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93화 (93/203)

93. majestic - 위엄있는 (4)

93.

***

「거장의 숨결」

흠잡을 데 없던 뮤지컬 대본이었다.

이대로 진행만 하면 실패는 없을 거라 확신했던 대본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대본이 권서준 작가의 손에 의해 한층 더 놀라운 모습으로 바뀌어있었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특히 크리스토퍼 말로의 모습이 생동감이 넘치다 못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다가오는 수정이었다.

다 읽는데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대본을 내려놓자 함께 대본을 읽은 직원이 고개를 젓는다.

“이미 완벽한 줄 알았는데, 그 이상이 있었네요...”

서 미연 감독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아...”

입을 열어도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마치 어나더 레벨의 경지를 직접 목도한 기분이었다.

대본을 내려놓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세상은 여전히 생생하기만 했다.

“이건 마치 영화를 본 것처럼 크리스토퍼 말로의 모습이 펼쳐지는데요?”

직원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마치 크리스토퍼 말로의 삶의 직접 지켜본 것처럼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대본을 읽은 다른 직원들의 표정도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그래.

펜을 쥔 자만이 만들 수 있는 창조의 경지.

‘이게 진정한 작가의 위엄인가...’

읽어 내려갈수록 새삼 경건해지는 마음.

동시에 자신감이 명치에서부터 솟구친다.

‘그래, 이런 대본을 들고 포기한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서 감독은 먹먹해지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의지를 불태웠다.

“자, 다들 봤겠지만 이런 대본이 우리한테 있는데, 포기할 건 아니지?”

서 감독의 물음에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하죠. 포기한다는 건 말도 안 되죠.”

모두 저마다의 분야에서 사연 없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같이 작품의 성공에 목마름 사람들. 눈빛부터가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래, 좀만 더 힘을 내보자. 이번 기회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해 주자고! 자, 구호 한번 외쳐볼까?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할 수 있다!”

서 감독의 외침에 사람들도 함께 외친다.

갑자기 불어온 뜨거운 열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던 사무실 공기를 데운다.

불과 한 시간 만에 극적으로 바뀐 분위기.

모두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대본 하나 때문이었다.

‘이게 바로 작가 권서준의 존재감이지...’

서 감독의 얼굴에도 어느새 미소가 떠오른다.

***

다음 날, 오후.

밤새 집필하느라 오전 내내 잠을 잔 나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호텔을 나와 템즈강 주변을 거닐었다.

햇볕도 공기도 차분해지는 시간.

나는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앉아 런던의 경치를 즐겼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아름답게 익어가는 노을의 기운이 강변의 정취를 한껏 끌어올린다.

이마에 스치는 강바람을 만끽하며 모처럼의 여유를 즐겼다.

그러나 분위기를 한층 더 심취하게 만드는 건 어디선가 들려오는 바이올린 연주였다.

템즈강은 따라 흐르는 잔잔한 선율.

자연스럽게 찾아온 감성의 파도에 내 몸을 맡긴다.

‘그래, 음악이 중요하지. 그때도, 지금도...’

나는 모처럼 음악을 감상하면서 깊은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

지금 템즈강을 따라 흐르는 곡은 바로크 음악의 거장인 바흐의 곡이었다.

기괴하고 기이하다는 어원에 맞게 조바꿈과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음악.

내가 살던 시대에 유행했던 종교 음악과는 확연하게 차이를 두는 변칙적인 구성이 신선하면서 재미있었다.

그러면서도 경쾌하고, 또 웅장한 느낌이 어느새 내 귀를 사로잡았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곡이 주는 감흥을 누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 경쾌한 리듬이 또 다른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이거, 영웅의 일대기와 연결하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자연스럽게 「거장의 숨결」 뮤지컬 버전의 무대가 떠오른다.

거침없는 크리스토퍼의 대사가 극장 안에 울려 퍼지고, 이내 웅장한 선율이 뒤를 잇는다.

연기와 음악, 그리고 객석의 호흡이 어느새 하나가 되어 작품의 한 부분으로 스며든다.

어느새 무대의 경계는 사라지고 모두가 하나의 세상에서 울고, 웃는다.

그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연극이며, 동시에 뮤지컬이었다.

‘짜릿해...’

상상만으로 손끝이 저릿저릿하다.

연출가로서의 감각이 아직도 생생한 탓이었다.

그래, 뮤지컬.

노래, 춤, 연기가 어우러지는 무대극.

기본 형태는 오페라와 연극의 중간쯤 위치하지만 단연코 가장 큰 차이는 대중적 성격을 가진 자유로움에 있었다.

그리고 그 자유로움에 가장 극명한 기준이 되는 게 바로 음악이었고.

연출과 관련된 대부분의 업무를 서 감독에게 맡겨두긴 했지만 음악만큼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뮤지컬만큼 음악이 중요한 장르도 없으니까.’

지이잉.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서미연 감독이었다.

-작가님, 이 대본이면 실패할 수가 없겠는데요?

한껏 올라간 목소리.

다행스럽게도 서 감독은 내가 수정한 포인트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감독님 반응을 보니 수정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이죠. 솔직히 수정하셨다고 하셔서 반신반의했는데, 저뿐만 아니라 직원들까지 다 놀란 상태예요.

서 감독이 고른 사람들답게 하나같이 대본을 보는 눈이 있었다.

“준비는 잘 돼가고 있나요?”

나는 넌지시 뮤지컬 진행사항을 물었다.

-네, 다른 것보다 곡 문제가 좀 남아있긴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까요.

서 감독은 언제나 그렇듯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화를 끊은 나는 잠시 강 건너편 도시를 바라보며 서 감독과의 통화 내용을 되뇌었다.

‘다른 것보다 곡 문제가 좀 남아있긴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까요.’

서 감독의 고민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엄청 고생하고 있을 거야.’

특히 투자가 안 된 뮤지컬은 캐스팅부터 모든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서 감독이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서 감독은 앓는 소리 없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역시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야.’

물론 나 역시 내 작품이 무대에 오르는데 방관만 할 생각은 없었다.

성공적인 공연을 위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바로 음원과 투자.

물론 뮤지컬 투자 관련해서는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아직 당사자는 모르고 있겠지만.

***

숙소로 돌아온 나는 뜨거운 물에 몸을 씻고, 차 한 잔을 마셨다.

“뭐야? 언제 돌아온 거야?”

“좀 전에. 넌 뭐 하고 있었어?”

“나? 나는 당연히 일하고 있었지.”

장현웅이 노트북을 내밀었다.

“이것 좀 봐. 오늘 아침에 네 기사가 올라왔더라.”

장현웅은 인터넷 기사를 하나 내밀었다. 틈틈이 웹툰 원고를 쓰면서도 내 관련 기사를 지속적으로 서칭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얘도 책임감 하나는 대단해.’

웹툰뿐만 아니라 매니저 일 역시 잘 처리하고 있었다.

나는 장현웅이 내민 기사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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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거장의 숨결, 해외 나간다.]

연극 공연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 「거장의 숨결」이 최근 고전 연극의 고장 영국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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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타이거 스튜디오 글로벌콘텐츠 개발팀 차동혁 팀장에 따르면 작품 「거장의 숨결」이 웨스트엔드의 메이저 극단과 최종 계약 논의 중에 있다고 밝혔다.

특히 이번 작품의 극본을 맡은 권서준 작가는 최근 드라마 「이옥」의 흥행을 이뤄낸 장본인으로 K드라마에 이은 K연극의 해외 수출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연극계 안팎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매일연예 윤석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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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에 기반을 두었지만 호의적인 기사였다. 자연스럽게 나의 방향성과 작품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한 기사도 훌륭했다.

역시 윤 기자다운 내용.

가십성 기사와 어그로성 기사로 조회수 빠는 흔한 연예부 기자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이렇게 된 거 선물하나 줘야겠어.’

누누이 말하지만 나는 은혜를 잊는 사람이 아니었다.

***

매일연예 편집실.

온종일 쏟아지는 스캔들과 기사 요청 보도에 정신이 없는 분위기였다.

유명 스타의 음주운전으로 난리가 났지만 그 와중에도 윤석훈 기자의 관심은 전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선배, 아직도 권 작가 기사 찾아보는 거예요?”

퇴근 준비를 하던 후배 한 명이 묻는다.

“어, 분명 뭔가 나올 텐데 조용하네.”

영국 런던 일간지를 모두 살펴보고 있었지만 조용했다. 분명 윤 기자가 알고 있는 권서준이라면 런던에 가서도 뭔가 얻어낼 게 분명했는데 이상하리만큼 보도 내용이 없었다.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 아닌가요? 엄청난 소식이 있어서 쉬쉬하고 있거나 아니면 계약에 실패했거나.”

후배의 말에도 윤 기자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실패할 일은 절대 없어.”

“와, 내가 알던 윤 선배 맞아요? 이건 관심을 넘어 거의 신앙 수준인데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권서준 작가의 행보는 윤 기자의 가장 큰 관심사였으니까.

‘자극적이고 며칠만 지나면 쓰레기가 되는 기사보다는 권 작가의 일거수일투족이 훨씬 의미가 있거든.’

그 과정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눈에 불을 켜고 기사를 살피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SNS와 웨스트엔드 소식통 기자들에게 문의를 해봐도 들려오는 소식은 없었다.

‘고작해야 베네딕트. C가 헐리웃 작품 계약을 1년 뒤로 미뤘다는 얘기뿐이야...’

엄청난 소식이지만 너무 엄청난 헐리웃 배우의 이야기는 오히려 윤 기자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지이잉.

그런데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한 윤 기자의 눈이 커진다.

전혀 예상 못한 사람이었다.

“권서준 작가님?”

발신자를 보고도 믿기지 않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네, 권 작가입니다. 잘 지내셨죠?

차분한 목소리.

듣기 좋은 저음이 분명 권서준이 맞았다.

“저야 잘 지내고 있죠. 작가님은 지금 런던 맞으시죠?”

-맞습니다. 오늘 기사 봤는데 너무 잘 써주셔서 이렇게 연락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네요.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다만 과장 하나 없이 제가 느끼고 조사한 대로 썼을 뿐입니다.”

윤 기자는 그 부분은 확실히 해뒀다.

권서준 작가의 팬이기 이전에 자신은 기자였으니까. 어디까지나 확실한 팩트를 기반으로 기사를 쓰고 있다는 사실은 밝히고 싶었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윤 기자님의 소신이야 기사만 봐도 알 수 있으니까요.

권서준 작가가 알아준다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누군가는 연예 기사에 무슨 소신이냐라고 말하겠지만 윤 기자는 자신의 본분이 기자라는 걸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내용도 팩트에 기반을 두어 잘 써주시리라 믿습니다.

그 순간,

대화의 흐름이 어딘가 이상하다.

이건 마치 권서준 작가가 자신에게 어떤 기사거리를 던져준다는 뉘앙스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제가 이곳에 와서 재미난 결과를 얻었거든요. 윤 기자님이 잘 전달해주실 거 같아서 이렇게 연락드렸습니다.

윤 기자는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촉이 맞아떨어진 것.

게다가 기대감마저 증폭된다.

권서준 작가가 이렇게 직접 전화해서 말할 정도면 보통 소식은 아닐 테니까.

“당연합니다.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작가님이 런던을 가셨는데 너무 조용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고요.”

-그럼 메일 하나 보내드리겠습니다.

통화를 하는 와중에 휴대폰에 진동이 울린다. 권서준 작가의 매니저가 보낸 메일이었다.

“지금 도착했네요. 잠시만요.”

메일 내용을 확인한 윤 기자의 눈이 커진다. 웨스트엔드 극단 중 가장 유명한 포스 극단과의 계약. 상세한 내용은 없었지만 대충 봐도 최고 수준의 대우였다.

“이, 이게 사실인가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놀랄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 배우가 출연하는 것도 사실이고요?”

-네, 이미 계약까지 마친 상황입니다.

윤 기자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간신히 손으로 입을 막은 뒤 애써 숨을 고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걸, 진짜로 제가 올려도 되는 건가요?”

-당연하죠. 그래서 이렇게 제가 직접 연락드린 거니까요. 팩트에 기반을 둔 기사,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잠시 뒤,

전화를 끊었지만 윤 기자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너무나 놀랄만한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진짜라고?”

믿기지 않는 듯 연신 혼잣말을 내뱉는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런 특종을 독점으로 제공받았다.

“독점이라... 하, 이런 선물까지 챙겨 주다니...”

어느새 윤 기자의 미소가 떠오른다.

“아니지, 내가 이렇고 있을 때가 아니지.”

윤 기자의 두 손이 서둘러 노트북 키보드를 찾는다.

그리고 잠시 뒤,

타닥타닥 타닥타닥.

고요한 편집실에 키보드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렇게 그날 밤, 노련한 윤 기자의 손에 의해 대한민국 공연계를 뜨겁게 달굴 특종 기사 하나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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