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92화 (92/203)

92. majestic - 위엄있는 (3)

92.

***

저녁 식사 후 자연스럽게 이어진 술자리.

우리는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른 채 와인을 마시며 대화를 이어갔다.

“작가님이 말씀하신 「베니스의 상인」, 사실 그 작품을 읽을 때마다 전 너무나 슬펐거든요. 안토니오보다는 샤일록의 입장이 더 와 닿았으니까요.”

베네딕트는 오른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두며 침통한 표정을 짓는다. 누가 배우 아니랄까 봐 작은 행동과 말투에서조차 그의 마음이 얼마나 비통했는지 잘 전달하고 있었다.

제목 : 베니스의 상인.

셰익스피어의 5대 희극 중 하나로 불리는 작품이었다.

1596년 내가 창조해낸 이야기.

우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멋지고 선량한 안토니오가 재치 있는 여자의 도움으로 악독한 악당으로부터 구원을 얻는 이야기.

“흔히 동화책이나 교훈을 전달하는 이야기로 유명한 작품이지만 실상 셰익스피어가 말하고자 했던 차별과 박해, 그리고 이기심이라는 주제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죠.”

베네딕트의 말 대로였다.

같은 작품이라도 문화와 언어, 그리고 편집자의 시선에 따라 자유롭게 각색되었기 때문에 내 의도와는 다른 내용으로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베니스의 상인」은 마치 선량한 시민이 악독한 사채업자인 샤일록에게 통쾌하게 복수하는 이야기로 알려졌다.

아쉽게도 그 안에 담긴 유대인들을 향한 당시 기독교인들의 냉대와 박해에 대한 얘기는 깊이 다뤄지지 않았다.

종교와 교리에 따른 차별.

사실 샤일록이 고리대금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 유대인들은 농장을 소유하거나 직업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샤일록은 먹고살기 위해 고리대금업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더 큰 차별과 박해로 이어졌다.

지금 은행을 가리키는 ‘Bank’의 어원도 사실 유대인들이 앉아서 돈을 빌려주던 벤치를 가리키는 이탈리아의 ‘Banco’에서 유래되었고.

“안토니오는 그런 샤일록에게 돈을 빌리는 와중에도 이렇게 말하죠. ‘앞으로도 당신을 개라고 부를 거고, 계속 침을 뱉고, 발길질을 할 거요.’라고.”

대사를 읊조리는 베네딕트의 얼굴에 분노가 엿보인다.

“이게 과연 돈을 빌리는 자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사람이라면 미운 마음과 증오의 감정이 쌓이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그래, 샤일록은 이유 있는 악인이었다.

“그래서 샤일록의 대사는 더욱 와닿을 수밖에 없었죠.”

내 말에 베네딕트가 고개를 끄덕인다.

순간 베네딕트의 눈빛이 순식간에 광기로 물든다.

“미우면 죽이고 싶지. 인간이란 그런 것 아닌가?”

베네딕트가 허공을 보며 대사를 읊는다.

그건 분노가 가득 담긴 샤일록의 외침이었다.

단어 하나에서,

그 사이의 짧은 호흡에서,

순식간에 그 사람이 되어버린 표정에서,

샤일록이 되어버린 관록 넘치는 배우의 위엄이 느껴진다.

그래, 「베니스의 상인」은 단순히 교훈을 담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시대가 만들어낸 비극을 선인도, 악인도 아닌 인간의 입장에서 풀어낸 이야기였다.

희극도, 비극도 아닌 극.

그것이 바로 인생이며 내가 담고 싶어 하는 이야기였다.

‘앞으로도 그런 글을 쓸 거고.’

자연스럽게 내가 쓴 작품 속 대사 하나가 떠오른다.

온 세상이 연극 무대입니다.

모든 남자와 여자는 그저 배우에 불과합니다.

차례가 되면 등장했다 퇴장했다 할 뿐이죠.

그리고 한 사람이 평생 여러 역할을 맡아 하죠.

「뜻대로 하세요」 제2막 7장

다시 주어진 소중한 시간.

나는 그 가운데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할 뿐이었다.

물론 그게 내 유일한 소원이었고.

***

늦은 밤.

우리는 도로까지 나온 베네딕트의 배웅을 뒤로 한 채 은은한 취기를 만끽하며 호텔로 돌아왔다.

객실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운 장현웅은 휴대폰으로 뭔가 보다가 얼른 일어나 내게 내민다.

“와, 이것 좀 봐. 베네딕트는 살면서 죽을 뻔한 일을 네 번이나 경험했대.”

유브튜 영상을 보던 장현웅이 놀라서 말한다.

장현웅의 말대로 베네딕트는 서른이 되기도 전에 네 번이나 죽을 뻔한 경험을 했다.

첫 번째는 어린 아기 때, 누나가 울고 있는 베네딕트를 달래려고 옥상에 올라갔다가 깜빡 두고 와서 저체온증으로 죽을 뻔한 일.

두 번째는 학창 시절 경험한 폭탄 테러로 인해, 세 번째는 티베트에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하이킹 도중 조난을 당해 탈수와 굶주림으로 죽을 뻔했다.

마지막은 남아프리카 여행 중에 여섯 명의 갱에게 인질로 잡혀서 총을 맞을 뻔했다.

일반인이라면 한 번 겪기도 어려운 일들.

그러나 이 모든 건 놀랍게도 전부 사실이었다.

“하아, 난 그냥 잘 된 배우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굴곡진 그의 삶을 알게 된 장현웅이 놀란 듯 고개를 젓는다.

사실 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처음 내 대본에 그의 캐스팅을 떠올렸을 때부터 알아본 내용이니까.

나는 그의 삶을 통해 그의 진심 어린 연기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어쩌면 죽음에 맞닿은 자극적인 경험이 그의 연기력에 더 큰 불꽃을 피워냈는지도 몰랐다.

‘반면에 그렇기 때문에 만족스럽지 못한 연기를 하면 더 큰 좌절감이 찾아올 수도 있지.’

첫 자극이 클수록 계속해서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되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내 대본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모처럼 자신의 영혼을 불태울만한 작품을 만났으니까.

‘아마 이번 작품을 통해 또 한 번 성장을 이뤄내겠지.’

벌써부터 그의 연기가 기대된다.

햄릿의 공연을 준비하던 리처드 버비지의 연기를 볼 때 느꼈던 기대감과 비슷했다.

지이잉.

그리고 그 순간 휴대폰에 진동이 울린다.

짧은 텍스트 메시지.

발신자는 베네딕트였다.

[포스 극단과 계약했습니다.]

이 시간에 계약이라니, 행동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미소를 지은 채 답장을 보냈다.

[환영합니다. 이 기쁜 소식을 제가 주변에 알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우린 이제 친구니까요.]

그렇게 나는 영국을 다시 찾은 지 이틀 만에 특별한 친구 한 명이 생겼다.

***

자정이 넘은 시간.

포스 극단 사무실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피어슨 출판사의 올리버 편집장이었다.

“축하하네. 계약에 성공했다면서?”

“뭐, 그렇게 됐네.”

분명 축하할 일이었지만 어딘가 표정이 이상했다.

“왜 그러나? 무슨 일 있었어?”

“음. 그게 무슨 일이라기보다는...”

잠시 말끝을 흐리던 아서가 피식 웃는다.

“원하는 걸 다 얻었는데 뭔가 당한 느낌이거든. 근데 이게 또 이상하게 기분이 좋단 말이지...”

아리송한 아서의 말에 올리버 편집장의 미간이 모인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가? 좋은 대본에, 베네딕트의 출연까지 확정됐으면 좋아할 일 아닌가?”

“이게 말로 설명이 안 되는군. 아무튼 자네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다만 다음 차례인 올리버 편집장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대체 미팅 분위기가 어땠기에 그러나?”

“한마디로 완패했다고 볼 수 있지.”

“뭐? 베네딕트를 잡았다면서?”

“내가 잡은 게 아니야.”

“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해보게.”

허공을 향해 한숨을 길게 내쉰 아서가 천천히 말을 잇는다.

“권서준 작가가 잡은 거야. 나는 그런 권서준 작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카드를 오픈할 수밖에 없었고.”

능수능란한 사업가인 아서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게다가 하이든 에이전시가 움직였어.”

“그건 이미 알고 있네.”

“스티브 대표가 직접 움직였다는 것도 알고 있나?”

“뭐? 스티브 대표가?”

“그래. 듣자 하니 오늘 밤에 런던에 도착한다고 하더군.”

“...”

순간 올리버 편집장의 표정이 굳어진다.

“그러니까 권 작가 그 친구 앞에서 쓸데없는 딜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 친구, 보통이 아니야. 아니, 우리 머리 위에 있다고.”

가만히 오늘 일을 되뇌던 아서가 한결 진지해진 눈빛으로 말을 잇는다.

“그러니 자네도 조심하게. 나야 모든 카드를 들이밀어 붙잡았지만, 조금만 늦어도 영영 놓쳐버릴 수도 있거든. 권서준 작가는 그런 사람이더라고.”

“...”

친한 친구의 진심 어린 조언.

올리버 편집장의 마음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

새벽 공기가 가라앉는다.

간간히 장현웅의 숨소리만 들릴 정도의 고요함이 밤의 기운과 함께 밀려든다.

나는 책상에 앉아 룸서비스로 시킨 셰리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런던의 야경을 바라본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그 시절의 기억.

리처드 버비지와 함께 셰리 와인을 나눠 마시며 연기에 대해 토론하던 추억이 떠오른다.

‘마치 그때의 기분 같았어.’

베네딕트와의 대화.

와인과 함께 나눈 모든 시간이 그 시절의 추억으로 충만하게 만들었다.

특히 베네딕트가 내뱉었던 샤일록의 대사는 지금까지 귓가에 맴돌았다.

‘미우면 죽이고 싶지. 인간이란 그런 것 아닌가?’

세상을 향한 분노.

차별과 억압에 대한 거친 반항.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 섞인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끝내 안토니오의 심장 주변의 살 1파운드를 달라고 외치는 그 광기.

어느 순간, 절규에 가까운 샤일록의 외침은 크리스토퍼의 삶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래, 샤일록은 크리스토퍼 말로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세상을 향해 분노를 터트리고, 힘겨운 억압 속에서도 끝끝내 신이 없다 외쳤던 그의 삶과 그 궤가 같았다.

나조차 생각하지 못한 두 사람의 연관성.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 찬 천재 배우와의 대화는 많은 것들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가만...’

그런데 그 순간, 의도치 않은 영감이 떠오른다.

정확히는 베네딕트와의 만남을 통해 선명해진 크리스토퍼 말로의 모습이었다.

이미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이야기에 또 다른 색깔이 덧입혀진다.

나는 서둘러 노트북을 꺼냈다.

숨을 고르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빠르게 정리한다.

그리고 잠시 뒤,

키보드 위에 차분히 열 손가락을 올린다.

그래,

그저 손가락을 올린 느낌이었다.

머릿속은 그저 선명해진 크리스토퍼 말로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건반을 치듯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타닥타닥 타다다다다닥.

내 눈은 모니터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도 모른 채 여백을 채워나가는 크리스토퍼의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

정오 무렵.

대학로에 위치한 소극장 사무실.

작은 현판엔 창조 극단이라는 명칭이 보인다.

바로 서미연 감독이 만든 극단.

서 감독은 그동안 뮤지컬에 대한 준비는 차근차근 준비되고 있었다. 극단을 만들고, 사람을 모으고, 가장 중요한 음원을 위해 작곡가들을 만나러 다녔다.

“후.”

그러나 각종 제안서를 검토하던 서 감독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예상된 문제 때문이었다.

바로 음원과 투자 유치.

뮤지컬 제작을 위해 가장 중요한 두 기둥이기도 했다.

“아직 투자를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라 곡을 주겠다는 사람이 없네요.”

“하아, 그건 그렇지...”

직원의 말에 서 감독이 한숨을 내쉰다.

잔금도 못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시간 낭비, 곡 낭비를 하고 싶은 작곡가가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지. 어차피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건 모두 알고 모인 거잖아?”

서 감독의 말에 나머지 직원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예상보다 높은 장애물의 높이에 당황하긴 했지만 여기서 포기할 순 없으니까.

그러나 한번 무거워진 공기는 좀처럼 달라지지 않았다.

“하아...”

간간히 내뱉는 깊은 한숨만 사무실 안에 울려 퍼진다.

지이잉.

그런데 그때,

서 감독의 휴대폰이 울린다.

뜻밖에도 권서준 작가가 보낸 메일이었다.

‘영국 출장 중이실 텐데 무슨 일이지?’

서 감독은 바로 파일을 다운받아 메일 내용을 확인했다.

“이거, 대본인데...?”

본능적으로 뮤지컬 수정 대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본이요? 권 작가님 대본은 이미 완성된 거 아니었나요?”

“그러게...”

어차피 답은 대본 안에 있었다.

서 감독은 재빨리 출력해 대본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읽어갈수록 눈빛이 흔들린다.

“이, 이건...”

이미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대본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대본이 지금 서 감독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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