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00화 (100/203)

100. investment - 투자 (2)

100.

***

피어슨 출판사 대표실.

소설을 다 읽은 지 한참이 지났지만 실내엔 무거운 침묵만이 가득했다.

제목 : 당신이 머물던 자리에

특별한 제목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길거리에서 들리는 흔한 노래 가사 같은 흔한 제목이었다.

그런데,

그 내용은 결코 흔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한 세상은 아버지가 부재했고,

또 다른 세상은 아들이 부재했다.

서로가 부재한 평행 세계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삶을 기행문 형식으로 표현한 작품.

함께 걸었던 길을 이제는 각자 걸어야 하는 두 부자(父子)의 짧은 여정이 잔잔하게 그려진다.

아버지가 아들을 생각하며 떠올리는 추억,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를 생각하며 떠올리는 기억들.

그 두 시선이 교차하면서 두 부자의 생각과 추억이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처음엔 가방을 가득 채웠던 무거운 짐들도 차츰차츰 가벼워지고, 이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 손에 남아있는 건 서로의 얼굴이 담긴 사진 한 장뿐이었다.

수많은 오해와 미움.

그리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픔과 상처가 존재하지만 그 끝에 남는 건 정금(精金) 같은 사랑.

그들의 여정은 헛된 감정들과 오해들을 체에 걸러 곱게 정제하는 과정과 같았다.

그리고,

여행의 의미는 그것으로 족하였다.

그게 가족임을, 그게 아버지와 아들의 의미임을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뒤늦게 서로의 깊은 사랑을 깨달은 두 사람은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그 내용을 읽어가던 존 대표의 눈시울도 어느새 뜨끈해진다.

“흠, 흠.”

격해지는 감정에 존 대표가 애써 헛기침을 하며 감정을 추스른다. 그러나 한 번 요동친 감정은 좀처럼 주체하지 못하고 흔들린다.

“오랜만이군. 이런 감정이 드는 게...”

한 해에도 뛰어난 작품을 수차례 출판하는 영국의 명문 출판사. 그런데 그곳 대표가 한 동양 청년의 작품에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이건, 단순히 작품성이 뛰어난 게 아니야.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감정을, 너무 정확히 파고들었어...”

해리 역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맞습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부모 혹은 자식일 수밖에 없죠. 세상에 사는 누구도 그 두 가지 범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권서준 작가는 그 두 범주 안에 독자를 가둬놓고 우리가 무심코 지나가는 그 의미에 대해 지독하리만큼 깊고, 세밀하게 파고들었어요...”

존 대표의 생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건, 소설을 본 느낌이 아니야...’

그렇다고 마치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이라는 진부한 표현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 증인. 내가 두 사람의 증인이 된 기분이었지.’

오해와 사랑으로 뒤섞인 두 부자의 애달픈 부정을 마치 그들이 되어 경험한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마치 내 일처럼 다가오는 슬픈 이야기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다 읽고 난 뒤에도 좀처럼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이게, 초고라니...”

질문인지 감탄인지 모를 혼잣말이 흘러나온다. 그러자 올리버 편집장이 대답한다.

“솔직히 완고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완성도죠.”

존 대표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 멋진 세계를 만들어낸 창조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그래, 권서준 작가가 몇 시에 도착한다고?”

어느 순간부터 존 대표의 얼굴에 감추지 못한 흥분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

점심 무렵.

오후의 햇살이 커튼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온다.

런던 날씨답지 못하게 유난히 좋은 날씨.

그러나 모처럼 화창한 대기 덕에 런던 본연의 색깔이 눈에 들어온다.

빛바랜 듯 보이지만 그 빛깔에 담긴 건 오랜 세월이었다.

그 경치를 즐기다 보니 어느덧 피어슨 출판사와의 약속 시각이 다 되었다.

지이잉.

알람이 울리자 장현웅이 고개를 든다.

“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어젯밤 늦은 시간까지 웹툰 작업을 한 터라 다소 눈이 충혈된 상태.

그러나 곧바로 외투를 걸치고 외출 준비를 마친다.

“안 피곤해?”

“피곤해도 해야 할 일은 해야지.”

기지개를 켠 장현웅이 이내 웃는다.

“그래도 웹툰 2화 원고까지 마무리했어. 이제부터 비축분 늘리려고.”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좋아. 그럼 귀국해서 바로 올려보자.”

“오케이. 후아, 이제 시작인가? 괜히 떨리네.”

장현웅이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직도 자신의 작품에 확신이 안 서는 모양이었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콘티랑 그림 다 봤잖아. 걱정하지 말고 나만 믿어.”

그 말에 장현웅이 고개를 끄덕인다.

“오케이!”

장현웅의 웹툰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내용도, 그림의 퀄리티도 수준급이었으니까.

그동안 열심히 파종했으니까 이제 추수할 타이밍이었다.

물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곳 영국에서도 아직 추수해야 할 게 남아 있었다.

바로 차기작에 대한 피어슨 출판사와의 계약.

물론 그것 역시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

늦은 오후.

존 대표는 해리와 올리버 편집장과 함께 권서준 작가 일행을 마주했다.

“반갑습니다. 존입니다.”

“안녕하세요. 해리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권서준입니다.”

짧은 인사와 함께 대화를 이어갔다.

주제는 단순히 이번 작품을 넘어서 전반적인 예술 분야로 확대되었다.

“같은 유럽이지만 각국의 문학적인 방향성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공연 스타일도 제각각 다른 특징을 나타내고 있죠.”

권서준 작가는 희곡 작가답게 공연 쪽 식견도 매우 깊었다.

“프랑스의 경우 전위적이고 스케일이 큰 무대 디자인을 추구합니다. 음악도 샹송을 바탕으로 한 아름다운 멜로디, 전문 댄서들의 대거 기용 등으로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죠. 마찬가지로 영국 공연의 특징은...”

20대 후반의 동양인 청년은 세계적인 출판사 대표 앞에서도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지.’

작품에 대한 질문에도 차분히 답했다.

오히려 작품을 읽으며 놓쳤던 부분을 짚어주는데 그 깊이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 작품, 우연히 나온 게 아니었어.’

대화를 이어가면 이어갈수록 기대감은 확신으로 변해 있었다.

덕분에 전체적인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더 이상의 검증은 의미가 없었다.

결심을 한 존 대표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이쯤 해서 저희에게 잠시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존 대표의 말에 권서준 작가 일행이 밖으로 나간다.

“만만한 친구가 아니군.”

존 대표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글은 더 만만하지 않은 친구죠.”

자신감 넘치는 올리버 편집장의 말투.

존 대표도, 해리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계약하자고.”

대표가 내민 조건은 최고의 최고 수준이었다. 이쯤 되자 오히려 올리버 편집장이 놀란다.

“정말, 이 조건으로 하실 겁니까?”

“그래, 이 정도 투자는 해야지.”

존 대표는 철저한 사업가였다.

이익이 남지 않는 곳에 투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신, 확실한 이익이 예상되는 곳에 투자를 아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작품은 몇 배는 얻어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자 미팅 과정을 지켜보던 한 실무진이 끼어든다.

“가장 그 나라다운 게 가장 세계적이라더니, 가장 한국적인 동양 작가가 이번에 큰일을 했네요.”

가만히 듣고 있던 존 대표는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난 그 말이 틀렸다고 하고 싶군.”

“...네?”

순간 모든 사람의 관심이 집중한다.

그러자 존 대표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가장 그 나라다운 게 아니라, 가장 권서준다운 게 가장 세계적인 거지. 앞으로도 그럴 거고.”

존 대표의 발언은 기대를 넘어 확신과도 같았다.

***

저벅저벅.

계약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해리의 발걸음은 더없이 느리고, 더뎠다.

“...”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감상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딸깍.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비서가 일어난다.

“미팅은 잘 끝나셨나요?”

“어? 아, 어...”

생각에 잠긴 해리를 보며 비서가 다시 묻는다.

“그 작가와의 계약 건은 당연히 안 된 거죠?”

해리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사실 올리버 편집장에게 억하심정이 있어서 권서준 작가의 계약을 막은 건 아니었다. 피어슨 출판사에서 꽤나 큰 업적을 세운 것도 올리버 편집장이었으니까.

‘다만, 회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작품이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리는 뒤늦게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아니, 계약했어.”

“네? 분명 어렵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그런 줄 알았는데... 내가 보는 눈이 없었지.”

비서가 순간 눈을 크게 뜬다.

이렇게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해리였다.

그러나 해리는 다른 말 없이 그대로 자기 자리에 앉는다.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 때문이었다.

소설을 읽자마자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떠올랐다.

‘아버지...’

시골에 계신 연로한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래, 자신은 아들이었다.

동시에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래, 자신 역시 누군가의 아들이자 아버지였다.

부모와 나, 그리고 자식으로 이어지는 애틋함이 자연스럽게 하나의 줄로 이어진다.

그래, 독립되어 있으나 결코 끊어질 수 없는 혈연(血緣)이라는 고리.

그 천륜(天倫)의 의미와 당연하게 여겼던 사랑이 먹먹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 모든 깊은 감상을 이끌어낸 건 바로 한 권의 책이었다.

자연스럽게 책상 위에 놓인 액자로 시선이 흐른다. 어느새 백발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모습.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해리가 휴대폰을 꺼내 든다.

몇 번이나 고민 끝에 발신 버튼을 누른다.

신호가 가고,

잠시 뒤 아버지가 전화를 받는다.

“아버지, 네, 접니다. 네? 무슨 일은요. 그냥 전화 드렸죠. 네, 네. 집엔 별일 없죠? 어머니도 건강하시고요?”

바쁘다는 핑계로 몇 년 만에 건네는 안부 전화.

오해와 상처를 넘어서 서로의 진심에 다가가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

그날 오후.

피어슨 출판사와의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제 작품에 부정적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호의적으로 나오다니, 의외네요.”

내 말에 올리버 편집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초반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다만, 권 작가님의 초고를 본 뒤에 많은 것들이 달라졌죠.”

역시나 내 예상대로였다.

경영진들에겐 추상적인 가치보다 확실한 초고가 더 임팩트 있게 작용하는 법이니까.

“계약 조건은 마음에 드십니까?”

“물론입니다. 아마 이 정도의 계약은 다시 얻기 힘들지 않을까요?”

올리버 편집장이 웃는다.

그렇게 우리는 모든 계약 조건에 동의했다.

일련의 과정이 끝나자 올리버 편집장이 나를 보며 고개를 젓는다.

“아서의 말대로 대단하시네요. 전혀 그 나이대의 작가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요.”

“칭찬이신 거죠?”

내 농담에 올리버 편집장이 웃음을 터트린다.

“물론이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서명을 하기 위해 만년필을 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사각사각.

피어슨 출판사가 내민 새하얀 계약서 위에 내 이름 석 자가 멋있게 자리 잡았다.

***

“대박! 내 친구가 피어슨 출판사와 계약을 하다니!”

피어슨 출판사를 나오자마자 장현웅이 신나서 소리친다.

장현웅처럼 들뜨진 않았지만 나 역시 기뻤다.

「거장의 숨결」 희곡.

차기작 「당신이 머물던 자리에」 출판권.

이곳에서 얻어가려고 했던 세 가지 중 두 가지를 이미 이뤄냈으니까.

‘그것도 예상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으로.’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린 상태.

이제는 단 하나의 문제만 남아있었다.

계약 성공으로 환호성을 내지르던 장현웅이 순간 나를 쳐다본다.

“근데, 내일 스티브 대표 만나기로 한 건 기억하지?”

“어.”

단답형인 내 대답에 장현웅의 얼굴에 걱정이 떠오른다.

“근데, 이제 어떡할 거야? 희곡 대본은 포스 극단과 계약했고, 차기작은 피어슨 출판사와 했잖아? 하이든 에이전시와 만나서 할 얘기가 있을까?”

“물론이지. 아직 팔게 하나 남았잖아.”

“아직도? 뭔데?”

장현웅으로서는 당연히 궁금해 할 일.

그러나 내 머릿속엔 이미 다 계산된 일이었다.

아직 투자를 기다리는 작품 하나가 남아 있었으니까.

“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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