 쓴 거야.”

“어이구, 누굴 닮아서 이렇게 장할까?”

“누구겠어?”

순간 엄마의 눈동자에 그리운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

대답 대신 돌려준 질문.

그러나 엄마도, 나도, 누나도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엄마는 말없이 내 손등을 두드린다.

주름진 손.

그 손이 전해주는 울림엔 글로 다 담을 수 없는 따스함이 담겨있었다.

나는 엄마 손을 감쌌다.

이내 엄마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진다.

잠시 뒤,

20분간 주어진 인터미션이 끝나고 다시금 공연이 시작된다.

***

‘후우.’

화장실을 다녀온 스티브 대표는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며 의자에 앉았다.

머릿속엔 온통 뮤지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화장실을 어떻게 다녀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2막은 더 기대가 되는군.’

상기된 표정으로 다시 무대를 바라본다.

진중한 음악과 함께 템포가 빨라진다.

분명 1막에서 나왔던 넘버였지만 완벽히 다른 템포에 분위기도 달라졌다.

덕분에 공연 시작 1분도 되지 않아 관객의 몰입도가 다시 이어진다.

무대 뒤편에 놓인 대형 스크린으로 영상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잔잔한 내레이션.

크리스토퍼 말로우.

그의 작품에 처음으로 무대에 오르던 날 세상은 그에게 주목했다.

그의 작품이 런던 골목 곳곳에서 암거래될 정도로 팔려나가고 콧대 높은 귀족들마저 그의 작품을 손에 넣기 위해 웃돈을 주고 무릎 꿇을 때, 말로는 그들의 모습을 비웃었다.

흑사병이 돌고, 세상이 몇 번이나 뒤흔들리고, 여기저기서 비극이 넘쳐났지만 그들은 여전히 신을 찾았으니까.

거리를 옮길 때마다 느껴지는 원혼들의 울부짖음. 신이 결코 없다고, 신이 있다면 이럴 수 없다고 울부짖는 영혼들의 고통 어린 신음소리.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죽어나간 런던 거리엔 핏빛 절규만이 남아있고, 말로의 조롱 섞인 날카로운 웃음은 보는 이의 심장을 관통하며 세상을 비웃었다.

그리고 그는 외쳤다.

신은 없다고.

둥둥둥둥.

웅장한 울림과 함께 2막이 이어진다.

“하아...”

공연을 지켜보던 스티브 대표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탄식이 흘러나온다.

대본, 대사, 연기, 노래, 내레이션까지.

단 하나의 틈도 없이 완벽하게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공연이었다.

‘이 정도 수준은 브로드웨이에서도 쉽게 볼 수 없다고...’

문득 투자에 실패했던 아픈 과거가 떠오른다.

가치에 투자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까지 거부당했던 그때의 기억.

그 아픈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런데 드디어...’

여운이 길게 남는 호흡과 함께 스티브 대표의 어깨가 편안히 내려앉는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미소.

그건 좀처럼 숨길 수 없는 기쁨의 미소였다.

***

극은 점점 엔딩으로 치닫는다.

“나를 칭송하던 자들의 환호는 어디 갔는가? 당신들의 시선은 어찌하여 이리도 차갑게 바뀌었는가?”

고독한 천재의 피맺힌 절규가 허공으로 퍼져나간다.

“한스럽구나. 그토록 칭송하던 나의 글이 결국 끔찍한 저주였던 것을 이제야 알았구나. 그래, 너희의 오만을 참을 수 없는 천재는 오늘 기어코 당신들의 손에 의해 죽을 것이다!”

조현성의 미친 연기.

관객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광기와 천재성.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표현하는 조현성의 연기는 최종 리허설 때보다 한층 더 성숙해 있었다.

‘방수찬의 연기가 감명을 준 거군.’

서로를 향한 자극이 결국 두 사람의 성장으로 이어진 것. 각자의 색깔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서로의 미흡한 부분을 채우고 있었다.

같은 배역, 다른 느낌.

장기 흥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다.

잠시 뒤,

막이 내린다.

휘몰아치던 무대 위는 일순간 침묵이 흐르고, 관객들은 숨을 죽인 채 바라본다.

크리스토퍼의 절규와 함께 끝난 공연.

이내 사람들 머릿속엔 수많은 엔딩이 떠오른다.

크리스토퍼 말로의 삶에 대해서,

그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서.

각자의 바람대로,

크리스토퍼 말로의 삶이 이어진다.

그래.

그건 관객이 직접 만들어가는 엔딩.

그렇게 수많은 엔딩이 작품의 품격을 올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경쾌한 음악과 함께 무대가 마무리된다.

“와아아아!”

그제야 막힌 담이 허물어지듯 객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온다.

“최고다!”

“너무 멋져요!”

지금 이 순간 작가가 할 일은 없었다.

감격해하는 저들의 표정을 보면서 그저 이 고양감을 만끽하는 일 밖에는.

***

두 시간에 걸친 공연이 끝나고,

나는 무대 밖에서 지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작가님!”

제일 먼저 달려온 사람은 정은미 피디였다.

얼마 전, 한 작품을 잘 끝내서인지 표정이 밝아 보였다. 뒤이어 하재봉 본부장과 진영민 CP가 다가온다.

“작가님. 너무 재미있는데요? 저 벌써 뮤지컬 팬 된 거 같아요.”

정 피디는 만나자마자 감탄을 쏟아냈다.

반걸음 뒤에 서 있는 하 본부장과 진영민 CP도 마찬가지였다.

“와, 솔직히 뮤지컬은 돈지랄인 줄 알았는데, 제 생각이 틀렸네요. 오늘 공연,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본부장의 솔직한 감상.

듣고 있던 진영민 CP가 슬쩍 끼어든다.

“이거 진심이십니다. 아깐 눈물도 훔치시더라고요.”

“이, 인마. 내가 언제!”

진영민 CP의 말에 당황하는 본부장.

반응만 봐도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는 대번 알 수 있었다.

뮤지컬 문외한도 눈물을 훔칠 정도로 감동적이었던 공연.

첫 공연은 그야말로 대 성공이었다.

‘물론, 이건 시작에 지나지 않지.’

고작 첫 공연이었다.

거둬야 할 열매는 아직 한참 남아있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천천히 그 열매를 추수하는 일뿐이었다.

지이잉.

그리고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스티브 대표였다.

***

그날 오후.

유명 뮤지컬 커뮤니티는 「거장의 숨결」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대박, 우리나라 창작 뮤지컬에 이런 퀄리티가 가능하다고?

˪권서준 작가 대본이잖아 말 다했지.

˪솔직히 뮤지컬 대본까지 잘 쓸 줄은 몰랐지. 이 정도면 천재 아니냐?

˪네, 이미 천재고요.

-곡도 예술. 넘버 3번인가? 그거 죽이던데.

˪앞부분은 열정적인 예술가, 뒤에는 흑화한 천재의 모습을 표현한 거라 목소리가 확 달라지는데... 눈빛까지 독해지는 게 개소름...

-‘신을 죽이리라’라고 길게 이어지는 부분에서 크리스토퍼 말로의 결심이 굳어지는데 그 순간을 너무 잘 살림.

˪인정. 가사 하나하나를 나노 단계로 쪼개서 연기하는 느낌.

˪아씨, 매진돼서 못 봤는데 너무 아쉽네.

˪꼭 보삼. 두 번 보고, 세 번 보삼.

˪말투 틀?

˪틀도 감동하는 작품.

-무대 전체가 회전되는 연출도 기가 막혔음. 솔직히 장면 전환될 때가 몰입도 가장 깨지는 순간인데 그걸 미친, 그런 방법으로 해결하다니.

˪인정.

-아무튼 난 오늘부터 조말로에 빠질 거야. 넘버 발매는 언제 하는 거지?

˪조말로?

˪조현성 + 크리스토퍼 말로.

˪아하.

대본에 대한 호평은 자연스럽게 곡과 연기, 그리고 연출로 이어졌다.

게다가 이미 조현성은 한 차례 공연만으로 별명이 생긴 상태였다.

조말로.

조현성과 크리스토퍼 말로의 이름을 합친 별명으로 그만큼 배역에 녹아나는 연기가 인상적이었다는 뜻이었다.

-난 본진이 조현성이라 첫날 공연 봤는데 방수찬 것도 땡기네.

˪인지도가 없는 배우인데 괜찮으려나?

˪전작에서도 연기력은 나쁘지 않았는데 모르겠네.

˪회전문 가능하려나? 보고 나서 후기 좀.

회전문은 뮤지컬 은어로 ‘하나의 공연을 다 회차 보는 행위’를 의미했다.

흥행을 위해서 뮤지컬 업계에선 필수적으로 잡아야 하는 타켓.

그걸 가능하게 만들려면 필수적으로 더블 캐스팅된 배우의 연기력도 준수해야만 했다.

‘후우.’

그 때문에 기사를 바라보는 방수찬의 얼굴에 근심이 드리운다.

다음 날 공연을 앞둔 상황.

오늘 조현성이 보여준 모습은 완벽에 가까웠다.

‘최종 리허설 때보다 훨씬 더 성숙한 연기였어.’

감탄이 절로 나오는 연기에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예전 같았으면 주눅 들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지금의 방수찬은 달랐다.

‘나는 내 모습을 보여주면 돼. 내가 할 수 있는 연기에 집중하면 그걸로 충분해.’

권서준 작가, 서미연 대표, 그리고 손주환 작곡가의 조언을 떠올린다.

가볍게 떨리기 시작하는 손끝.

두려움이 아닌 숨기지 못한 설렘에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행동이었다.

그만큼 내일 공연이 기대되는 상황.

‘이럴 때가 아니지.’

방수찬은 어두운 연습실 가운데 서서 목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잠시 뒤,

방수찬의 노래가 시원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로미오 호텔 23층 라운지.

스티브 대표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였다.

출판과 영화 계약을 위한 미팅.

다음 추수를 위한 씨앗이었다.

나는 택시를 타고 이동하면서 고용수 부장에게 받은 자료를 확인했다.

영국과 국내 소설 출판 일정 조정과 함께 엔플릭스와의 영화 관련 계약 부분까지 친절하게 정리되어 있는 자료.

조건에 따른 이해타산까지 정확히 꼼꼼하면서 쉽게 설명되어 있었다.

‘에이전시가 있다는 게 이렇게 좋군.’

작가로서 고민하지 않고 선택만 하면 되는 상황이라 여러모로 편할 수밖에 없었다.

하이든 에이전시와 한 번 연을 맺으면 평생 간다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엔플릭스 쪽과의 계약이라면 내 쪽에서 오히려 환영이었다.

OTT 플랫폼의 거대 공룡인 엔플릭스.

엄청난 자본을 가지고 작품에 투자하는 그 기회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한국을 찾을 리는 없겠지.’

또 다른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자료에 없는 스티브 대표의 고민을 떠올리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잠시 뒤,

내가 라운지에 도착하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스티브 대표와 고용수 부장이 반가운 얼굴로 맞이한다.

“오랜만에 뵙네요.”

우리는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눴다.

“오늘 공연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역시 권 작가님의 작품은 명불허전이네요.”

“투자자에게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써야죠. 그게 제가 해야 할 일이었고요.”

스티브 대표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미팅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제안 드리고 싶은 게 있네요.”

스티브 대표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천천히 상체를 숙이더니 이내 천천히 입을 연다.

“작가님, 이번 뮤지컬의 해외 진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씨앗을 심기 위해 찾은 자리.

그런데 또 다른 열매가 추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