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88화 (88/203)

88. negotiate - 협상하다 (4)

88.

***

두 시간쯤 지났을까.

밤이 가고 다시 아침의 기운이 밀려든다.

나는 쥐고 있던 만년필을 내려놓고 뻐근한 목덜미를 주물렀다.

스르르 멀어지는 창조의 기운을 음미하며 고개를 들자 어느새 잠에서 깬 장현웅이 나를 보며 스케치하고 있었다.

“뭐해?”

“뭐하긴 일하고 있지. 웹툰에 쓸 스토리를 위해 캐리커처 잡는 중이야.”

녀석의 눈빛은 진지했다.

잠시 뒤,

조심스럽게 내미는 연습장에 담긴 내 모습.

“어때? 마음에 들어?”

제법 근사했다.

“내 표정이 이래?”

“어. 나름 분위기 있어. 작가 느낌 나고.”

농담 섞인 녀석의 말과 달리 그림 속 인물은 고독을 음미하며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마치 내가 창조하던 세상 속 감정까지 고스란히 담긴 느낌.

‘역시 잘 그리네. 감각이 남달라.’

내가 뿌려둔 씨앗다웠다.

그때, 연습장을 정리하던 장현웅이 슬쩍 내 수첩을 보며 입을 연다.

“그건, 차기작이야?”

반짝이는 눈빛에선 호기심이 엿보인다.

“어. 한번 볼래?”

“봐도 돼?”

“그럼. 너도 봐야 스토리 쓸 때 더 도움 될 거 아니야?”

“그건 맞지.”

나는 방금 탄생한 이야기를 장현웅에게 건넸다. 장현웅은 조심스럽게 수첩을 받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

말을 잊은 채 작품에 빠져드는 녀석의 얼굴. 순간순간 움직이는 눈썹이 그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하아, 이건...”

잠시 고개를 든 장현웅의 눈빛에선 격한 감동이 느껴진다.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이 깊이, 이 고민, 이 애잔하게 깔리는 서사까지...”

감동을 음미하던 장현웅이 서둘러 나를 돌아본다.

“이거 뒷부분은 언제 쓸 거야?”

“글쎄, 다시 영감이 차오르면?”

“하아, 그래? 이거 웹툰 다시 보기 참는 것보다 기다리기가 힘든데?”

아쉬움에 입술을 곱씹던 녀석이 갑자기 휴대폰을 꺼낸다.

“뭐해?”

“메모. 이 감동을 잊지 말아야 웹툰에 녹일 거 아냐. 런던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 그곳에서 권서준이 내민 작품은 그야말로 존재론적 질문의 극치를 보였고...”

나직하게 혼잣말을 되뇌며 서둘러 메모를 이어간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좋았다.

***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 위치한 포스 극단 사무실.

아서 총괄 디렉터는 자꾸만 시간을 확인했다.

“언제 도착한다고 했지?”

“한국 시각으로 4시 비행기니까 아마 늦은 저녁 시간엔 도착할 겁니다.”

“그래, 내일 미팅 약속은 확실히 잡은 거지?”

“네, 확실히 확인했습니다.”

“그래...”

아서는 벌써부터 긴장되는지 손깍지를 낀 채 스트레칭을 한다.

“참, 그 친구한테 대본은 보냈나?”

“물론이죠. 말씀하신 그날 바로 보냈습니다.”

“아직 반응은 없고?”

“네. 요즘 헐리웃에서 오퍼가 있다는 소식이 있더라고요. 아마 그쪽으로 마음을 굳힌 게 아닐까요?”

아서는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그럴 리 없어. 내가 아는 그 친구라면 결코 그 대본을 무시할 수 없거든.”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이었다.

지이잉.

그런데 그 순간, 아서의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한 아서가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받는다.

“어, 그래. 날세.”

-대체 이 대본을 쓴 사람이 누군가?

다소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는 살짝 격앙된 상태였다. 오히려 그런 반응에 아서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진다.

“한국인이야. 권서준 작가라고.”

-권서준? 내가 지금 만나볼 수 있나?

“이 친구야, 진정해. 그거 아직 정식 계약도 안 한 대본이야.”

-그럼 연락처라도 좀 얻을 수 있나?

“왜? 대본에 관심이라도 있는 거야?”

-당연한 소리를. 그걸 알고 나한테 이걸 보낸 거 아닌가?

물론이었다.

배우의 격한 반응에 아서가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그 마음은 알겠지만 조금만 기다리게. 내일 정식으로 미팅하기로 했으니까. 지금 비행기 타고 오는 길이니까 저녁쯤에 도착할 예정이거든.”

그러나 타이르는 아서의 말도 배우의 열정을 막진 못했다.

-아니, 난 내일까지 도저히 못 기다리겠네. 이 작가, 도착 비행기가 몇 시라고?”

평소 듣기 좋은 굵직한 목소리는 어느새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

몇 시간 뒤.

런던 히드로 공항(Heathrow Airport).

영국 런던 중심가에서 서쪽으로 약 24㎞ 떨어진 미들섹스 하운스로우에 있는 국제공항이었다.

내 입장에선 두 번째 밟아보는 곳.

우리는 짐을 챙긴 채 출구로 향했다.

“우와, 여기가 영국이구나.”

장현웅이 가슴을 쭉 펴며 냄새를 맡는다.

“어때? 영국 공기가?”

“음. 아직은 모르겠는데? 내가 영국이라는 게 아직도 실감이 안 나서 그런가?”

“런던 브릿지를 보면서 템즈강의 냄새를 맡아야 실감이 좀 날 거야.”

문득 송 교수와 이곳에 왔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교수가 했던 말을 내가 이제 장현웅에게 해주고 있었다.

‘참 많은 것들이 달라졌군.’

나는 캐리어를 든 채 앞장섰다.

물론 1년 사이 그다지 달라진 점은 없었다. 그러나 내 상황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공항을 빠져나오는데, 장현웅이 묻는다.

“참, 나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뭔데?”

“우리가 이번에 영국 온 이유가 「거장의 숨결」 판권 판매를 위해서잖아? 그럼 만일 포스 극단에 팔리면 이 연극은 누가 주연을 맡는 거야?”

“글쎄, 그건 포스 극단에서 알아서 하지 않을까?”

내가 생각해둔 배우가 있긴 했지만 배우 선택은 포스 극단의 절대적인 권한이었다.

물론 제대로 된 디렉터라면 내 대본을 보는 순간 한 배우가 떠오를 수밖에 없겠지만.

긴 공항을 빠져나오는데, 뜻밖에도 한글이 눈에 보인다.

[권서준 작가님, 영국 방문을 환영합니다.]

“저거 너 찾는 거 아니야?”

당연했다.

이 시각에 영국에 오는 권서준 작가가 또 있을 리 만무했으니까.

우리는 푯말을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

“작가님!”

그러자 낯익은 얼굴이 손을 흔들며 반긴다. 오수정 대리였다.

“안녕하세요. 대리님.”

“먼 이국땅에서 작가님 얼굴 보니까 더 반갑네요. 그사이 더 멋있어지셨고요.”

간단한 인사를 마친 오 대리가 뒤쪽을 바라본다.

“참, 이쪽은 포스 극단의 총괄 디렉터 아서 씨예요.”

대충 상황을 들은 남자가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십니까? 포스 극단의 아서입니다.”

다소 거친 듯한 영국식 영어.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오는 발음 역시 아서와 비슷했다.

“안녕하세요. 권서준입니다.”

“오, 발음이 아주 좋으시네요? 영국 유학을 다녀오신 적이 있나요?”

“아닙니다. 한국 토박이입니다.”

“영어 실력이야 대본을 보고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만 여전히 놀랍군요. 한국은 교육열이 엄청 높다고 하더니 젊은 작가님들의 영어 수준도 엄청난 가 봅니다.”

짧은 대화 속에서도 호의가 느껴진다.

그만큼 내 대본이 마음에 들었다는 소리.

“이렇게 초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당연히 초대해드려야죠. 궁금했거든요. 대체 이런 대본을 쓰신 분이 어떤 분일까 하고요.”

아서는 솔직히 말했다.

“근데 우리 미팅은 내일 아니었나요?”

“맞습니다. 다만 런던의 교통이 헬 수준이라 저희가 특별히 숙소까지 모셔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렇군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자, 나가실까요?”

우리는 앞장서는 아서를 따라 공항을 빠져나왔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아서는 친히 우리를 안내했다.

그런데 그가 향하는 방향엔 딱 봐도 고급스러운 세단이 보인다.

“우와... 저거 몇억 하는 차 아냐?”

장현웅이 놀라 속삭인다.

나 역시 같은 반응이었다.

수억 원을 호가하는 차량.

내가 아직 이 정도의 대접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낯선 기분이 든다.

그러자 내 생각을 알아차린 아서가 먼저 입을 연다.

“사실, 이건 작가님을 만나보고 싶다는 친구가 준비한 작은 이벤트입니다. 아, 마침 도착했군요.”

아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저 뒤에서 누군가 우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온다.

큰 키에 짙은 갈색빛이 도는 고수머리.

검은색 장우산을 쓴 채 긴 코트를 입고 다가오는 남자.

“저, 저 사람은...”

먼저 알아본 장현웅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스크린에서만 보던 헐리웃 스타가 눈앞에 서 있었으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우산을 거두며 느른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남자.

못생김마저 연기로 승화시키는 배우.

게다가 내가 크리스토퍼 말로 역으로 점찍어둔 단 한 명.

베네딕트. C였다.

***

매사추세츠.

하이든 에이전시 본사.

고용수 부장의 유선 보고를 받은 스티브 대표의 표정은 아쉬움으로 가득했다.

-「거장의 숨결」 해외 판권은 이미 타이거 스튜디오에, 차기작은 와이즈 출판사와 계약한 상황입니다. 물론 차기작의 경우 해외 판권은 별도 계약을 해야 하기 때문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지만 작가 측에서 파트너십보다는 출판권 오픈을 요청하고 있는 상황이고요.

전화를 끊은 뒤에도 아쉬움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출판권 오픈이라...”

그런데 반대로 고 부장이 첨부한 짤막한 작품은 그의 기분을 한껏 업되게 만들었다.

제목 : 당신이 머물던 자리에.

피어슨 출판사에서 노리고 있는 권서준 작가의 차기작이었다.

아들과 아버지.

두 부자는 같은 장소에 선 채 서로가 부재한 세상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동일한 사람을 만나지만 대화의 흐름은 전혀 다르다. 그건 아버지와 아들의 입장이 전혀 다르기 때문.

그래, 죽음과 사랑.

작가는 그 두 가지 키워드를 통해 두 사람의 감정을 극대화 시키고 있었다.

비극의 생김새는 저마다 다르지만, 결국 죽음과 사랑의 문제를 벗어날 수 없었다.

‘죽음만 있거나, 사랑만 있다면 결코 비극이란 탄생할 수 없으니까.’

사랑하는 이의 죽음.

죽은 이에 대한 변치 않는 사랑.

상반되는 두 가지의 심상이 맞붙었을 때 인간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꼬집는 비극이 생성되는 아이러니였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들에 대한 회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권서준 작가는 완벽하게 서로의 죽음을 사랑과 연결 지었다.

인간이 가장 사랑해 마지않는 두 가지 주제. 동시에 가장 섞기 어려운 두 가지 형태.

그런데 권서준 작가는 상반되는 두 가지의 형태를 완벽하게 연결시켰다.

‘왼손에 죽음이 있다면 오른손엔 사랑을 쥐고 있다랄까...’

마치 저글링을 하듯 마음대로 요리하고 있었다.

“하, 이 작가 보통이 아닌데?”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출판권 오픈이라니, 신인인데 너무 욕심을 많이 부리는 거 같기도 하고요.”

스티브 대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어쩌면 이게 싸게 먹히는 걸 수도 있어.”

“...네? 설마 대표님은 이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시는 건가요?”

“당연하지. 이런 작품은 결코 우연으로 나올 수 있는 수준이 아니거든. 작품성과 그 깊이, 이만한 감각을 단어로 전달할 수 있는 작가는 흔하지 않아. 게다가...”

잠시 생각에 잠긴 그가 입을 연다.

“상업성마저 갖췄거든.”

누군가 그랬다.

예술이란 원래 쉬운 걸 어렵게 만드는 거라고.

사실 작품성에 치우친 작품들은 지금도 널렸다. 어렵게 꼬고, 난해하게 비튼 작품들. 제일 유명한 게 바로 프랑스의 대표 문학상인 공쿠르 상쯤 되려나?

그러나 그 작품들이 작품성에서는 인정받지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건 한 가지 때문이었다.

‘바로 상업적인 요소를 놓치고 있기 때문이야.’

소설이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기대감으로 손을 대는 것. 때때로 작품성을 통해 손거울처럼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게 만들기도 하지만 공부하기 위한 수단은 아니었다.

‘어렵다고 해서, 작품성이 좋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책은 아니야. 그런 작품은 우리의 사업 대상도 아니고.’

그런데...

권서준 작가의 작품은 달랐다.

이미 상업성 면에서도 완벽에 가까웠다.

“「거장의 숨결」 공연 결과가 어떻게 나왔다고 했지?”

“한국 기준 52주 연속 매진이었고, 20만 명의 누적 관객을 기록했습니다.”

지극히 영국적인 정서가 담긴 작품이, 지구 반대편 나라에서 거둔 성과는 놀라웠다.

“만일 이 작품이 제대로 된 편집자를 만나 세상에 나오면 어떻게 될까?”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 순간 스티브 대표의 눈빛이 확실해진다.

“지금 당장 비행기 예매해.”

“네?”

“이렇게 된 거 우리가 가야지. 런던으로.”

연극 대본과 차기작에 대한 판권.

그 어느 것도 다른 곳에 순순히 넘길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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