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shooting star - 별똥별 (1)
136.
***
“해외 진출이요?”
“네, 작품의 퀄리티만 보면 당장이라도 브로드웨이 진출도 추진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이번 작품의 흥행이 선행되어야겠지만 전 이미 결과를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스티브 대표의 목소리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만큼 이번 공연이 마음에 들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물론 해외 진출은 내게 있어 당연한 선택지였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다면 복잡하게 포스 극단과 일정을 맞추고, 베네딕트를 활용한 마케팅을 기획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다만, 뒤이은 스티브 대표의 제안은 구미가 당겼다.
“내친김에 오리지널 뮤지컬 공연도 기획해보면 좋을 것 같군요.”
오리지널 뮤지컬 공연(Original Musical).
외국어로 된 대본을 번역하고, 곡을 번안하는 라이선스 뮤지컬(License Musical)과 달리 해외 원작의 배우, 스태프가 그대로 해당 국가에 방문해 공연하는 방식.
유명 IP를 가진 작품들이 해외를 돌아다니면서 하는 일종의 순회공연 형식이었다.
현지 언어가 아닌 오리지널 작품의 언어로 진행되는 공연.
그만큼 작품에 대한 인지도와 흥행 요소가 갖춰줘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경우 대부분 해외 순회공연을 오는 편이야. 반대로 가는 경우는 거의 없지.’
단순히 IP를 판매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나라 뮤지컬계의 흥행을 위해선 오리지널 공연도 도전해볼 만한 일이었다.
물론 해외에서 수요가 있을 정도로 인기를 끌어야 하겠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아니, 자신 있지.’
그렇다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좋은 생각이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있던 스티브 대표의 얼굴에도 기다렸다는 듯이 미소가 떠오른다.
서로의 생각이 하나가 되는 순간.
작품에 대한 청사진이 푸른빛을 더해간다.
“자,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뮤지컬과 관련된 더없이 좋은 제안.
그러나 오늘 미팅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차기작인 영화 제작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
레이디 햄릿(가제) 영화 제작 기획.
오늘 미팅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고용수 부장은 준비해온 자료를 내밀었다.
엔플릭스에서 제안한 조건들이었다.
사전에 확인했던 부분이라 나는 대부분 동의했다.
그러나 문제는 정작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루카스 대표가 올란 감독을 추천했네요?”
내 질문에 스티브 대표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뮤지컬 얘기를 할 때와 사뭇 다른 반응.
“네. 실질적으로 내정이라고 봐야죠. 사실 저희도 그 부분에 대해서 우려하고 있고요.”
올란 감독이라면 잘 알고 있었다.
스타일리쉬한 연출과 뛰어난 작품성으로 헐리웃에서도 유명한 감독이었다.
다만 지나치게 작품에 힘을 주는 탓에 최근 작품에선 오히려 안 좋은 평가를 받는 감독 중 하나였다.
“솔직히 올란 감독의 연출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외국 감독이 한국 작품을 연출하기엔 디테일이 아쉬울 거 같아서요. 그래서 작가님 생각을 여쭤보기 위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스티브 대표의 걱정은 합리적이었다.
작품의 성공을 위해선 대본만큼이나 그 나라의 감수성을 제대로 담을 수 있는 연출 역시 중요한 문제니까.
‘아마 실력 좋은 외국인 셰프가 처음으로 김치를 담그려고 하는 격이지.’
연출 실력 자체는 문제가 없겠지만 그 맛을 살리기란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른 부분에서 의아함이 들었다.
‘분명 올란 감독이 내정된 게 걱정스러울 순 있어. 하지만 그 정도로 스티브 대표가 직접 한국까지 올 리는 없는데...’
정상적으로 계약을 한다면 감독 선임에 대한 권한은 전적으로 엔플릭스 측에 있었다.
작가와 에이전시 측에서 원하는 감독을 제안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을 바라는 건 월권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스티브 대표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선다?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다행히 내 머릿속엔 한 가지 가정이 떠오른다.
바로 올란 감독을 내정한 루카스 대표의 숨은 속내였다.
“올란 감독이 연출을 맡는 건 문제 없습니다. 다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을 거 같군요.”
“...”
잠시 나를 바라보던 스티브 대표가 이내 고개를 젓는다.
“역시, 작가님 눈을 못 속이겠군요. 네, 맞습니다. 다른 문제가 있죠.”
스티브 대표가 눈짓을 보내자 고 부장이 가방에서 파일 하나를 꺼내 내민다.
“이번 작품을 계약할 경우, 엔플릭스에서 원하는 주연 배우 리스트입니다.”
주연 배우 리스트.
제작사 입장에선 당연히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리스트 명단이 어딘지 이상했다.
“추천하는 여배우 리스트가 죄다 백인이네요?”
내 말에 스티브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엔플릭스 측은 주인공의 인종을 바꾸고 싶어 했다.
‘이유는 당연히 흥행 때문이겠지.’
최근 OTT 플랫폼의 경쟁은 그야말로 치열했다. 그 전쟁터 속에서 업계 1위를 사수하려는 루카스 대표의 의지 역시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영미권 매출과 흥행을 동시에 노리기 위해 백인으로 주인공으로 바꾸려는 속셈이었다.
‘물론 난 그런 얕은수에 당할 생각이 없지만.’
엔플릭스라는 플랫폼과 올란 감독의 유명세는 작품의 홍보를 위해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작품 자체의 콘셉트를 무너뜨리면서까지 급하게 맞춰줄 이유는 없었다.
“올란 감독이 연출을 맡는 건 오케이입니다. 그러나 주인공의 인종을 바꾸는 건 불가능합니다. 인종이 바뀌는 것만으로도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많은 메시지가 퇴색될 테니까요.”
나는 내 의견을 분명하게 전달했다.
스티브 대표 역시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그럼 엔플릭스 측에 다시 한번 작가님의 의견을 전달하겠습니다.”
옆에 있던 고 부장이 빠르게 메모를 한다. 그리고 동시에 고개를 든다.
“그럼, 연출 역시 한국 감독으로 요청할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 부분은 크게 상관없습니다.”
이번엔 스티브 대표가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아무래도 한국의 감수성을 담는데 디테일이 부족하지 않을까요?”
“그건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마침 좋은 해결책이 있으니까요.”
“그게 뭔지 여쭤봐도 될까요?”
더없이 진지한 질문.
당연히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공동 연출입니다.”
마침 적당한 사람이 떠오른다.
***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던 정은미 피디의 입에서 문득 감탄이 흘러나온다.
“와...”
연극과는 차원이 다른 클래스.
그만큼 뮤지컬 「거장의 숨결」이 주는 감동은 크고 긴 여운이 남았다.
아직도 머릿속엔 크리스토퍼 말로의 삶이 계속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뼈대엔 이야기가 있었다.
바로 권서준 작가가 쓴 대본의 힘.
“어떻게 그런 작품을 쓰셨지?”
보고 있어도 감탄이 나오는 필력.
결국 프로그램 북까지 사고 말았다.
정 피디는 공연장에서 구매한 프로그램 북을 펼쳤다.
공연을 떠올리게 만드는 사진과 등장 캐릭터들의 의상 스케치,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시놉시스는 다시 봐도 감탄이 나온다.
극의 배경에 대한 설명과 일부 넘버의 가사, 그리고 각 캐릭터에 대한 프로필 사진과 배우 소개.
그중 정 피디의 눈길을 끈 건 간단한 작가의 인사말이었다.
[선과 악은 우리의 생각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입니다. 크리스토퍼 말로의 삶 역시 공연을 보시는 여러분들 각자의 생각에 의해 정의되겠죠. 그러나 중요한 건 그의 삶이 비극이냐 희극이냐가 아닙니다. 그의 삶과 달리 우리의 삶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죠.]
[There is nothing either good or bad but thinking makes it so.]
셰익스피어의 명언을 활용한 인사말이었다.
정해진 크리스토퍼 말로의 삶과 달리 우리의 미래는 아직 달라질 기회가 있다는 의미였다.
열린 결말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이보다 더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싶은 인사말.
짧은 인사말조차 작품의 주제를 관통하고 있었다.
‘엄청나군...’
권서준 작가는 드라마 「이옥」 때보다 몇 계단을 성장해 있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꼭꼭 숨기고 있던 걸 이제야 펼치는 기분.
그런데도 계속해서 더 높이 오르고 있었다.
인사말 말미에 적힌 한 줄이 눈에 들어온다.
[저 역시 제가 그리고자 하는 세상에 도달할 때까지 쉬지 않을 겁니다.]
보는 것만으로 자극이 된다.
권서준 작가만큼 더 노력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정 피디는 문득 최근 종영된 자신의 드라마를 떠올렸다.
시청률 12%.
두 번째 연출 작품치고 엄청난 성과였다.
그러나 작품성에서는 아쉬웠다.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어. 더 노력해야 해...’
다음번엔 부족하지 않게 준비하겠다고 다짐한 권서준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물론 쉽지 않았다.
틈만 나면 연출 공부하고, 유명한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노하우를 구했다. 거장의 작품들을 보며 치열하게 연구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오히려 권 작가님과 나누는 대화가 더 도움 될 때가 많았으니까.’
그렇다고 이대로 멈춰있을 순 없었다.
다음 작품을 통해 더 많은 성장을 이뤄야 했다.
‘그래. 이럴 때가 아니지.’
집으로 향하던 정 피디는 급히 버스에서 내렸다.
밤이 깊어지는 시간.
정 피디의 발걸음을 사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
호텔 스위트룸.
미팅을 마치고 돌아온 스티브 대표가 셔츠 단추를 풀며 앉는다.
“고 부장 생각은 어때요?”
“글쎄요. 공동 연출을 과연 올란 감독이 받아들일까요?”
뒤따라 들어오던 고 부장의 표정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솔직히 올란 감독 정도 되는 사람이 공동 연출을 순순히 승낙할 리가 없으니까요.”
스티브 대표 역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가능성은 어떻게 보시죠?”
“흠. 낮죠. 솔직히 올란 감독이 대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린 일이고요. 근데 정작 권 작가는 별 걱정 안 하는 거 같던데요?”
고 부장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자 스티브 대표가 천천히 입을 연다.
“그만큼 대본에 자신이 있는 거겠죠.”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당당한 권서준의 태도가 놀랍기도 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올란 감독의 이름만 듣고 바로 계약하자고 했을 테니까.’
그만큼 작품이 유명해지는 데 있어선 최고의 루트였다.
그러나 권서준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루카스 대표가 원하는 건 인기 있는 백인 배우를 세우는 전략이었다.
회사 대표로써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어쩔 수 없지. 그게 돈이 되니까.’
그런 의미에서 올란 감독은 좋은 선택지였다. 영미권에 맞는 콘텐츠를 만들 수 있었고, 유명세로 흥행 역시 어느 정도 보장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만일 인종이 바뀌게 되면 작품이 갖는 본연의 가치는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걸 권서준 작가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역시 대단해...’
작품뿐만 아니라 작품의 가치는 지키는 법까지 알고 있었다. 아니, 자신의 작품이 지닌 가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작가였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제안이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권서준에 대한 감탄이 흘러나온다.
동시에 이 소식을 듣고 루카스 대표가 어떻게 나올지 그 반응이 궁금해진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스티브 대표가 고 부장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내용, 엔플릭스 측에 전달하세요.”
순간 고 부장의 표정에 염려가 떠오른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글쎄요. 지켜봐야 알겠지만 뭐, 아쉬운 쪽이 먼저 굽히게 되겠죠?”
언뜻 들으면 반문하는 것 같지만 스티브 대표의 머릿속엔 이미 누가 굽힐지 선명히 그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그의 입가엔 확신에 찬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