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negotiate - 협상하다 (5)
89.
***
베네딕트. C.
공연 예술 및 자선 기부활동으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 훈장도 받은 영국의 대표 배우였다.
물론 최근엔 헐리웃에서도 그 연기력을 인정받아 출연료 역시 고공행진을 하고 있는 인기 배우이며, 동시에 내가 크리스토퍼 말로로 점찍어둔 배우였다.
물론 이렇게 공항에서 직접적으로 만날 줄은 몰랐지만.
‘엄청나게 마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몸이 탄탄하군.’
솔직한 첫 느낌이었다. 동시에 깊고 푸른 눈동자 안엔 아이 같은 순수함과 함께 감출 수 없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대본을 보고 작가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 이렇게 약속도 없이 찾아왔습니다.”
표정은 친근하고, 말투는 정중했으며 행동에선 기품이 느껴진다.
“괜찮습니다. 다만 조금 놀랐네요. 저를 아실 줄은 몰랐는데.”
“작가님의 작품을 미리 접했습니다. 대본을 보고 나니 꼭 뵙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결례를 무릅쓰고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대스타를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우리는 인사를 주고받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사람, 내 작품에 진심이야.’
이 시간에, 대스타가 직접 인사를 하러 이곳에 왔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지만 보다 확실한 증거는 베네딕트의 눈빛이었다.
간절함이 가득 담긴 그의 눈빛에선 잠시나마 천국을 맛본 자의 환희가 여운처럼 남아있었다.
물론 그가 맛본 건 내 대본임에 틀림이 없었고.
그때, 지켜보던 아서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휘적거린다.
“자, 자 오늘은 늦었으니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하지.”
베네딕트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 죄송합니다. 인사만 드리려고 했는데 너무 제 생각만 했네요. 아서, 작가님을 편히 모셔다드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인사를 하던 나는 문득 한 단어에 꽂혔다.
내일이라...
내가 쳐다보자 아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마치 이번 계약이 성사되면 주연은 베네딕트가 맡을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미소였다.
물론 그 느낌을 나만 받은 건 아니었다.
옆에 서 있던 장현웅은 이미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내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으니까.
“자, 이분들을 조심히 모셔다드리게. 내일 약속된 시간에 뵙겠습니다.”
아서는 운전사에게 당부를 한다.
잠시 뒤 차가 출발하고,
운전사는 우리를 위해서 칸막이를 올렸다.
“저, 저기... 우리가 방금 만난 사람이, 분명 그 사람 맞죠?”
여태 바짝 굳어서 아무 말 하지 못하던 장현웅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네, 저도 그렇게 봤어요.”
놀라기는 오수정 대리도 마찬가지였다.
오 대리와 사전에 얘기된 내용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혹시 서준이 작품에 베네딕트가 출연하는 건가요?”
장현웅이 오 대리에게 물었다.
“그건 모르겠지만 일단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요? 전혀 관심이 없다면 오늘 이렇게 직접 찾아올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요.”
오 대리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미쳤다, 미쳤어...”
호들갑을 떠는 장현웅.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른 이유로 생각에 잠긴다.
***
늦은 밤.
호텔로 들어온 나는 베네딕트. C에 대한 자료를 확인했다.
‘역시, 총괄 디렉터답군.’
아서는 크리스토퍼 말로의 역할로 베네딕트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본 속에 그려진 이미지를 정확히 캐치하고 캐스팅한 것.
솔직히 나 역시 베네딕트를 염두하고 작업하긴 했지만 바쁜 헐리웃 스케줄을 소화하는 그가 직접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20대 초부터 연극으로 연기를 시작했고, 연기에 대한 열정도 진심인 몇 안 되는 배우였다.
‘연극도 아주 좋아하는 배우지.’
작품 「햄릿」의 주연을 맡은 적도 있었다. 지금도 유브튜에 올라온 영상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에너지가 느껴지고,
작품에 대한 열기가 느껴진다.
‘게다가 깊이가 있어.’
발음과 제스처 하나하나에 영혼을 담고 있었다.
그 시절 천재 배우로 유명했던 리처드 버비지의 느낌마저 묻어난다. 역시 내가 마음에 둔 배우다웠다.
찰칵찰칵.
그런데 그 순간 뒤에서 셔터음이 연이어 들린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카메라를 꺼내 창문 밖 거리를 찍고 있는 장현웅의 모습이 보인다.
“그건 뭐야?”
“카메라. 아버지가 선물로 주셨어. 웹툰 배경 작업하는 데 필요하거든.”
처음엔 그렇게 반대하시더니, 역시 자식의 가장 큰 지지자는 부모님이었다.
장현웅의 카메라에 런던 시내의 전경이 고스란히 담긴다.
어느 정도 촬영을 마친 장현웅이 다가온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가 않는다. 진짜 헐리웃 배우가 네 연극에 출연하는 거야?”
“아직 확정된 건 없었다. 다만 이 상황이 재미있네.”
“왜?”
장현웅이 묻는다.
“생각해 봐. 아직 우리가 포스 극단과 정식 계약한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왜 베네딕트가 나왔을까?”
“음... 아까 말하지 않았나? 네 작품이 마음에 들어서 인사하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 물론 내 작품이 마음에 들었을 수는 있어. 그런데 내가 궁금한 건 아서 씨의 행동이야.”
“아서 씨가 왜?”
“왜 아직 계약도 되지 않은 대본을 베네딕트에게 보여줬을까?”
“어? 가만, 그러고 보니까 그게 이상하네?”
“그래, 아서 씨는 지금 내 대본을 통해 베네딕트의 마음까지 사려는 거야.”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챈 장현웅이 눈을 크게 뜬다.
“헐, 그러니까 두 가지를 동시에 노리는 거구나? 네 대본으로 베네딕트를 설득하고, 반대로 베네딕트를 통해 너를 설득하고...”
“그렇지.”
아서 총괄 디렉터.
머리가 아주 비상한 사람이었다.
물론 나는 아서의 생각대로 움직여 줄 생각이 없었다.
“현웅아, 혹시 하이든 에이전시에서 연락 온 거 없나 한 번 확인해 봐.”
“하이든 에이전시? 어, 잠시만.”
점프하듯 침대로 이동한 장현웅이 누운 채 재빨리 노트북을 확인한다.
“어? 진짜네? 메일이 왔어.”
장현웅이 얼른 노트북을 들고 메일 내용을 보여준다.
발신자는 하이든 에이전시.
내용을 확인한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정중하고 긴 내용.
그러나 간단히 줄이면 작가 에이전시 계약과 함께 「거장의 숨결」, 그리고 차기작에 대한 작품 저작권 계약을 논의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상황이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었다.
***
다음 날.
우리는 조금 이른 시간에 포스 극단 회의실에 도착했다.
미리 도착한 우리는 포스 극단과의 계약 조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조건은 나쁘지 않습니다. 사실 국내 작품 중 이런 조건을 받은 건 작가님 작품이 유일하고요.”
오 대리에게 말대로 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판권 기간은 5년.
공연 수익의 일정부분을 로열티로 함께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달리 말하면 나쁘지 않다는 건 좋지도 않다는 뜻이었다.
포스 극단의 규모와 수준을 봤을 때 최고의 대우는 분명 아니었으니까.
“우선 계약은 대본과 음악만 판매하는 스몰 라이선스 방식으로 이뤄질 거예요. 원작의 내용과 무대 연출, 공연 시스템까지 그대로 판매하는 레플리카 방식보다는 영국 사정에 맞게 충분히 가공할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는 조건이에요.”
말 그대로 합리적인 조건.
그러나 이 조건 역시 아쉬웠다.
‘공연 관련 전부를 계약하는 게 나와 타이거 스튜디오 입장에선 보다 유리하니까.’
엄밀히 따져보면 지금의 계약 조건은 다소 포스 극단에 유리했다.
물론 난 이번 미팅을 통해 보다 나에게 유리한 조건을 얻어낼 생각이었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미팅이 시작된다.
아서 총괄 디렉터와 파트너.
그리고 우리 쪽에서는 세 명이 참석한 자리.
자리를 잡은 아서가 평온한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연다.
“자, 미팅을 시작할까요?”
***
오 대리와 실무자에 의해 미팅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미팅 과정을 지켜보던 아서의 머릿속엔 일련의 과정이 스쳐 지나간다.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주연배우로 떠오른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이 베네딕트였다.
‘베네딕트 외엔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한창 헐리웃 영화 스케줄로 고민하는 배우와 대본을 동시에 잡아야만 하는 숙제가 남았다.
결국 아서는 권서준 작가의 대본과 주연 배우 캐스팅이라는 두 마리 새를 동시에 노리기 위해 고도의 계획을 짰다.
대본으로 배우를, 다시 배우로 대본의 계약을 이끄는 계획.
‘다행히 잘 먹힌 모양이야.’
아서의 얼굴에 어느새 미소가 떠오른다.
전날 밤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생각대로 꽤나 놀라는 모습이었어.’
공항에서 보였던 권 작가 일행의 반응은 만족스러웠다.
‘하긴 베네딕트를 보고 놀라지 않으면 말이 안 되지.’
베네딕트야말로 현시점에서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헐리웃 대스타였다. 듣기로는 한국에서도 헐리웃 영화의 인기는 대단해서 베네딕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했다.
게다가 신인에 가까운 작가 입장에선 헐리웃 배우가 출연할 수 있다는 것, 그거 자체가 엄청난 영광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불안한 요소도 있었다.
‘오 대리와 일행은 놀랐는데 정작 권 작가 본인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단 말이지...’
권서준 작가는 헐리웃 대스타를 보고도 흔들림이 없었다.
스물 후반의 젊은 작가에게서 보기 힘든 반응이었다.
조금 의외.
그러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느 작가가 베네딕트의 출연을 거부할 수 있겠어?’
이미 모든 건 자신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베네딕트에게는 이미 구두 계약까지 받아놓은 상태.
‘이 대본만 계약한다면 주연 출연도 고민해보겠네.’
베네딕트의 말을 떠올리며 아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시간이 흐르고,
전체적으로 미팅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제 슬슬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
지켜보던 아서가 천천히 입을 연다.
“조건은 어떠신가요?”
오 대리가 권서준 작가를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 정도면 충분히 의견이 모인 거 같네요.”
예상대로였다.
“자, 그럼 계약할까요?”
말을 내뱉는 아서의 입꼬리가 벌써부터 씰룩거렸다.
지이잉.
그런데 그 순간, 권서준의 휴대폰이 울린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네, 괜찮습니다.”
아서는 의자에 등을 묻은 채 느긋하게 기다린다.
“네, 네.”
그런데 통화를 끊고 돌아온 권서준 작가가 급히 오 대리에게 귓속말을 전한다.
그러더니 오 대리가 심각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
아서가 꼬았던 다리를 풀고 상체를 숙인다.
“무슨 일이죠?”
“음. 정말 죄송하지만, 계약을 조금 미뤄야 할 거 같습니다.”
예상치 못한 진행이었다.
“갑자기요? 이유가 뭔가요?”
“그게...”
오 대리의 말끝이 늘어질수록 입안의 침이 바싹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온 오 대리의 대답은 충격 그 자체였다.
“하이든 에이전시에서 이번 작품과 관련해서 미팅을 원해서요.”
쿵.
어디선가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바로 아서 자신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소리였다.
***
“후.”
늦은 정오 무렵.
베네딕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20대 초반부터 끊임없이 오른 연극 무대.
그러나 여전히 연기는 그의 고민거리였다.
헐리웃 영화와 연극 사이에서의 고민.
연기는 연극, 그러나 돈과 흥행은 영화 쪽이 옳은 선택이었다.
‘연극은 언제나 살아 숨 쉬는 기분이 들게 해주지...’
그에 비해 영화는, 특히 스토리보다는 흥행에 집중한 영화 속에서의 연기는 소모되는 기분이었다.
‘마치 내가 팔려나가는 기분이랄까.’
상업 배우가 이미지를 파는 건 당연했지만 채워지지 않는 연기에 대한 욕망에 작품 수가 늘어갈수록 깊은 회의감에 젖어 든다.
그나마 마지막으로 연기에 대한 희열을 느낀 건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의 연극 무대였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설렌다.
“후. 지금쯤 미팅을 시작했으려나?”
응접실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제프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벤, 자네 정말 그 작품에 출연할 생각인가?”
베네딕트의 애칭을 부르는 친구이자 오랜 에이전트인 잭이었다.
“해야지. 아니 난 해야만 해.”
“왜 그렇게 그 대본에 목을 매는 거야?”
“자네도 봤잖아? 거기서 뭔가를 발견하지 못한 거야?”
“솔직히 잘 쓰기는 했지. 느낌도 좋았고, 그러나 헐리웃 영화를 포기하고 선택할 정도인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네.”
수백억이 넘는 출연료를 포기한 채 한낱 동양인 청년이 보낸 대본에 목을 매는 베네딕트의 모습이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단순한 대본이 아니야. 마치... 그 사람의 작품을 현대판으로 보는 느낌이란 말이지.”
“그 사람이 대체 누군데?”
답답해하는 잭을 보며 베네딕트가 천천히 입을 연다.
“위대한 시인이며, 위대한 철학자, 동시에 가장 세계적인 천재 작가.”
베네딕트는 이내 천천히 창가로 향한 채 런던을 바라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그의 눈동자엔 어느새 벅찬 감동이 요동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