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01화 (101/203)

101. investment - 투자 (3)

101.

***

K-국제 뮤지컬 마켓.

작년 기준 4,500억에 달했던 뮤지컬 시장의 양적 확대와 질적 성장을 위해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예술의 전당과 국내 투자기업이 함께하는 행사였다.

특히 전체 매출액의 40%를 차지하는 창작 뮤지컬을 국내외 제작사와 투자사에 선보이고, 아시아권을 넘어 미국과 영국 등 세계 시장에 진출할 기회를 모색하기 위한 자리.

“이번 행사엔 코디 라슨(Cody Lassen), 제인 베르제르(Jane Bergere), 크리스 그레이디(Chris Grady)와 같은 영미권 유명 제작사들까지 초청해 한국 드라마, K-pop에 이어 한국 뮤지컬이 세계에서 주목받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예술인 지원센터 대표의 환영사로 행사가 시작된다.

환영사처럼 원대한 포부를 품고 이번 행사에 동참한 부스들이 길게 늘어선 행사장.

그러나 필연적으로 투자를 받으려는 극단은 많았고, 투자사는 적은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투자를 받기 위한 간절한 몸부림이 이어진다.

서미연 감독 역시 마찬가지였다.

행사 가장 후미진 곳에 위치한 창조 극단 부스.

서 감독은 국내 투자 기업 담당자를 대상으로 열띤 투자 유치를 하고 있었다.

“저희 작품은 연극계에서 이미 성공한 IP로 검증을 받은 작품입니다. 마찬가지로 뮤지컬 역시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고요.”

그러나 맞은편에 앉아서 듣고 있던 담당자의 고개가 살짝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음. 설명 감사합니다. 물론 감독님이 연극에서 쌓아 오신 명성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뮤지컬은 그 규모가 너무 다릅니다.”

담당자의 말은 부정할 수 없었다.

연극과 달리 뮤지컬은 제작비만 최소 수십억에서 이를 정도니까.

“솔직히 우리나라 뮤지컬은 잘 돼도 메인 배우 출연료로 거의 다 나가고, 안 되면 본전도 못 찾는 구조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솔직히 작은 극단 작품에 투자하기란 쉽지 않죠.”

구구절절 틀린 말이 없었다.

사실 과거, 서 감독이 뮤지컬에서 연극 쪽으로 방향을 튼 것도 사실이었고.

그러자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심이 든다.

“그럼, 왜 저희와 미팅을 잡으신 거죠?”

솔직한 질문에 담당자가 살짝 헛기침을 내뱉는다.

“그 뮤지컬 대본 말입니다. 그거 권서준 작가님이 직접 집필했다는데 사실인가요?”

“물론입니다.”

눈치를 보던 담당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그럼, 그 작품 판권만 좀 논의해볼 순 없을까요?”

작품의 대본과 판권만 노리는 수작이었다.

서 감독이 펼쳐놨던 브로슈어를 소리 나게 덮었다.

“죄송합니다만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더 하실 말씀 없으면 미팅은 이렇게 마무리하죠.”

서 감독이 먼저 일어나자 담당자가 실소를 터트린다.

“하, 어이가 없네요.”

“뭐라고요?”

“투자를 원하시는 분이 이렇게 현실을 못 보시면 어떡합니까? 근본도 없는 소극단에 수십억을 투자할 투자사가 대한민국에 있을 거 같아요? 그나마 대본에 관심 가져주는 것도 고마워해야 할 상황에서 나 원 참.”

이내 코웃음을 치며 멀어지는 담당자.

홀로 남은 서 감독의 표정이 굳어진다.

“하아... 벌써 몇 번째인 거지?”

부스를 찾아온 몇 안 되는 투자사들은 하나같이 권서준 작가의 대본만 노렸다.

‘이쯤 되니까 놓아드리는 게 맞나 싶은 생각까지 드네...’

권서준 작가 입장에선 대본과 판권만 계약해도 큰돈을 벌 수 있는 상황. 괜스레 발목을 잡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니야. 작가님이 자기만 믿으라고 했잖아. 이 정도로 포기하면 안 되지...’

뮤지컬에 대한 모든 계획은 권서준 작가의 머릿속에 나온 것. 일단은 그의 뜻대로 움직이는 게 맞았다.

“와!!!”

그런데 그때, 환호성이 들린다.

투자 설명회와 함께 진행되는 몇몇 뮤지컬의 시연회 반응이었다.

대표적인 작품은 바로 오늘 극단의 작품.

제목 : 가시리 가시리잇고.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뮤지컬 버전으로 완성한 작품이었다.

주요 장면만 시연했는데 들려오는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이야, 역시 김재용 대표님이네요. 갑자기 뮤지컬 도전이라 걱정했는데, 이 정도 작품성이면 믿고 투자할 수 있겠는데요?”

“제가 언제 실망시켜드린 적 있었습니까? 그리고 부장님께만 말씀드리는 거지만, 이건 빙산의 일각입니다. 더 놀라운 장면이 아주 많이 담겨 있거든요.”

“이게 또 애국 감성을 자극하는 작품이라 흥행은 문제없겠네요.”

“크으, 역시 그걸 단번에 알아보시다니, 안 부장님의 안목에 감탄만 나오네요.”

파리 날리는 창조 극단의 부스와 달리 오늘 극단 쪽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안 부장님, 이미 세팅은 끝났습니다. 이대로 투자를 하시면 돈 놓고 돈 먹는 거나 다름이 없죠.”

이미 사람들은 대형 극단, 그리고 대본과 배우까지 세팅이 마무리된 김 대표의 작품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명색이 한국 뮤지컬의 근간을 위한 행사라는 행사 취지에 어울리지 않은 진행이었다.

‘결국 중소 극단이 설 수 있는 무대는 아닌 거지...’

냉정한 시장경제에서 어쩔 수 없는 도태.

그 냉혹한 현실을 마주한 서 감독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밖으로 나오자 한숨이 흘러나온다.

이대로 투자가 안 되면 뮤지컬 진행은 어려운 상황.

‘투자만 되면 어떻게든 될 거 같은데...’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돈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 감독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권 작가님은 기다리라고 했지만, 뭐라도 해야지.’

작가에게 모든 걸 맡길 수는 없었다.

서 감독은 다음 투자를 만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주만 벌써 21번째 미팅이었다.

***

나는 하이든 에이전시와의 미팅 전 윤석훈 기자와 오랜만에 통화를 나눴다.

계약 관련 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국내 뮤지컬 근황에 대해 물었다

“기자님, 이번 뮤지컬 투자 유치 설명회 분위기는 어땠나요?”

-아, 그거요? 일단 오늘 극단 작품이 가장 주목받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가장 많은 투자를 받고 있고요. 소문에 의하면 오히려 극단 측에서 가려 받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하네요.

가려 받는 이유는 확실했다.

자기 자본이 많을수록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테니까.

김재용 대표.

끝까지 돈 욕심이 과한 인간이었다.

물론 나 역시 이번 뮤지컬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모두 얻어내야 했다. 그건 단순히 돈이 아닌 내 작품에 대한 가치 문제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돈을 벌기 위해선 돈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뮤지컬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투자 문제가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했다.

‘잔챙이들의 투자는 필요 없어. 그랬다가는 오히려 배가 산으로 갈 테니까.’

나를 믿고, 끝까지 밀어줄 투자자가 필요했다. 물론 나는 이미 생각해둔 투자자가 있었다.

바로 하이든 에이전시.

지금이야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에이전시 그룹이지만 초창기 하이든은 투자 전문 회사였다.

작가 에이전시와 함께 작품의 유통과 투자까지 책임지는 총괄 콘텐츠 기업. 그것이 바로 스티브 대표가 꿈꾸는 회사였다.

‘그러나 쉽지 않았지.’

특히 창업 초기 10년 사이에 연이어 실패한 영화, 뮤지컬 사업은 한때 하이든 에이전시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로 위기를 가져다준 사건이었다.

결국 접을 수밖에 없었던 스티브 대표의 꿈.

나는 그 부분을 노릴 생각이었다.

‘성공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못 이룬 꿈에 집착하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 계획을 위한 모든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

“후.”

런던 히드로 공항.

방금 도착해 수화물을 기다리던 스티브 대표가 한숨을 내쉰다.

긴 비행으로 인해 몸은 피곤했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은 상태였다.

그러나 함께 온 실무진은 오늘의 미팅이 시작부터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이가 없네요. 감히 대표님과의 일정을 미루다니.”

“이런 경우가 있었나?”

실무진이 고개를 젓는다.

“전혀요. 감히 어떤 작가가 대표님과의 약속을 미룹니까?”

“그래서 그런가? 난 좀 신선한 느낌도 드는데?”

실무진의 반응과 달리 스티브 대표의 얼굴엔 미소마저 엿보였다.

‘생각할수록 재미있는 친구야.’

권서준 작가와의 미팅.

추진한 지가 꽤 됐지만 흐름이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일을 진행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계약 진행 흐름을 파악하기 쉬운데, 이번엔 좀처럼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직 권서준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도 제대로 모르겠고 말이야.’

한국 지사를 맡고 있는 고용수 부장에 따르면 보통 사람은 아닌 듯싶었다.

듣기엔 나이 어린 작가라 했는데 피어슨 출판사, 포스 극단과의 계약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할 걸 보면 사업적인 역량 역시 뛰어난 모양이었다.

“근데, 이미 권서준 작가의 모든 작품이 계약됐다고 합니다. 포스 극단의 경우 베네딕트가 출연하기로 결정됐고요.”

“흠.”

스티브 대표가 턱을 쓸어내린다.

“우리와의 미팅이 있음에도 계약을 진행했어. 이게 뭘 뜻하는지 알아?”

“뭐죠?”

“아쉬운 건 자기가 아니라는 뜻이야.”

스티브 대표의 말에 실무진의 눈이 커진다.

“설마 저희가 아쉬울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우리가 런던까지 온 거 보면 이미 답 나온 거 아닌가?”

“하아, 보통 배포가 아니네요.”

“배포뿐만이 아니야. 자신의 가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거지.”

고개를 끄덕이던 실무진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린다.

“근데, 차기작까지 계약 완료된 상태에서 더 이상 팔 것도 없을 텐데 왜 우리를 만나자고 하는 걸까요?

“글쎄, 그건 일단 만나봐야 알겠지. 대체 어떤 떡이 남았기에 우리를 이렇게 찬밥신세 취급했는지 말이야.”

말과 달리 스티브 대표의 얼굴은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권서준 작가에 대한 기대감은 갈수록 커져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권서준에게 바라는 유일한 한 가지가 있었다.

‘어설프게 면전에서 대본만 내밀지 않았으면 좋겠군.’

수많은 작가가 스티브 대표에게 보여준 제안 방식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아마추어나 다름없는 행동.

스티브 대표는 권서준 작가가 자신의 기대감을 충족시켜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게 어떤 방식이든.

***

늦은 오후.

하이든 에이전시와의 미팅 시각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이 가까워지는 만큼 장현웅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떠오른다.

“흠, 흠. 서준아, 미팅 준비는 잘 된 거야?”

장현웅은 다소 걱정되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걱정돼?”

“그게 그러니까... 네 대본이 훌륭한 건 알지만 그쪽도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니까. 걱정돼서 그렇지.”

“맞아, 단순히 대본만으로는 설득하기 힘들 거야.”

장현웅의 생각은 정확했다.

스티브 대표처럼 똑똑한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선 몇 가지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그럼, 뭔가 더 준비한 게 있는 거야?”

“물론이지.”

하루에도 수십 개의 대본이 쏟아지는 에이전시 대표에게 대본만으로 승부를 보는 건 어리석었다.

보다 실질적으로 확신을 줄 수 있는 결과물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위해 나는 이미 한 친구에게 부탁한 상태였다.

지이잉.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자는 베네딕트. C였다.

-부탁하신 영상 보내드릴게요.

중저음의 듣기 좋은 영국식 발음.

게다가 그가 전한 말은 내가 기다리던 바로 그 소식이었다.

“바쁘실 텐데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우린 친구잖아요. 그리고 모처럼 제대로 된 연기를 할 수 있어서 저도 즐거웠습니다.

짧고 간단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지이잉.

잠시 뒤 휴대폰으로 베네딕트가 보낸 영상이 도착했다.

나는 장현웅과 함께 영상을 확인했다.

옆에서 보던 장현웅의 눈이 커진다.

“허, 헐... 이런 건 대체 언제 준비한 거야?”

언제 준비하긴, 스티브 대표와의 만남을 생각하면서 미리 준비해둔 거지.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물주를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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