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96화 (96/203)

96. birthplace - 출생지 (3)

96.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어느새 에이번강 위로 붉은 노을이 비추고 있었다.

내 손에 들린 수첩은 어느새 새카만 글씨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한글로 가득한 원고.

전생의 기억이 선명하지만 무의식 중에 써 내려간 글은 영어가 아닌 한글이었다.

영문으로 번역하는 게 조금 귀찮긴 했지만 그래도 내 정체성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래,

나는 한국인이었다.

지금의 내가 그 시절의 나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이유도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이었고.

‘한국인만 가지는 섬세한 정서, 한글로 표현할 수 있는 다채로운 표현과 감성. 그 모든 것들이 또 다른 창조의 경지를 맛보게 해 주었으니까.’

뜨거운 창작의 열기가 지나가고, 은은하게 남은 환희의 여운이 노을빛처럼 부드럽게 온몸을 감싼다.

잠시 강 내음을 맡으며 감정을 갈무리하다가 이내 몸을 일으킨다.

고개를 돌리자 조금 떨어진 벤치에 앉아 열심히 뭔가를 하고 있는 장현웅의 모습이 보인다.

“미안, 너무 집중하느라 시간 가는지 몰랐네.”

자리에서 일어난 장현웅이 고개를 젓는다.

“그게 왜 미안해? 네가 글을 잘 써야 나도 성공하는 구존데. 안 그렇습니까, 사장님?”

귀찮은 기색 하나 없는 녀석의 표정에 괜스레 웃음이 터진다.

“참, 근데 나 글 쓰는 동안 뭐 하고 있었어?”

내 말에 장현웅이 카메라에 담긴 사진 몇 장과 내 모습을 스케치한 그림을 보여준다.

“주인공 스케치. 이게 배경이 이국적이니까 그림이 더 살더라고.”

새하얀 연습장엔 에이번의 풍경에 녹아든 한 작가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솟구치는 영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하는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림.

“역시, 잘 그리네.”

“이 정도는 기본이지.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웹툰으로만 써먹긴 너무 아깝지 않아? 나중에 네 책 표지에 하나 넣으면 어떨까?”

장현웅의 말대로 표지 첫 장 작가 프로필에 들어갈 그림으로 적당했다.

“좋지. 느낌 있네.”

내 말에 녀석이 뿌듯한 듯 미소를 짓는다.

늦은 오후.

강변에서 운명처럼 마주한 영감.

찰나의 순간처럼 지나간 시간은 나에게도, 장현웅에게도 잊지 못할 순간을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그 기분을 만끽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진짜 행복하다...”

노을을 배경으로 장현웅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외쳤다.

그래,

이런 게 행복이었다.

그런데 그때,

꼬르륵 소리가 들린다.

장현웅이 배를 문지르며 멋쩍게 웃는다.

“행복하긴 한데, 배를 채우면 더 행복할 거 같긴 하네.”

그러고 보니 우리 둘 다 숙소에서 아침을 먹은 뒤에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나 역시 집필하느라 잊고 있던 시장기가 자연스럽게 올라온다.

영감을 채우고,

원고를 채웠으니,

이제는 배를 채울 차례였다.

“가자, 여기까지 왔는데 맛있는 거 먹어야지.”

“그래, 자고로 여행은 식도락이지.”

내 말에 장현웅이 함박웃음을 짓는다.

장현웅의 말대로 여행에서 먹는 즐거움을 빼놓을 수 없었다.

물론 이곳에 오면 꼭 한번 다시 먹고 싶었던 요리도 있었고.

***

연남동 주택가에 위치한 작업실.

건물 2층을 통째로 쓰고 있는 유명 작곡가의 작업실이었다.

소파에 앉아 기사를 보던 김재용 오늘 극단 대표가 이맛살을 찌푸린다.

“이 자식,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열불을 내는 김 대표의 반응에 작업 중이던 작곡가가 쳐다본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권서준 연극에 베네딕트가 주연을 맡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거냐고?”

“뭐 로비가 있었던 거 아닐까요?”

“로비야 당연히 있겠지. 내가 한 선생 찾아온 것처럼 말이야.”

김 대표가 느른하게 웃으며 슬쩍 봉투를 건넨다. 한 선생도 미소를 지으며 몰래 봉투를 챙긴다.

“그런데 내 말은 어떻게 헐리웃 배우에게 그 로비가 통하냐는 말이지.”

김 대표 입장에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근데 뭐 우리가 신경 쓸 거 있습니까?”

“하긴 어차피 먼 나라 이야긴데, 우리는 우리 일만 잘하면 되지.”

현재 뮤지컬은 잘 진행되고 있었다.

국뽕을 치사량만큼 넣은 작품이라 망하기가 오히려 힘들 정도였다.

‘게다가 곡도 잘 붙었다고.’

원래 뮤지컬이라는 게 대본만큼이나 곡이 중요했다. 공연의 대부분을 노래로 채우는 장르다 보니 어쩌면 당연한 요소.

그런데 이번엔 특히나 곡이 잘 붙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돈이었다.

‘역시 돈 쓰는 만큼 좋은 곡이 붙는 거지.’

전 재산을 밀어 넣었고, 투자자들한테도 땡길 수 있는 모든 걸 땡긴 덕에 얻어낸 결과였다.

흔히 말하는 영끌 투자.

아내는 이런 과감한 투자에 불안해했지만 그건 자신의 능력을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김 대표는 이번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자, 그럼 수고하라고. 우리 작곡가님.”

“어? 벌써 가시게요?”

“그래, 내가 가야 우리 작곡가님이 곡에 집중하지. 어허, 나오지 말래도? 그 시간에 곡 만들어. 알았지?”

김 대표가 너스레를 떨며 작곡실을 나온다.

날도 좋고, 시원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도 너무 상쾌했다.

‘모든 게 잘 되고 있군.’

김 대표의 입에선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계단을 내려오는데 입구에서 뜻밖에 낯익은 사람과 마주쳤다.

“어? 서미연 감독?”

김 대표가 부르자 서 감독이 고개를 든다.

“...”

김 대표와 눈이 마주친 서 감독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는다. 이유야 이미 알고 있는 김 대표는 오히려 능글맞게 서 감독에게 다가간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서 감독님 아니야? 아니지, 이제 서 대표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일이 착착 진행되는 자신들과 달리 서 감독 쪽 작업 진행은 처참할 정도였다.

“참 얘기는 들었어. 투자 못 받았다면서? 배우 캐스팅은 어떻게 됐어?”

“이미 알고 물어보시는 거 아닌가요?”

서 감독의 말투가 뾰족해진다.

“하, 옛정이 있어서 물어본 거야. 예민하게 굴긴.”

말과 달리 서 감독의 반응은 김 대표가 의도한 반응이었다. 서 감독이 화를 내고, 분해할수록 쾌감은 커져만 갔다.

“그러게 왜 능력 밖의 일을 도전하는 거야? 곡도 못 구했으면서 대체 뮤지컬은 어떻게 시작하려는 건지. 쯧쯧.”

일부러 속을 긁는 말을 내뱉는다.

그러자 결국 참다못한 서 감독이 고개를 휙 돌려 쳐다본다.

“대표님이 막으신 거 아니고요?”

“내가 막았다고? 그건 또 무슨 섭섭한 소리야?”

“그게 아니면 어떻게 작곡가들 입에서 하나같이 대표님 이름이 나오는 거죠?”

순간 김 대표가 미간을 찌푸린다.

이것들 입단속 잘하라고 했더니 그새 누군가 분 모양이었다. 하여튼 하나같이 입이 가벼운 것들이었다. 그렇다고 뭐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래, 솔직히 살짝 막은 것도 있지. 근데 어차피 될 만한 작품이면 그 자식들이 내 말 들었겠어? 오히려 곡 싸들고 서 감독 찾아가지 않았을까? 내 말이 틀려?”

“...”

김 대표의 말에 서 감독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 이건 어디까지나 팩트니까.

“그러니까 괜히 내 탓하지 말고 줄 잘못 선 본인의 선택을 탓하라고.”

“...”

서 감독은 입술을 씹으며 노려본다.

그러나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무서운 건 돈뿐이지.’

김 감독은 이내 휘파람을 불며 문을 나섰다.

햇볕도 따스하고, 바람도 적당히 불고.

너무나 행복한 오후였다.

***

우리는 스트랫퍼드 시내의 한 레스토랑을 찾았다.

주문은 내가 했고,

잠시 뒤 식전주가 먼저 제공되었다.

“와, 이거 엄청 상큼한데? 입맛이 확 돈다.”

장현웅이 마음에 드는 듯 연신 홀짝거리며 와인을 마신다.

소아베(Soave) 와인.

이탈리아 화이트 와인으로 산미가 많고 상큼해서 최고의 식전주로 손꼽히는 와인이었다.

“이게 로미오가 줄리엣과의 입맞춤을 위해 시종이 준비한 와인이었어.”

“헐, 정말?”

몰랐던 사실에 장현웅은 다시 한번 와인을 음미한다.

“음. 뭔가 첫눈에 반한 두 사람처럼 상큼한 느낌이긴 하네.”

소아베 와인이 만들어지는 곳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향인 이태리의 베로나였다.

나는 그곳을 가본 적이 없었지만 그 당시 이 와인을 마시며 사랑의 열병에 휩싸인 두 남녀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문득 작품 속 줄리엣의 모습이 떠오른다.

사랑하게 된 로미오가 원수 집안인 몬태규 가의 아들인 것을 알게 된 줄리엣은 발코니에 선채 괴로워한다.

두 사람의 사랑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본인들의 마음과는 상관없는 집안의 헛된 명예이기에 줄리엣은 몬태규와 캐퓰릿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사랑을 이루기를 소원한다.

그리하여 나온 대사.

‘우리가 장미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이름으로 불려도 향기롭기는 마찬가지잖아요.’

(That which we call a rose by any other name would smell as sweet)

로미오와 줄리엣의 명대사로 유명한 2막 2장의 대사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로맨틱한 대사가 아니었다.

‘우리가 장미라고 부르는 것’, 실제로 그것이 장미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무엇으로 인식하는지가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은 대사였다.

결과적으로 실체와 인식이라는 철학적 의미를 담은 대사.

그래, 로미오와 줄리엣에게 이름과 가문은 허황된 껍질에 불과했다.

지금의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젠 셰익스피어가 아닌 권서준으로서 살아가고 있지만 나라는 존재가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내 글에 담긴 향기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고.

‘아니, 앞으로 그 향이 더욱더 진해지겠지.’

그게 내가 다시 살아가는 이유였다.

잠시 뒤,

본격적으로 코스 요리가 시작되었다.

햄과 치킨, 그리고 맛있게 구워진 빵과 사슴 고기가 들어간 파이. 생선 비스크(진한 크림수프), 삶은 소고기와 양고기 요리까지.

그 시절, 호화의 극치였던 튜더 왕조의 상차림이었다.

나를 후원하던 귀족들 덕에 몇 번 맛본 고급스러운 음식이 이제는 흔한 코스가 되어있었다.

나는 맛을 음미하며 자연스럽게 그 시절을 추억한다. 처음 맛본 그 순간의 감동까지는 아니었지만 잠시나마 타임머신을 탄 듯 그 시절의 기억에 충만하게 잠길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언제나 그렇듯 셰리 와인이었다.

이곳까지 와서 셰리 와인을 맛보지 않을 순 없으니까.

한 시간쯤 이어진 성대한 저녁식사.

배부르게 먹고, 술까지 마신 뒤,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알싸하게 오른 취기에 장현웅은 그래도 곯아떨어진다.

그러나 나는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아직 마무리 못한 일이 남아있었다.

이곳에서 머무는 일주일.

그 사이에 차기작을 완성시킨다는 계획 때문이었다.

나는 오늘까지 쓴 원고 분량을 영문으로 번역한 뒤, 한 사람에게 메일로 전송했다.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언제나 그렇듯 누군가에게 처음 원고를 보이는 순간은 살짝 들뜰 수밖에 없었다.

잠시 뒤,

메일 전송이 완료됐다는 메시지가 떴다.

***

늦은 밤.

퇴근할 시간이 지났지만 올리버 편집장은 여전히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하아...”

조금 전,

권서준 작가가 보내준 작품 때문이었다.

보자마자 눈을 뗄 수 없었다.

한번 읽기 시작하자 원고가 끝나는 순간까지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처절한 두 부자의 감정선은 그렇게 올리버 편집장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고 말았다.

“놀랍다 못해, 충격적이야. 대체 이걸 어떻게 포기하냐고...”

권서준의 작품이 뛰어난 만큼 마음은 무거워졌다.

이제 절반 정도 완성된 원고.

그러나 초고도 안 나온 분량으로는 존 대표와 해리를 설득하기 어려웠다.

“하아...”

조금 전과 전혀 다른 의미의 한숨이 흘러나온다.

하루라도 빨리 권서준 작가와의 미팅을 잡아야만 하는 상황. 그러나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 혼자 진행할 수는 없잖아...’

답답한 마음에 심장이 욱신거리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작품을 놓치면 땅을 치고 후회할 게 분명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포기해야만 하는 건가...’

괴로움에 머리를 쥐어뜯는다.

그런데 그때,

메시지가 한통이 도착한다.

뜻밖에도 발신자는 권서준 작가였다.

[일주일 안에 초고를 완성할 생각입니다.]

‘뭐? 일주일 만에 초고를 완성한다고?’

순간 올리버 편집장의 눈이 커진다.

아직 절반밖에 원고가 나오지 않았는데 일주일 만에 초고를 완성하겠다니,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믿고 싶었다.

아니, 이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영국에 온 지 며칠도 되지 않아서 벌써 절반 가까이 원고를 뽑아낸 작가였으니까.

‘게다가 만일 일주일 안에 초고만 나온다면... 충분히 설득할 수 있어.’

자신 있었다.

아니, 이 작품을 끝까지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건 이쪽 일을 그만둬야 할 정도로 보는 눈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 순간,

결심을 한 올리버 편집장이 전화를 들었다.

“존, 접니다. 늦은 시간에 미안합니다. 네, 급한 일이 있어서요. 혹시, 일주일 뒤에 미팅을 할 수 있을까요? 네, 권서준 작가의 작품과 관련된 미팅입니다.”

그의 목소리엔 어느새 숨길 수 없는 강한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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