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95화 (95/203)

95. birthplace - 출생지 (2)

95.

***

이른 아침, 피어슨 출판사.

사무실에 출근한 올리버 편집장의 표정은 어두웠다.

“편집장님,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으신 거 같은데...”

평소와 다른 표정에 비서가 걱정스러운 듯 묻는다.

“어, 아니야.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올리버 편집장은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는다. 모두 며칠 전 아서와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그러니 자네도 조심하게. 나야 모든 카드를 들이밀어 붙잡았지만, 조금만 늦어도 영영 놓쳐버릴 수도 있거든. 권서준 작가는 그런 사람이더라고.’

아서는 권서준 작가와의 계약에 대해 진지하게 경고했다.

‘그 친구가 그렇게 나오는 건 처음 봤는데...’

아서가 그 정도로 말할 정도면 최대한 빨리 미팅을 진행해 계약을 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대체 왜 하이든까지 왜 나서는 거야?’

설상가상으로 하이든 에이전시의 스티브 대표까지 권서준 작가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니 올리버 편집장 입장에선 더욱 초조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

고민이 깊어질수록 피가 말린다.

마치 예전에 송영도 교수의 작품을 눈앞에서 놓쳤을 때랑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때도 주저하다가 남 좋은 일 시켰는데, 이번에도 그런 실수를 할 순 없어.’

올리버 편집장이 입술을 곱씹으며 의지를 다졌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사업이라는 게 개인이 함부로 결정할 순 없었다.

예상치 못한 윗선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권서준 작가와의 계약을 추진하던 올리버 편집장의 계획과 달리 대표와 임원진은 부정적인 의사를 표명했다.

‘왜 이 중요한 순간에 반대를 하는지...’

안 그래도 오전부터 권서준 작가와의 계약 문제로 인해 대표와 임원진의 회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어떻게 됐으려나.’

내부에서 갑작스럽게 생긴 반대 여론에 올리버 편집장의 입안이 바싹 말라가고 있었다.

그때,

전화를 받은 비서가 메시지를 전달한다.

“편집장님, 대표님께서 올라오시랍니다.”

굳은 표정의 올리버 편집장이 재킷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잠시 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올리버 편집장이 대표실로 들어갔다.

이미 다른 임원들은 자리를 떴고, 두 명만 남아있었다.

최고 경영자를 맡고 있는 존 대표.

그리고 사내 업무 총괄을 맡고 있는 해리.

사실상 이 두 명이 피어슨 출판사를 이끄는 핵심 수뇌부들이었다.

“어서 오게.”

존 대표의 말에 올리버 편집장이 자리에 앉는다.

“어떻게 됐습니까?”

올리버 편집장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존 대표가 해리와 시선을 교환하더니 이내 입을 연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안타깝게도 반대네.”

올리버 편집장은 눈을 감은 채 어금니를 물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직접 듣고 보니 충격은 더욱 크게 다가왔다.

그러나 올리버 편집장은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히 설득에 나선다.

“존, 이건 엄청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 나도 자네의 눈을 못 믿는 게 아니야. 하지만 초고도 나오지 않은 작가의 작품을 덥석 계약할 순 없지 않은가?”

“이번에 포스 극단도 권 작가의 작품을 계약했습니다. 기사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베네딕트가 출연하기로 했고요. 이 정도의 잠재력이면 충분히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해리가 끼어든다.

“그거야 포스 극단은 대본 전체를 보고 결정한 거잖아요. 아직 초고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성급하게 계약을 진행하는 건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동양인 작가와의 계약을 추진할 때마다 반대하는 해리였다.

“게다가 한국인 작가에게 우리가 먼저 제안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해리, 제가 보내드린 원고를 보시지 않았나요?”

“봤습니다.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희곡 대본이잖아요? 정식으로 출판한 건 한 작품뿐인데, 그건 영국에서 팔릴만한 책은 아니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답답한 거고.

그걸 아는지 해리는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는 건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OTT나 음악 분야에서 유명한 거지, 문학은 다르지 않습니까? 괜히 그렇게 헛수고하지 마시고, 영국 내에서 찾아보자고요.”

“그래, 솔직히 한국 작가의 작품이 특별한 셀링 포인트가 되는 건 아니니까.”

존 대표까지 해리의 의견에 힘을 싣는다.

두 사람의 결정에 깔려있는 건 한국 문학에 대한 은근한 무시였다.

이해 못 할 반응은 아니었다.

동양 문학이 영국 내에서 히트 친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비록 완성된 작품은 아니지만 1/3 분량의 소설을 읽고도 그 가치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아쉬웠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어서 다른 라인업을 정해 보게. 이번 연도 실적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 않나?”

존 대표의 말에 올리버 편집장은 하는 수 없이 대표실을 빠져나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안타깝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적어도 초고라도 나온다면 저 둘을 설득할 수 있을 텐데 듣기로는 원고의 1/3도 채 완성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 소식을 들은 게 불과 1주일 전.

그 사이 초고가 완성될 리는 없었다.

‘정말 포기해야만 하는 건가...’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오고 있었다.

***

늦은 오전.

호텔 조식으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한 뒤 우리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 기차를 타기 위해선 서둘러야 했다.

짐을 다 싼 나는 자연스럽게 남은 스케줄을 확인했다.

“아직 피어슨에선 연락 없지?”

내 질문에 장현웅이 얼른 휴대폰을 확인한다.

“어, 아직 없는데?”

현재 하이든 에이전시와의 미팅은 일정상 미룬 상태였고, 피어슨 출판사와의 미팅은 생각보다 답이 늦었다.

물론 어떤 상황인지는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아마 내부에서 이견이 생긴 거겠지.’

최근 피어슨 출판사의 행보는 영국 내의 문학적 작품성을 높이기 위해 작품성 있는 작품을 찾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동양인 작가의 작품에 관심을 가질리는 없었다.

당연한 흐름이었다.

초고도 나오지 않은 작품을 덥석 계약하겠다고 하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번 여행을 준비했다.

‘적어도 초고를 보고 나면 계약 못하고는 못 배길 테니까.’

짐을 다 싼 나는 모처럼 쇼핑한 트렌치코트를 입고 객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오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오수정 대리가 인사를 건넨다.

“좋은 아침입니다. 작가님.”

“좋은 아침이네요. 참, 오 대리님은 한국으로 돌아가시는 건가요?”

“네, 제 출장은 포스 극단의 계약으로 마무리되었으니까요. 공항 가기 전에 인사드리려고 찾아왔어요.”

끝까지 서포팅하는 자세가 역시 오 대리다웠다.

“작가님은 메릴본 역으로 가시는 거죠?”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으로 가려면 메릴본 역에서 타는 게 맞았다.

“네, 맞습니다. 부지런히 가야 놓치지 않겠네요.”

우리는 대화를 나누며 로비로 나섰다.

막 택시를 잡을까 하는데 우리 앞에 뜻밖에도 고급 세단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건...”

“아서 씨가 마련해준 차량이에요. 작가님께서 스트랫퍼드에 가신다고 하니까 역까지 모실 차량을 준비해준다고 해서요.”

오 대리.

끝까지 센스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고맙습니다. 오 대리님 덕에 편한 여행이 되겠네요.”

“모처럼 잘 쉬시고 오세요. 그럼 한국에서 뵙겠습니다.”

우리는 간단한 작별인사를 마치고 메릴본 역으로 향했다.

***

잠시 뒤.

우리는 오 대리의 배려 덕에 무사히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행 기차에 올랐다.

다행히 객실엔 승객이 많지 않아 우리는 편한 창가 자리를 잡아 앉았다.

“나, 왜 떨리지?”

이국적인 정취에 장현웅이 살짝 들뜬 표정을 짓는다.

이내 기차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런던 교외의 풍경.

지내온 세월에 따라 다른 벽돌 색깔을 지닌 집들이 징검다리처럼 드문드문 눈에 들어온다.

이내 도시의 풍경이 사라지고 울창한 숲으로 뒤덮인 언덕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시절엔 이렇게 숲이 울창하지 않았는데...’

산의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던 시기였다.

당연히 숲과 언덕의 나무들이 온전하기는 쉽지 않았다.

저 언덕 너머 낡은 집 굴뚝을 타고 하얀 연기가 구름처럼 올라온다.

아마 누군가 이른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그 시절의 기억으로 젖어든다. 난로 앞에 모여 따끈한 수프 한 그릇과 고소한 빵 하나에 배를 채우던 시절.

행복한 그 시절의 기억이 수프에 적셔 먹던 빵처럼 따뜻하게 밀려든다.

자연스럽게 영감이 떠오른다.

손끝이 간질거리고, 머릿속에 수많은 이미지들이 넘실거린다. 마치 넘치기 직전의 물처럼 요동치는 그 느낌이 짜릿하다.

‘그러나 아직 아니야...’

나는 쓰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조금 더 선명해지고, 거친 감성이 조금 더 부드럽게 다듬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문득 그 시절의 음악이 귓가에 들려오는 기분. 나는 그 감동을 좀 더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에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차창 밖으로 눈부신 햇볕이 따스하게 들이닥친다.

런던에서 좀처럼 맞이하기 힘든 날씨.

행복한 오후의 풍경이었다.

***

늦은 오후.

우리는 내 고향인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Stratford-upon-Avon)에 도착했다.

숙소에 짐만 놓은 채 우리는 곧바로 시내로 나왔다.

“와, 여기가 셰익스피어의 고향이구나? 그래서 그런지 음, 공기도 다른 거 같아.”

나는 한껏 들뜬 장현웅과 함께 선착장으로 향했다. 강변을 따라 걸으며 오랜만에 녹음이 주는 정취를 만끽했다.

저 멀리 에이번강을 따라 유유히 떠가는 유람선들이 보인다.

크고 작은 물새들이 고요히 강물을 따라 흐르며, 그 위로 길게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는 어느 화가의 붓질처럼 아름답게 늘어져 있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춘 채 시간이 멈춘 듯한 에이번의 경치를 감상했다.

그래, 나는 이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한여름 밤의 꿈」을 썼었다.

연인들의 갈등, 그리고 사랑이 초자연적 존재인 요정의 힘을 빌어 해결하는 환상적이며 몽환적인 이야기.

그 안에 이야기를 끌어가는 요정왕 오베론과 여왕 티타니아가 정말로 살 것 같은 이곳의 자연.

나는 어린 시절, 이곳을 보며 보이지 않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감자 그 시절의 에이번이 떠오른다.

내 아들이 신나게 뛰놀던 고향 땅의 모습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모래톱 위에서 해맑게 뛰놀고 있는 내 아들 햄넷의 모습.

그래,

속절없이 스러진 아들에 대한 기억이었다.

갑자기 숨이 거칠어지고.

격한 감정이 명치를 타고 올라온다.

뒤이어 손끝이 파르르 떨려온다.

그래.

지금이 바로 펜을 잡아야 하는 순간이었다.

쓰지 않고서는 배겨낼 수 없는 감정이 솟구치기 시작한다.

나는 이를 악문 채 그 감정을 애써 부드럽게 다듬는다.

단어 하나하나마저 정성스럽게 곱씹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 줄 한 줄이 페스츄리(pastry) 빵처럼 켜켜이 쌓여 듬직하게 문단을 이룬다.

편하게 쓰인 듯 잔잔한 문장들.

그러나 그 조합이 만들어내는 감동은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

‘집필하는 거구나.’

갑자기 풀 위에 자리를 잡은 권서준이 만년필을 꺼내 들더니 작품 속으로 빠져든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했지만 가끔 창작의 열정에 불탈 때면 보이는 행동이라 장현웅은 조용히 권서준의 모습을 바라본다.

‘어떤 내용이기에 저렇게 진지한 걸까...’

장현웅은 넌지시 고개를 돌려 권서준이 써 내려가는 글을 읽어 내려간다.

‘이, 이건...’

한번 글을 본 장현웅은 눈을 떼지 못했다. 어느새 숨소리조차 죽인 채 그의 작품을 따라 읽어 내려간다.

언뜻 봐도 쉼 없이 이어지는 문장들이 주옥처럼 가슴을 두드린다.

어떻게 이 나이에 이런 감성을 가질 수 있을까 놀라울 정도였다. 마치 부모가 되어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아들의 상실을 절절하게 써 내려간다.

‘이 자식, 그 사이 또 성장했어...’

비행기 안에서 감탄한 원고였다.

그러나 지금 쓰는 글은 그 글보다도 훨씬 놀라웠다. 오히려 불완전했던 앞부분마저 완성되는 느낌이었다.

친구이지만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천재 작가의 작품. 그 과정을 직접 지켜보는 장현웅의 가슴은 어느새 뛰고 있었다.

‘이 작품이 완성되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세상이 놀라겠지.

그 여파는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장현웅은 조용히 카메라를 꺼내 권서준의 모습을 렌즈에 담는다.

창작의 세계에 심취한 권서준의 모습.

정적인 모습 속에서 숨길 수 없는 역동성이 느껴진다.

이게 거장의 위엄일까 싶은 장엄한 순간.

하늘도,

공기도,

그의 작품에 귀 기울이는 듯 고요해진다.

그리고 그 순간,

찰칵.

나직한 셔터음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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