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99화 (99/203)

99. investment - 투자 (1)

99.

***

강남에 위치한 스튜디오.

눈부신 조명이 쉴 새 없이 비추는 광고 촬영 현장.

찰칵, 찰칵.

셔터음과 함께 파이팅 넘치는 사진작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좋아, 더 강하게. 더 힙하게! 그렇지!”

사진작가의 외침에 따라 신하율의 표정과 자세가 그야말로 팔색조처럼 바뀐다.

“좋았어!”

흡족한 표정의 사진작가가 카메라를 조수한테 넘기자 촬영이 종료된다.

“어때요? 잘 나왔어요?”

신하율은 쉴 시간도 아낀 채 달려와 모니터링을 한다.

“잘 나왔지. 그것도 아주.”

사진작가의 말 대로였다.

몽환적이면서 도도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잘 담겨 있었다.

“이건 좀 표정이 인위적이지 않나요? 한 번 더 찍을까요?”

“아이고 됐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못해 넘쳐요.”

열정 넘치는 신하율의 대답에 사진작가가 흐뭇하게 웃는다.

“그나저나 하율이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네. 하율이 정도 뜨면 다들 대충하고 그러던데.”

“에이, 광고 촬영도 결국 연기잖아요. 대충하면 안 되죠.”

“하하하, 누구한테 연기를 배웠는지 아주 잘 배웠어.”

“그럼요. 아주 훌륭한 분한테 배웠죠.”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는 신하율의 모습에 사진작가의 관심이 인다.

“그게 누군데?”

“권서준 작가님이요.”

“뭐?”

놀라는 건 당연했다.

어느 연기 선생님, 어느 선배 배우도 아니고 작가 이름이 나왔으니까.

그러나 어디까지나 사실이었다.

‘내 캐릭터 해석, 그리고 열정. 그 모든 걸 제대로 발휘할 수 있게 도와주신 분이 권 작가님이니까.’

신하율에게는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아무튼 아주 잘했어. 이 정도면 배우가 아니라 모델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사진작가의 거듭된 칭찬과 함께 촬영이 마무리된다.

“후우.”

신하율은 그제야 숨을 고르며 포토존을 벗어났다.

그런데 그때,

매니저가 놀란 듯 허겁지겁 달려온다.

“하, 하율아! 대박 뉴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달려오는 매니저를 보니 꽤 큰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놀란 신하율이 묻자 다급히 숨을 고른 매니저가 입을 연다.

“우리가, 우리 작품이 한국 드라마 어워즈 대상 후보에 올랐어!”

놀란 만큼 너무나 기쁜 소식이었다.

그러나 소식을 들은 신하율은 기뻐하기도 전에 다급히 휴대폰을 찾았다.

“야, 뭐해? 대상 후보 올랐다니까? 안 기뻐?”

지켜보던 매니저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러나 신하율은 대답도 잊은 채 다급히 메시지를 남긴다.

이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하고 싶은 사람 때문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신하율은 메시지 전송이 완료되고 나서야 입은 연다.

“기뻐요. 너무 기뻐서 빨리 이 소식을 전해드리고 싶어서요.”

어느새 그녀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지이잉.

아침부터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작가님, 저희 작품이 한국 어워즈 대상 후보에 올랐대요!]

아직 종방도 하지 않은 작품이 어워즈에 초대받았다는 건 그만큼 작품에 대한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시청률, 작품성 모두 잡았기에 가능한 일.

수상 여부는 모르지만 그 자체로 축하할 일이었다.

물론 작품 「이옥」은 대상 후보뿐만 아니라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작가상까지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내 관심을 끈 건 여우조연상.

큰 비중이 아니었음에도 신하율은 당당히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나 역시 기쁜 마음을 담아 답장을 보냈다.

[하율이도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거 축하해. 앞으로도 더욱 빛나자고.]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긴 했지만 아직 신하율의 가치의 1/10도 발휘되지 못한 상태였다.

「이옥」에서는 조연 역할이었고, 신하율의 장기인 캐릭터 이해력과 감각적인 연기력을 보여주기엔 배역이 작았으니까.

‘신하율을 주연으로 작품 하나 써 봐도 재미있겠어.’

반짝반짝 빛나는 연기 천재를 떠올리자 또다시 영감이 솟구친다. 그러나 나는 애써 확장되는 생각을 다시금 갈무리한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차기작에 대한 계약 마무리였으니까.

‘추가로 한 가지가 더 있고.’

「거장의 숨결」 뮤지컬 성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포스 극단과의 협의가 남아있었다.

***

몇 시간 뒤 런던.

극장들이 모여 있는 웨스트엔드 초입.

첫발을 들이자 때마침 정은미 피디의 연락이 도착한다.

-작가님, 우리가 후보에 올랐어요!

첫 장편 작품이 대상 후보에 오르자 정 피디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옆에서는 들뜬 본부장과 진영민 CP의 목소리도 들린다.

벌써부터 축하 분위기인 사무실 분위기.

-언제 귀국하세요? 저희 회식 한 번 더 해야죠?

“좋죠. 아마 며칠 내로 돌아갈 거 같습니다.”

나는 돌아가자마자 잡힐 술 약속을 생각하며 전화를 끊었다.

통화하며 걷자 어느새 목적지 근처에 도착했다.

포스극단.

잿빛을 띠는 고풍스러운 6층짜리 건물.

마치 해리포터 소설 속에 등장하는 느낌의 건물이 내 눈길을 끈다.

건물 한가운데 위치한 커다란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공연 시간이 아니기에 아무도 없는 지금, 덩치 큰 경비원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

“손님, 죄송하지만 지금은 공연 시간이 아닙니다.”

친절하면서도 고압적인 느낌이 드는 경고의 멘트.

“찰스, 그분은 나를 찾아온 손님이네.”

그때,

때마침 아서가 다가온다.

아서의 말을 들은 경비원이 그제야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옆으로 비켜준다.

“오셨어요?”

서둘러 다가온 아서가 친근한 얼굴로 다가온다. 계약 이후 부쩍 호의적인 아서의 반응에 나 역시 편안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나는 아서와 함께 포스 극단을 둘러보며 안으로 향했다.

“참, 벤이 연습 중인데 한 번 보시겠어요?”

“벌써 연습이요?”

“그만큼 의욕이 대단해요. 이미 대본이 나왔으니까 연습하는 데에 문제는 없고요.”

나는 아서를 따라 소극장에서 몇몇 배우들과 연습하는 베네딕트의 모습을 지켜봤다.

“제발, 신이 있다면 세상을 멈춰주시오. 아직 시간이 부족하오. 조금 더, 제발 조금만 더 내가 살 수 있게 시간을 멈춰 달란 말이오!”

나직하게 시작한 목소리가 원망이 더해지면서 점차 고조된다. 그리고 이내 버튼을 누른 듯 허공에서 폭발한다.

“이 사악한 존재여! 그도 안 된다면 차라리 나를 먼지처럼 사라지게 해주시오. 바람에 날리는 한낱 가루가 되어 세상이 나의 죽음을 알지 못하게 해달란 말이오!”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소극장 안을 울린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

베네딕트는 연기가 아닌 크리스토퍼 말로가 되어 외치고 있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열기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쥔다.

그리고 곧 밤처럼 찾아온 소강상태.

그의 연기는 이미 완성단계에 있었다.

지켜보던 아서가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어떠십니까?”

“엄청나네요.”

솔직한 평가였다.

“그렇죠. 저 친구는 연극만 하면 없던 열정이 생기거든요.”

흐뭇하게 웃던 아서가 이내 나를 바라본다.

“참, 벤과 인사하시겠어요?”

“아닙니다. 오늘은 벤의 연기를 본 것만으로도 족하니까요.”

사실 나는 베네딕트의 연습을 보려고 온 건 아니었다. 바쁜 시간을 쪼개 인사차 온 것도 아니었고.

“사실 부탁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권 작가님이, 제게 부탁이요?”

의아하게 되묻던 아서가 이내 나를 바라본다.

“뭐든지 말씀하세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이미 쌓인 친밀함에 얘기를 꺼내기가 수월했다.

“「거장의 숨결」 IP로 현재 국내 뮤지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아, 벌써 뮤지컬을 생각하셨군요?”

“네, 그래서 두 작품의 성공을 위해 한·영 동시 개막을 추진하면 어떨까 합니다.”

예상치 못한 제안인 듯 아서가 눈을 크게 뜬다.

“혹시, 같은 시기에 두 작품을 무대에 올리자는 말씀이신가요?”

“맞습니다. 뮤지컬 최초로 한·영 2개국에서 각각 연극과 뮤지컬로 같이 무대에 올리는 거죠.”

잠시 고민하던 아서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음. 대개는 국내에서 먼저 작품을 선보이고 다른 나라 진출을 고민하는데 이런 방식은 확실히 신선하군요. 확실히 저희 입장에서도 여러모로 마케팅 효과도 얻을 수 있고, 연극과 뮤지컬의 차이를 통해 다양한 기획도 해볼 수 있고요.”

아서는 총괄 디렉터답게 내 제안의 의미를 정확히 캐치했다.

이게 내 정확한 오늘의 방문 목적이었다.

“좋습니다. 저도 한 번 임원들과 논의해보겠습니다.”

시원한 대답이었다.

이 정도 반응이면 걱정할 일은 없었다.

그런데 대답을 마친 아서가 다시금 나를 쳐다본다.

“근데 작가님, 혹시, 작가는 부업이신가요?”

내가 대답 대신 쳐다보자 아서가 미소를 짓는다.

“권 작가님과 대화를 할 때마다 사업가의 느낌이 느껴져서요. 마치 저희 대표를 만나는 느낌이랄까요?”

“칭찬인 거겠죠?”

“물론이죠. 아무튼 여러모로 대단하십니다.”

우리는 흐뭇한 덕담을 주고받으며 다시 건물을 빠져나왔다.

“이제 올리버, 그 친구를 만나러 가십니까?”

아서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슬슬 차기작 계약도 마무리할 시점이니까요.”

명문 출판사 피어슨과의 계약 미팅이 남은 상태.

물론 자신 있었다.

***

피어슨 출판사.

사무실에 앉아 모니터를 보던 해리가 한숨을 내쉰다. 올리버 편집장이 독단적으로 진행하는 미팅 때문이었다.

“정말 답답하군.”

갈색빛이 도는 머리가 앞쪽으로 흘러내린다.

회사는 철저하게 이윤을 위해 존재하는 곳. 출판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될 만한 작품, 될 만한 작가와의 계약을 통해 판매를 이뤄내고, 판권을 판매해야 수익을 낼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올리버 편집장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걸까.”

최근 올리버 편집장의 행보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커리어에 심각한 흠이 될 수 있는 일은 왜 스스로 벌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자신은 자신의 역량만 제대로 보여주면 그만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권서준 작가의 작품을 살폈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급히 번역해서 읽은 「덧없는 행운이여」라는 작품은 분명 잘 쓴 작품이 맞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한국적인 색이 진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서야 녹색 병을 들어 마시면 소주라고 생각하지만 외국인 입장에선 저 병이 뭔지도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지.’

그게 바로 언어와 문화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이었다.

게다가 영상으로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그 이질감을 글로 설득해야 할 때는 더 많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때때로 그 모든 경계를 뛰어넘는 세계적인 작품이 나오기도 하지만 적어도 이번 권서준의 작품은 아니야.’

확신할 수 있었다.

지이잉.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올리버 편집장의 연락이었다.

[긴급 미팅을 신청합니다.]

권서준 작가와 함께하는 미팅은 3시간 뒤였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존 대표까지 참석한다는 메시지에 해리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대표실에 도착하자 미리 와있던 올리버 편집장의 모습이 보인다.

“무슨 일이신가요?”

해리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묻는다.

그러자 올리버 편집장이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연다.

“오늘 권 작가와의 미팅 때문입니다.”

해리는 다소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연다.

자신의 커리어와 회사를 위해 이번만큼은 올리버 편집장의 의견에 반대해야 했다.

“하지만 전 여전히 같은 생각입니다. 초고도 나오지 않은 작품과 계약할 순 없으니까요.”

그러자 올리버 편집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연다.

“누가 초고가 안 나왔다고 했습니까?”

“네? 그거야...”

“이미 초고를 받아둔 상태입니다.”

올리버 편집장은 미리 준비해둔 원고 두 부를 두 사람 앞에 내밀었다.

“권 작가를 만나기 전에, 직접 읽어보고 결정하시죠.”

벌써 초고가 나왔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그러나 그보다 놀라운 건 올리버 편집장의 태도였다.

조심스러운 올리버 편집장의 성격과 달리 말투와 표정에서 자신감이 묻어난다.

‘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올리버 편집장이 저러는 거지?’

순간 호기심이 인다.

그러나 답은 이 작품 속에 있었다.

존 대표와 해리가 동시에 원고를 집어 든다.

제목 : 당신이 머물던 자리에.

첫 시작은 아버지의 시점이었다.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버지의 절규.

담담한 듯 보이지만 결코 숨겨지지 않는 슬픔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첫 장을 넘겨 작품을 읽어 내려간다.

그런데...

시작부터 범상치 않다.

“이, 이건...”

불과 5분도 되지 않아 해리의 눈이 커진다.

고개를 들자 맞은편에 앉은 존 대표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들어 바라보고 있었다.

“...”

“...”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눈빛만으로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을 지켜보는 올리버 편집장의 얼굴에 어느새 미소가 떠오른다.

‘그래, 그거라고.’

모두가 부인한 권서준의 가치.

그 원석을 가장 먼저 발견한 자의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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