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money's worth - 쓴 돈만큼 값어치가 있는 것 (3)
133.
***
늦은 오후.
하이든 에이전시 대표실.
스티브 대표는 방금 걸려온 전화 한 통을 급히 받았다.
-그 작품, 우리가 계약하겠네.
엔플릭스의 루카스 대표.
그의 목소리는 최근 들어 가장 밝아 보였다.
권서준 작가의 시나리오를 보내는 순간부터 예상했던 반응.
자연스럽게 스티브 대표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오른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마음에 들었다마다. 역시 자네는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니까.
제대로 된 대본 하나에 스티브 대표에 대한 신뢰까지 동시에 올라가고 있었다.
하긴, 그만큼 이 바닥에서 중요한 게 바로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이었다.
‘물론 루카스 대표도 그걸 단번에 알아본 거고. 역시 엔플릭스의 CEO답군.’
글로벌 그룹을 이끄는 리더다운 안목이었다.
-자세한 계약 조건은 천천히 조율해 보자고.
사실 조건 자체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루카스 대표의 마음에 든 이상 금액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있을 순 없으니까.
‘아마 우리 측에서 원하는 대부분의 조건도 수용할 거야.’
그동안 루카스 대표와 여러 차례 계약을 성사시킨 스티브 대표였기에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런데,
뒤이어 들려온 루카스 대표의 말은 조금 의외였다.
-참, 연출은 올란 감독을 생각하고 있네. 안 그래도 그 대본, 올란 감독과 같이 봤거든.
“올란, 감독이요?”
-그래. 그 까다로운 친구가 먼저 해보고 싶다고 했다니까? 이거 시작 전부터 아주 느낌이 좋아.
즐거워하는 루카스 대표의 목소리와 달리 스티브 대표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이 떠오른다.
‘흠, 이건 좀 변수가 되겠는데?’
권서준 작가의 작품은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외국 감독이 한국 작품을 하겠다?
문화도, 언어도 달라서 작품의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할 수도 있었다.
작품의 이익을 극대화시켜야 하는 에이전시 입장에서 염려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함부로 반대할 순 없었다.
어찌 되었든 엔플릭스는 가장 큰 고객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자세한 진행 상황은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잘 부탁하네.
통화를 끊은 스티브 대표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이걸 어쩌지...’
엔플릭스와의 계약은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루카스 대표가 감독까지 내정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물론 올란 감독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3년 정도 공백이 있긴 했지만 못 찍은 게 아니라 안 찍은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만큼 실력이 좋은 감독이기에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뛰어난 감독일수록 본인의 색깔이 더욱 진하게 나오는 법이니까.’
한국 배경의 영화를 찍으려고 하는 헐리웃 유명 배우라... 기회이면서 동시에 위기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스티브는 이내 생각을 정리했다.
‘어차피 가장 중요한 건 권 작가의 생각이야. 이럴 땐 오히려 직접 묻는 게 가장 확실하지.’
마침 겸사겸사 한국에 가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뮤지컬 「거장의 숨결」 오프닝 공연 때문이었다.
십 년 만에 투자를 결심하게 만든 작품.
그 결과물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했다.
‘다음 주라고 했었지?’
스티브 대표는 서둘러 한국행 비행기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
늦은 오후.
오늘 극단 사무실.
점심 식사를 마친 직원들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들어온다.
티켓 전석 매진 기념으로 김재용 대표가 거하게 쏜 회식. 마음껏 소고기를 먹은 극단 직원들의 표정이 밝았다.
“대표님! 잘 먹었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대표님!”
한 직원이 선창하자 나머지 직원들이 후창을 한다.
김 대표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한번 휘젓는다.
“뭐 이 정도 가지고. 다음번엔 호텔 뷔페에서 회식해보자고.”
“저, 정말요?”
“그래. 고생했는데 그 정도 보상은 해줘야지. 난 내 주머니만 챙기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거야 잘 알죠. 앞으로도 충성하겠습니다!”
한 직원의 너스레에 사람들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때,
날짜를 확인하던 한 직원이 입을 연다.
“참, 그러고 보니까 오늘이 창조 극단 티켓 오픈 날이죠?”
“아, 그러고 보니 지금 진행 중이겠네요.”
김 대표는 소파에 털썩 앉으며 고개를 젓는다.
“걱정할 거 없어. 어차피 우리가 제대로 선빵 날렸잖아.”
지금 인터넷엔 온통 「가시리 가시리잇고」의 매진 기사만 가득했다. 그야말로 뮤지컬계의 돌풍과도 같은 이슈.
“하지만 그쪽 홍보도 장난 아니지 않나요? 서 대표도 만만찮은 사람이고...”
“절대 그럴 리 없다니까, 나랑 내기할까?”
“에이, 당연히 대표님 말씀이 맞죠. 우리가 얼마나 노력했는데요.”
눈치 빠른 직원이 슬쩍 나서서 분위기를 다잡는다. 그러나 한 번 든 궁금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좋아. 어떻게 돼가고 있는지 한 번 확인해 보자고.”
“아, 그럼 제가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직원이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예매 사이트에 접속한다.
제일 먼저 확인한 곳은 국내 최대 예매 사이트 인터크파.
각종 할인 정보가 가득 담긴 메인 배너 아래, 현재 예매 랭킹이 보인다.
그런데...
티켓 순위를 확인하던 직원의 눈이 커진다.
“...어? 어? 어어?”
뭔가 잘못 본 듯 고개를 숙이는 직원.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휴대폰과 얼굴이 가까워진다.
“뭐야? 뭔데 그래?”
불안한 기색을 느낀 김 대표가 낚아채듯 직원의 휴대폰을 집어 든다.
“...어?”
그런데,
김 대표 역시 조금 전 직원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예매 랭킹 1위를 의미하는 자리.
어제까지 「가시리 가시리잇고」가 있던 그 자리에, 다른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시간 랭킹]
1위 : 뮤지컬 「거장의 숨결」.
2위 : 뮤지컬 「가시리 가시리잇고」.
3위 : 뮤지컬 「라이온 퀸」.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당황한 김 대표는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
그러나 여기 있는 누구도 영문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
강남에 위치한 스튜디오.
실내에선 신하율의 화장품 CF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이야, 하율이 미소는 진짜 백만 불짜리네. 웃는 게 어쩜 그렇게 예쁘니? 여신이 따로 없네.”
연거푸 감탄하는 감독의 말에 신하율은 자연스럽게 표정을 짓는다.
순탄하게 진행되는 촬영 현장.
그런데 유독 한 사람만 한숨을 내쉰다.
“하아...”
신하율의 매니저 성도윤 실장이었다.
성 실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신하율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며 코멘트를 했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신하율이 신신당부한 부탁 때문이었다.
“이거 큰일 났네...”
그때,
촬영이 잠깐 스톱 되고 쉬는 시간이 주어진다.
그러자 신하율은 곧장 성 실장은 찾는다.
“실장님, 어떻게 됐어요?”
“어? 아, 그게...”
당황한 성 실장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설마 안 했어요?”
“네가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안 했겠어? 근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하아, 니가 직접 보는 게 빠르겠다.”
성 실장이 답답한 얼굴로 노트북 화면을 돌린다. 작은 화면 안엔 한 뮤지컬의 예매 창이 떠 있었다.
한 곳도 빠짐없이 X가 쳐져 있는 예매현황.
지켜보던 신하율의 눈이 커진다.
“설마...”
“하아, 그래. 전석 매진이야. 그것도 5분 만에 매진됐다고. 나도 나름 대기 타다가 바로 들어갔는데, 서버 다운되더니 다시 들어가니까 이미 끝났더라고...”
성 실장은 미안한 듯 신하율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만큼 권서준 작가의 작품에 대한 신하율의 관심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
역시나 신하율은 아무 말 없이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영락없이 죄인이 된 기분.
좀처럼 부탁하는 게 없는 녀석이었기에 성 실장의 마음은 더 무거웠다.
“미안하다... 하율아...”
마지못해 꺼내는 성 실장이 사과를 건넨다. 그런데 신하율이 고개를 젓는다.
“아니에요. 뭐 어쩔 수 없죠.”
“...응?”
성 실장이 조금 놀라 신하율을 바라본다.
“진짜? 진짜 괜찮은 거야?”
“그럼요. 작품을 바로 못 보게 된 건 아쉽지만 그만큼 작가님이 잘되고 있다는 거니까요.”
어느새 신하율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보기 드물게 환한 미소.
카메라에 담기는 것보다, 아니 CF 감독이 감탄하던 미소보다 몇 배는 예쁜 미소였다.
그리고 미소 속엔 감출 수 없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
불과 5분.
27일간 이어지는 모든 공연이 매진되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당연히 언론사들에서도 난리가 난 상황.
[뮤지컬 「거장의 숨결」 1차 티켓 오픈으로 인해 4대 예매처 모두 서버 다운]
[업계 전문가, 이런 일은 12년 만에 처음 있는 일.]
[뮤지컬 「거장의 숨결」 역대급 매진 기록에 벌써부터 티켓 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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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거장의 숨결」의 서울 공연 티켓이 오픈 동시와 함께 전 예매처에서 1위를 차지했다. 전날까지 전 좌석 매진으로 1위를 차지하던 「가시리 가시리잇고」와 함께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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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티켓은 1시에 오픈했으며 예매처 판매 기준 오픈 5분 만에 전 좌석 매진을 기록, 국내 창작 뮤지컬 사상 최고 판매고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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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종전 2014년 「황금의 계절」 라이선스 공연이 세운 기록을 갈아 치운 것으로 권서준 작가의 흥행 마법이 뮤지컬에서도 통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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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예매 사이트에서 정상에 등극했다. 전체 예매자 비율은 남자 41.3%, 30-40대가 24%로 고른 분포도를 보여주며 이는 뮤지컬 「거장의 숨결」의 폭넓은 영향력을 다시금 확인시켰다...”
기사를 읽던 조현성이 혀를 내두른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표정으로 연이어 올라오는 기사를 계속 보는 중이었다.
“이거 믿기지가 않네요...”
사실 조현성 정도 되는 배우에게 매진은 그렇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국내 순수 창작 뮤지컬이, 그것도 1차 티켓 오픈에서 세운 기록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기록을 세운다는 건 모두에게 뜻깊은 일이니까.’
당분간은 조현성 배우가 세운 기록을 깨지지 않을 터. 자연스럽게 티켓 파워 면에서도 황준수보다 높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이잉, 지이잉.
벌써부터 조현성의 휴대폰으로 축하 메시지가 쏟아진다.
조현성은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무음 설정하고는 나를 바라본다.
“베네딕트 기사 말이에요. 현웅 씨한테 들어보니까 포스 극단과 계약할 때부터 생각해두신 거라면서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보시는 거예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조현성은 놀란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작가란 누구보다 본인의 작품이 잘 될 수 있게 노력해야 하는 사람이잖아요. 저 역시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번 작품은 제게 있어서도 소중한 작품이니까요.”
내 말에 조현성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힘든 게 사실이잖아요. 배우는 배우대로, 제작사는 제작사대로, 작가는 작가대로 자기 잇속만 챙기는 게 이 바닥이니까요. 그런데... 이번엔 뭔가 다른 느낌이에요. 같은 목표를 위해서 모두가 하나가 되는 기분이랄까요?”
그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떠오른다.
“이런 느낌,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네요.”
나는 조현성이 말하는 그 기분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순수하게 작품만을 위해 열정을 불태웠던 기억. 그건 쉽게 되찾을 수 없는 경험이니까.
“하지만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죠. 이 인기가 일회성이 되지 않으려면 이제부터는 여러분이 힘을 내주셔야 하니까요.”
내 말에 조현성이 고개를 끄덕인다.
“믿어주세요. 이번 작품에 제 모든 걸 불태울 테니까요.”
의지를 다지는 조현성의 모습이 더없이 든든했다.
사실 걱정할 것도 없었다.
이미 우리의 뮤지컬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으니까.
‘이제 보여주는 일만 남았지.’
창작 뮤지컬의 새로운 기록을 세운 작품 「거장의 숨결」.
수많은 예술가의 입에 오르내릴 명작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
그 첫걸음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