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negotiate - 협상하다 (3)
87.
***
와이즈 출판사 편집실.
아침부터 주상진 편집장은 신바람이 났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으세요?”
출근한 양 대리가 묻자 주 편집장이 한 바퀴 턴을 하고는 책상을 짚고 양 대리를 바라본다.
“기분이 좋을 수밖에. 우리를 그렇게 힘들게 하던 고용수 부장이 나한테 먼저 전화를 걸었잖아. 진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그게 그렇게 기분이 좋으세요?”
“그럼, 그걸 말이라고 해? 코엘류 작가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고 부장한테 당했어? 본인도 이런 날이 올 줄이나 알았겠어?”
듣고 있던 양 대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 보니 이런 경우는 처음 아닌가요? 하이든 에이전시가 국내 작가한테 관심을 가진 거 말이에요.”
“맞지. 일본 작가들은 몇 있지만 국내 작가는 처음이지. 그래서 내가 벌써부터 가슴이 웅장해진다니까?”
“하이든에서 먼저 관심을 보여서요?”
“그래. 그만큼 권 작가 차기작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거잖아. 아직 초고도 안 나온 차기작에 벌써 피어슨 출판사와 하이든 에이전시가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이런 적이 있었어?”
“음. 저도 그게 좀 신기하긴 해요. 솔직히 권서준 작가의 작품은 희곡 하나, 소설 한 권이 전부니까요.”
지켜보던 주 편집장이 혀를 찬다.
“쯧쯧, 넌 아직 멀었다.”
“네? 왜요?”
“생각을 해 봐. 우리가 투자할 때 대부분 어느 지점에 들어가?”
“호재가 있을 때 들어가죠. 아니면 뉴스에 뭐가 실렸거나...”
“그래. 이 회사에 좋은 소식이 있다더라, 투자를 받았다더라, 이번 분기 순익이 좋더라 뭐 이런 거잖아.”
“당연하죠. 근데 그게 왜요?”
“근데 그때 들어가는 건 호구나 다름없거든. 돈 버는 사람들은 그 기사가 나옴과 동시에 이미 샴페인 터트리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뒤늦게 들어가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 샴페인값 내주는 것뿐이고.”
“아...”
“그래서 저점일 때 가능성을 보고 투자하는 게 바로 투자의 정석이지. 그걸 귀신같이 잘하는 게 바로 하이든 에이전시인 거고.”
“그럼 앞선 두 작품을 통해서 이미 권 작가의 가능성을 봤다는 거군요?”
“그렇지. 소설은 지극히 한국적인 색깔로 작품성을 드러냈고, 희곡은 또 전혀 다른 영미권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면서 작품성을 드러냈어. 말 그대로 국내와 해외 모두에서 통할 수 있는 작가라는 뜻이잖아.”
“하... 그걸 벌써 확인하다니 하이든 에이전시도 보통이 아니네요.”
“그래서 내가 지금 춤추고 있는 거 아냐. 그렇게 대단한 하이든의 한국 지부장이 나한테 전화를 해서 권서준 작가의 차기작에 관심이 있다고 하니까.”
양 대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참, 권서준 작가님은 뭐라고 하세요?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권 작가님 의견 아닌가요?”
“음. 그러고 보니 아직 답이 없네. 근데 뭐 답은 나온 거나 다름없지. 솔직히 권 작가 입장에선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계약금 빵빵하지, 계약만 해놓으면 알아서 하이든에서 해외 판매까지 진행해줄 테니까. 그게 우리 입장에서도 훨씬 편하고 말이야. 뭐 조금 이따가 만나기로 했으니까 그때 물어보면 되겠지.”
지이잉.
그때, 때마침 휴대폰이 울린다.
“어? 우리 작가님 양반은 못 되시네. 양 대리, 나 작가님 좀 만나고 올 테니까 계약서 검토 좀 하고 있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점심 메뉴 맛있는 거로 정해 놔. 내가 쏠 테니까.”
주 편집장의 발걸음이 더없이 가벼웠다.
입에선 절로 휘파람이 나올 정도였다.
***
이른 아침.
나는 와이즈 출판사를 찾았다.
어젯밤에 걸려온 주 편집장의 전화 때문이었다.
-자, 작가님! 하이든 에이전시에서 작가님 차기작을 계약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들뜬 주 편집장의 목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기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고용수 부장, 생각만큼 유능한 사람이군.’
나와 미팅을 가진지 불과 하루만의 일이었다.
본사와 연락하고, 계약 조건을 조율하고, 다시 와이즈 출판사에 연락하기까지 반나절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일 처리도 빨랐고, 결단력도 빨랐다.
그만큼 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는 걸 의미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계약 조건이 아주 좋습니다.”
주 편집장은 활짝 웃는 얼굴로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 조건은 주 편집장의 말대로 업계 최고 대우 수준이었다.
“사실 국내외 번역 사업 쪽은 하이든 에이전시가 거의 독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만큼 큰 기업이에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미국까지 손을 안 대고 있는 곳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파트너십을 맺게 됐을 때의 이익도 상당합니다. 앞으로 진행되는 해외 판권 관련해서도 하이든 에이전시에서 다 해줄 테니까요.”
주 편집장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다.
그러나 내 생각과는 조금 달랐다.
“혹시 출판물의 해외 판권 판매와 관련해서 파트너십 외에 다른 방법은 없나요?”
“음. 뭐 간혹 유명한 일본 작가들 경우엔 에이전시와 파트너십을 맺기보다 출판권을 오픈해 놓기도 하죠. 그럼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출판사에서 직접 출판권을 따내기 위해 입찰하기도 하거든요.”
“일종의 경쟁체재인 거네요?”
“그렇죠. 가격을 높게 부른 쪽과 계약을 맺으면 되니까요.”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했다.
“그럼, 출판권을 오픈해 놓죠.”
“...네?”
“혹시 모르잖아요. 하이든 에이전시만큼 제 작품에 관심을 갖는 곳이 또 있을지도.”
“...”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을까.
주 편집장이 눈이 평소보다 배는 커진다.
***
늦은 오후.
나는 엄마와 누나에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미리 불러놓은 택시를 타고 장현웅과 함께 곧장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오수정 대리님은 미리 미팅 준비 좀 하신다고 어제 출국하셨고, 런던에서 만나기로 했어.”
부지런하고 꼼꼼한 오 대리답게 준비성이 철저했다.
‘다들 바쁘군.’
이번 미팅을 위해 타이거 스튜디오에서도 꽤나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출국 당일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여러 씨앗을 제대로 심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씨앗.
「거장의 숨결」 희곡을 활용한 뮤지컬.
두 번째 씨앗.
차기작 해외 판권과 관련해서 하이든 에이전시와의 피어슨 출판사의 경쟁 구도.
출장도, 출장을 다녀와서의 결과도 기대가 되는 상황이었다.
‘다녀오면 추수할 게 많겠어.’
이젠 기다리기만 하는 상황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택시 보조석에 앉아있던 장현웅이 묻는다.
“그냥, 지난번하고 느낌이 많이 달라서.”
“하긴, 그땐 선생님이 데려간 거라면 이번엔 직접 초대받고 가는 거네? 이야, 내 친구 그새 엄청나게 성공했는데?”
녀석의 말대로였다.
두 번째 영국으로 향하는 길.
많은 것들이 달라진 상황 속에서 나도 모르게 감상에 젖는다.
그때,
장현웅이 오늘 미팅 결과에 대해 묻는다.
“근데 말이야. 하이든 에이전시의 제안은 왜 거절한 거야?”
“거절이라고 하기보단 보류에 가깝지.”
“그니까 보류는 왜 한 거야? 주 편집장님한테 들어보니 고 부장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던데?”
“뭐, 그렇다더라고.”
“반응이 뭐 그래? 만일 하이든 에이전시 소속 작가 되면 엄청난 거 아냐?”
“기대 이상의 작품을 보여주면 그럴 테고 아니면 달라질 건 없어. 에이전시가 내 작품의 퀄리티를 올려주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되면 좋은 거 아냐?”
“나쁘진 않지. 다만 아직 섣불리 계약하기엔 일러. 나는 지금이 가장 저점이니까.”
그래.
지금 이 순간이 내가 가진 가치의 가장 저점이었다. 앞으로 나는 계속해서 더 높아질 일만 남았으니까.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저 멀리 인천공항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와이즈 출판사.
정영만 회장은 허겁지겁 돌아온 주 편집장의 보고를 받았다.
“서준이가 분명 그렇게 말했다고?”
“네. 그게 제가 들은 게 맞는지 의심스러워서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확실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이든 에이전시와 당장 계약하지 않을 거라고.”
당혹스러워하는 주 편집장과 달리 정 회장의 얼굴은 차분하기만 했다.
“그래. 하긴, 여기저기서 관심을 보이는데 덥석 손을 잡을 필요는 없지.”
“네?”
되묻는 주 편집장의 표정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네 말이야. 주식이 상한가를 쳤어. 자네라면 바로 팔 건가?”
“아니죠. 좀 더 기다려 봐야죠. 더 오를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 지금 서준이가 그래.”
순간 정 회장의 생각을 이해한 주 편집장이 눈을 빠르게 깜빡인다.
“아, 그럼 피어슨 출판사와 하이든 에이전시,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출판사들이 경쟁하도록 두자는 거군요?”
“그렇지. 노리는 사람이 많을수록 작품의 가치는 높아지는 거니까.”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너무 아쉽지 않나요? 그래도 하이든 에이전시인데... 그쪽에서 갑자기 포기할 수도 있잖아요?”
“하이든이 그렇게 쉽게 포기할 거였으면 애초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올 리도 없지. 안 그런가?”
“아...”
주 편집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설마, 권 작가는 그것까지 노리고 출판권을 오픈하자고 한 건가요?”
“그것뿐만이 아니라 서준이는 한 가지를 더 노리고 있어.”
“한 가지 더요?”
주 편집장이 눈을 크게 뜬다.
“만일 하이든에서 포기한다고 해도 상관없다는 거지. 왜? 그만큼 자신의 이름을 강하게 어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테니까.”
그제야 주 편집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 하이든의 제안을 거부한 작가로 이름을 알릴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 지금 녀석은 작품 하나만 팔려고 하는 게 아니야. 자기 자신도 팔고 있는 거라고. 그것도 하이든 에이전시를 상대로 말이야.”
정 회장의 표정은 태연했지만 속으로는 꽤나 놀란 상태였다.
눈앞의 이익이 보장된 제안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았다. 특히 혈기왕성한 나이의 권서준이라면 그게 더 어려울 터. 그런데도 녀석은 그보다 훨씬 더 먼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녀석은 작가인 거야, 사업가인 거야?’
20대에 가지기 힘든 안목과 연륜에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이번 권서준의 영국 출장이 더 기대된다.
포스 극단에서 초대한 영국 출장.
그러나 피어슨 출판사와의 미팅 역시 예정되어 있었다.
그 짧은 출장을 통해 녀석이 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돌아오면 선물 하나 더 줘야겠어.’
이쯤 되면 미리 준비해두는 게 맞았다.
물론 선물이라고는 하지만 뇌물이나 다름없었다. 애꿎은 방송국 놈들이 녀석의 마음을 사지 못하게 미리 주는 뇌물.
***
인천공항을 출발한 지 4시간.
영화 한 편을 보고 잠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주변을 둘러보니 승객들도 어느새 하나둘씩 잠에 빠져 비행기 안이 고요하다.
고요함.
모든 것이 가라앉는 이 시간.
나는 차분히 차기작에 대한 영감을 떠올린다.
“후우...”
밤이 오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나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밤을 기다린다.
낮.
살아있는 것들의 생기로 가득 찬 시간.
반면에 밤은 고요히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밤을 기다린다.
내가 기다리는 밤은 결코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었다. 내 모든 생기가 잠잠해지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모든 것이 집중되는 내면의 밤.
내가 밤을 기다리는 이유는 그 시간이 나에게 ‘그것’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한 번 찾아오면 나를 세상과 고립시키며 전혀 없던 세상으로 초대하는 마법과 같은 초대장.
내 숨소리만 간신히 들리는 고요함 속에서 어느새 성큼 다가온 밤의 세계를 마주한다.
절대적인 무(無) 속에서 무언가 움튼다.
간질거리는 듯 사사로운 감각이 이내 열기를 띠고 머릿속에서 폭발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이었다.
밤의 기운이 내 온몸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기운은 이내 내가 쓰고 있는 작품 속 인물들의 밤과 연결된다.
칠흑 같은 밤 속에서 헤매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제목 : 당신이 머물던 자리에
아버지와 아들의 부재를 통해 존재론적 고독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소설.
사회적인 동물이라 일컬어지는 우리는 끊임없이 ‘함께’를 추구한다. 그러나 인간이란 자고로 개인과 세계로부터 근본적인 고립의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사건이 바로 죽음이고.
이 작품은 죽음을 통해 언젠가는 마주할 수밖에 없는 고립에 대한 자각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지금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싶었다.
‘고독감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의 자아를 일그러트리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계속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
떠오른 영감이 휘발되어 사라지기 전에 수첩을 꺼낸다. 만년필 뚜껑을 입에 문 채 서둘러 떠오른 영감을 적어 내려간다.
사각사각 사각.
고요한 비행기 안에 만년필 소리가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