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money's worth - 쓴 돈만큼 값어치가 있는 것 (4)
134.
***
늦은 오후.
막바지 리허설 점검 중인 오늘 극단의 분위기는 그리 밝지 못했다.
무거운 분위기.
바짝 긴장한 표정의 배우들이 다급히 음악에 맞춰 움직이다 그만 의상에 발이 걸려 넘어진다.
“야, 뭐해? 제대로 안 해?”
기다렸다는 듯이 김재용 대표의 날카로운 호통 소리가 무대로 날아든다.
“죄, 죄송합니다!”
조연 배우는 황급히 일어나 머리를 조아린다.
“인마, 너 그 자리가 어떤 자린 줄 알아? 하고 싶다는 애들이 줄을 섰다고! 그렇게 할 거면 당장 그만둬!”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잔뜩 언 조연 배우는 연거푸 고개를 숙인다.
“마지막 기회야. 똑바로 해. 알았어?”
서슬 퍼런 김 대표의 말에 조연 배우는 사색이 된 채 고개를 끄덕인다.
“...넵.”
군대를 방불케 하는 무거운 분위기.
며칠 전까지 소고기 파티를 열며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휴, 답답해. 저런 것들도 배우라고.”
혀를 차던 김 대표가 이내 객석 의자에 털썩 앉아 한숨을 내쉰다.
화를 쏟아냈지만 마음은 여전히 초조했다. 어쩌면 무대 위에 있는 배우들보다 몇 배는 긴장하고 있는 게 바로 김 대표 본인이었다.
모든 건 「거장의 숨결」 매진 기록 때문.
지금도 인터넷엔 온통 「거장의 숨결」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오늘 극단의 기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묻힌 지 오래였다.
너무 당연한 결과.
그게 1등과 2등의 차이였다.
‘1등은 모두 기억하지만 2등은 당사자만 기억할 뿐이니까.’
김 대표 역시 그걸 너무 잘 알기에 일정을 무리하게 당기면서까지 광고 기사를 쏟아냈다. 그런데 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고작 영국에서 날아온 기사 하나 때문이었다. 티켓 오픈 날짜에 정확히 맞춰서 올라온 기사. 결코 우연일 리가 없었다.
‘설마, 그쪽에선 여기까지 생각한 건가?’
권서준의 아이디어인지, 서 대표의 인맥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만 초반 이슈에서 밀렸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됐어. 홍보에선 조금 밀렸지만 아직 기회는 있으니까.’
그래도 일말의 희망은 있었다.
바로 작품 자체의 퀄리티로 입소문을 노리는 방법. 이번 작품의 경우 출연 배우도 조현성에게 밀리지 않는 황준수였고, 국내 최고의 내로라하는 작곡가들의 넘버로 가득 차 있었다.
‘뚜껑만 열어보면 답은 나올 거야.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우리 작품에 관한 기사로 가득 차겠지.’
김 대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만큼 자신 있었다.
실패란 있을 수 없었다.
아니, 실패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이 달린 승부였다.
***
이틀 뒤.
나는 서미연 대표를 만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창조 극단 사무실을 찾았다.
“오셨어요, 작가님.”
사무실 직원들이 반갑게 나를 맞이한다. 1차 티켓 오픈 결과로 한결 밝아진 얼굴과 분위기.
“안녕하세요. 대표님은 안에 계시죠?”
“네,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실 거 좀 드릴까요?”
“아닙니다. 잠깐 있다가 갈 거라서요.”
잠시 뒤,
나는 대표실 안으로 들어갔다.
“...”
서 대표는 모니터를 바라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분명 노크를 하고 인기척을 냈지만 여전히 서 대표는 굳어있었다.
“서 대표님? 뭐 하세요?”
내가 목소리를 내자 그제야 고개를 든다.
“어, 어? 작가님! 언제 오셨... 악!”
서 대표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다가 책상에 허벅지를 찧는다.
“아...”
아파하며 다시 주저앉는 모양새.
차분하고 철두철미한 서 대표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괜찮으세요?”
“아, 네... 괜찮아요.”
서 대표가 애써 웃으며 손을 내젓는다.
“뭐 하고 계셨기에 그렇게 놀라세요?”
내가 묻자 서 대표는 아픈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간신히 대답한다.
“티켓, 현황 좀 보고 있었거든요... 아오...”
찡그리는 표정을 보니 좀 세게 부딪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 관심을 조금 다른 곳으로 이어졌다.
“티켓 현황이요? 2차 티켓 오픈은 아직 멀었잖아요?”
“아, 네. 실은 1차 티켓 현황을 계속 보고 있었어요.”
통증이 가라앉았는지 이내 서 대표가 미소를 짓는다.
그 모습을 보자 서 대표의 생각이 읽힌다. 아마 1차 티켓 오픈 결과가 실감이 나지 않는 거겠지.
“초반 공연이 매진되는 경우는 더러 있었어요. 일반적으로 프리뷰 공연은 할인도 많이 해주니까 관객들이 몰리기도 하고요.”
서 대표의 말은 사실이었다.
라이브로 진행되는 무대 공연 특성상 회차가 진행될수록 배우와 스태프들의 합이 더 잘 맞을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뒤로 갈수록 공연의 퀄리티도 높아지기 때문에 초반 공연은 큰 폭의 할인을 해주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다르잖아요. 티켓 오픈하자마자 이렇게 모든 자리가 매진된 건... 저도 처음이라서...”
따지고 보면 지난번 「거장의 숨결」 연극 때의 전석 매진도 티켓 오픈 매진은 아니었다.
첫 공연 이후 입소문이 나서 전무후무한 매진 기록을 세우게 된 경우였다.
“벌써부터 떨리네요. 이 작품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기대가 되기도 하고요.”
서 대표의 얼굴에서 은근한 설렘이 느껴진다.
나는 누구보다 서 대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서 대표의 표정이야말로 작품에 최선을 다한 예술가의 표정이었으니까.
이제는 우리가 노력한 결과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을 뿐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서 대표가 이내 잊은 게 떠오른 듯 손뼉을 친다.
“아, 맞다. 작가님, 티켓 때문에 오셨죠?”
서 대표는 미리 준비해둔 봉투를 내게 내밀었다.
내가 부탁한 VIP 티켓이었다.
“넉넉하게 준비했어요. 초대해야 할 분이 많으실 거 같아서요.”
역시나 서 대표의 센스가 엿보이는 부분이었다.
“고맙습니다.”
나는 인사를 하며 티켓을 챙겼다.
자연스럽게 이번 공연에 초대해야 할 얼굴들이 떠오른다.
일단 엄마, 누나, 장현웅.
그리고 정영만 회장과 송영도 교수.
그 밖에도 타이거 스튜디오 사람들을 비롯해 이번 작품에 크게 기여한 스티브 대표와 고 부장에게도 티켓을 보냈다.
‘윤석훈 기자님도 잊으면 안 되지.’
혹시나 잊은 사람이 없는지 꼼꼼히 챙겼다.
그리고 끝으로
나는 두 장을 따로 챙겼다.
‘아마 못 구했겠지?’
누구보다 내 공연에 진심인 한 사람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
“하아... 없어, 없다고...”
늦은 오후.
촬영을 마치고 소속사로 돌아온 신하율은 노트북 앞에 앉아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뮤지컬 「거장의 숨결」 티켓 때문이었다. 새벽까지 잠 못 이루면서까지 취소되는 티켓을 노렸지만 쉽지 않았다.
똑똑.
그때,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성도윤 실장이었다.
신하율이 성 실장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난다.
“어떻게 됐어요?”
그러나 성 실장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암표라도 있을까 싶어서 찾아봤는데, 없네. 이런 경우는 나도 처음이라...”
“...”
순간 감출 수 없는 실망감이 신하율의 얼굴을 스쳐 지나간다.
“뭐 어쩔 수 없죠...”
애써 웃어보지만 본인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한숨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2차 티켓 오픈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지이잉.
그런데 그때,
성 실장의 휴대폰이 울린다.
“...어?”
발신자를 본 성 실장의 눈이 커진다.
“왜요? 누군데요?”
“권 작가님이 보낸 메시진데?”
“정말요? 진짜요?”
“어, 자, 잠깐만.”
성 실장은 재빨리 메시지를 확인한다.
그리고는 눈을 크게 뜬다.
“하율아... 권 작가님이 티켓을 보내주신다는데?”
“네? 정말요?”
안 그래도 큰 신하율의 눈이 배는 커진다.
“그래. 그것도 지금 바로 퀵으로 보내주신대.”
“...”
기뻐해도 시원찮은 순간.
신하율은 오히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하율아, 뭐해? 안 기뻐? 티켓 보내주신다니까?”
“기쁘죠. 너무 기쁘죠. 근데... 사람이 어쩜 이렇게 완벽할까 싶어서요...”
“뭐, 뭐어?”
배시시 웃던 신하율이 이내 벌떡 일어나 소리친다.
“나도 권 작가님 공연 볼 수 있다, 얏호!”
아이처럼 방을 동동 구르는 모습.
그만큼 감동적인 선물이었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실장님, 저 샵 좀 예약해 주세요!”
벌써부터 신하율의 머릿속엔 그날 입고 갈 의상으로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
늦은 오후.
인천 공항에 도착한 스티브 대표는 마중 나온 고용수 부장의 차에 올라 서울로 이동했다.
“한국은 올 때마다 새롭네요.”
스티브 대표는 차가운 공기를 음미하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룸미러로 흐뭇하게 지켜보던 고 부장이 자연스럽게 일정을 보고한다.
“권서준 작가와의 미팅은 이틀 뒤 오후로 잡았습니다. 공연 다음 날입니다.”
스티브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군요. 참, 소식은 들었습니다. 전석 매진이라면서요?”
“네, 벌써부터 난리가 났습니다.”
뮤지컬 「거장의 숨결」 오픈.
내일은 스티브 대표에게도 뜻깊은 날이었다.
단순히 130억이라는 투자금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내 안목, 그리고 투자사로서의 우리의 가치를 입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니까.’
유명한 IP도 아니고, 동양의 한 젊은 작가의 대본으로 시작된 뮤지컬.
이 성공을 토대로 많은 것들이 달라질 수 있었다. 스티브 대표 입장에선 숙원이나 다름없는 투자 사업의 결과.
그래서 반드시 직접 확인해야 했다.
‘과연 쓴 돈만큼 값어치가 있었는지 없는지, 내 눈으로 봐야 안심이 될 테니까.’
창밖을 바라보는 스티브 대표의 눈빛.
그 눈빛에 떠오른 건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었다.
***
다음 날.
「거장의 숨결」 오픈 당일.
3월치고는 포근한 날씨였다.
어제 내린 비 때문에 하늘도 맑았다.
나는 누나와 엄마를 모시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후... 왜 내가 다 떨리냐?”
객석에 앉은 엄마는 자꾸만 가슴을 쓸어내린다.
“엄마, 나도 그래.”
둘은 서로의 손을 잡으며 마음을 진정시킨다.
“근데 정작 당사자는 왜 이렇게 평온하대?”
누나가 힐끗거리며 묻는다.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뭐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니까.
나는 자연스럽게 첫 공연을 앞둔 객석을 둘러봤다.
더없이 좋은 분위기에 속속 사람들이 객석을 채운다.
타이밍이 맞지 않아 인사를 못 했지만 내가 초대한 사람들의 얼굴도 보이고.
잠시 뒤,
객석을 비추던 조명이 꺼지고 어둠이 찾아온다.
“어? 시작하나 보다.”
점점 커지는 음악과 함께 사람들의 목소리가 작아진다.
그제야 평온했던 내 가슴도 조금씩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긴장보다는 설렘에 가까운 감정.
이윽고 공연이 시작된다.
짧은 암전과 함께 다시 조명이 들어오자 어느새 크리스토퍼 말로가 무대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이봐. 신은 없다니까. 불과 몇 년 사이에 수만 명이 죽어 나갔어. 신이 있다면 이렇게 지켜만 보고 있을 수가 없지. 혹시 눈뜬장님인 건가? 아니면 너무 먼 곳, 어쩌면 너무 깊은 곳을 바라보느라 우리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 그토록 무능력한 신이라면 왜 신이어야 하는 거지?”
“크리스토퍼, 그건 신성 모독이야. 누가 듣는다고!”
주변을 살피며 말리는 지인의 말에 크리스토퍼 말로는 오히려 손을 뿌리친다. 두 팔을 펼친 채 목소리를 높인다.
“들으라지. 아니 들어야 해. 신의 무능력함을 모두 알아야 한다고.
조롱 섞인 조현성의 대사가 이내 자연스럽게 넘버 1번으로 이어진다.
“영원한 삶은 없어. 영원한 신도 없고. 그저 허황된 신과 그걸 믿는 어리석은 신도만이 있을 뿐이지.”
익살스러운 그의 표정과 노래가 시원하게 객석으로 퍼져나간다.
무대를 가로막았던 판이 자연스럽게 돌아가며 런던 거리는 이내 말로의 집으로 변한다.
몰입도를 깨지 않는 자연스러운 무대 전환. 공간 이동이 어려운 무대 공연의 장르적 특성 안에서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전환하는 고급스러운 연출법.
서 대표의 역량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었다.
***
이어링을 낀 채 공연을 지켜보던 스티브 대표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음악, 무대 연출, 배우들의 연기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유일하게 아쉬운 건 공연의 내용을 통역을 통해 듣고 있다는 정도. 그러나 그걸 고려해도 무대 위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관객을 압도했다.
‘엄청나군...’
웅장한 음악과 함께 이어지는 공연.
조현성의 노래에 지나가던 시민 한 명, 한 명이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더한다.
조금씩 웅장해지는 소리.
천재 작가의 외침은 이내 군중들의 바람처럼 커져만 간다.
‘하아, 이건 말로의 영향력을 표현한 거야...’
크리스토퍼 말로의 주장이 조금씩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가고 있다는 걸 음악적 요소로 완벽히 표현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흠잡을 데 없는 연출.
스티브 대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권 작가가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투자를 권한 이유가 있었어...’
자연스럽게 작품 속으로 빠져드는 몰입감.
종합 예술이 선사하는 황홀한 감격.
오랜만에 밀려드는 감격을 마음껏 음미하던 스티브 대표는 이내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쓴 돈 만큼 값어치가 있군. 아니, 그 이상이야...’
무려 130억에 이르는 투자금.
그러나 벌써부터 스티브 대표의 머릿속엔 몇 배나 되는 이익이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