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86화 (86/203)

86. negotiate - 협상하다 (2)

86.

***

오늘 극단 대표실.

박성규 교수와 최민준 작가, 김재용 대표가 한자리에 모였다.

간간히 박 교수가 커피 마시는 소리만 들리는 고용한 실내 공기.

김 대표는 박 교수가 가져온 대본을 심각한 표정으로 읽고 있었다.

제목 : 가시리 가시리잇고.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뮤지컬 버전으로 완성한 작품이었다.

전통음악과 퓨전 음악.

그리고 역사극의 현대화라는 야심 찬 콘셉트로 만들어진 대본.

“하아... 다 읽었습니다.

김 대표가 들고 있던 대본을 천천히 내려놓는다.

“어때?”

박 교수가 들고 있던 커피잔을 얼른 내려놓으며 묻는다.

“이거, 느낌이 오는데요?”

김 대표의 반응에 박 교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내가 말했잖아. 나랑 민준이가 힘을 모았는데 당연한 거지. 대본 죽이지?”

“네, 대본대로만 나오면 이거 괜찮겠는데요?”

“그래, 연극 죽어라 해봤자 몇 푼 안 되잖아. 근데 뮤지컬? 한 번만 대박 터트려도 평생 놀고먹는 데 지장 없다고.”

김 대표의 생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렇게 박 교수를 만나 대본을 읽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고.

김 대표가 대본을 흡족해하자 박 교수가 넌지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그래서, 투자는 어떻게 할까?”

“...”

순간, 김 대표의 생각이 깊어진다.

사실 국내 오리지널 뮤지컬 작품의 경우 투자를 받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

‘브로드웨이식 투자 공식을 따를 수 있는 마켓 구조가 없기 때문이지.’

대부분 7, 8개월밖에 되지 않는 단기 공연 위주인 뮤지컬 마켓 구조에선 사전 제작비와 주당 운영비를 회수하는 것조차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내 김 대표의 생각은 부정적인 부분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흐른다.

‘반대로 상설 공연장을 확보하고, 흥행에 성공한다면 어떻게 될까?’

2년, 3년이 문제가 아니라 최대 10년 가까이 우려먹을 수 있는 IP거 바로 뮤지컬 IP였다.

‘이번에 내 인생 한 번 걸어봐?’

안 그래도 지난번 「거장의 숨결」 때부터 운이 좋았다.

‘아니지. 그것도 내 실력이었지. 그때 대본도 내가 골랐잖아.’

분명 서미연 감독이 대본을 물어왔지만 기억이라는 건 언제나 그렇듯 본인 위주로 왜곡되는 법이었다.

‘그래, 내 감각을 한번 믿어 보자고.’

갑자기 솟구친 자기 능력에 대한 맹신이 용기를 불어넣는다.

“제가, 전액 투자하겠습니다.”

“자네가?”

“이전 작품으로 현금도 당겨놨고, 부족한 건 여기저기 융통하면 충분히 가능할 거 같습니다.”

“오, 그럼 최고지.”

“해보죠. 크게 걸어야 크게 먹을 수 있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김 대표의 말에 박 교수가 느른하게 웃는다.

“그래, 그거지. 역시 김 대표는 내 스타일이라니까.”

세 사람의 도원결의, 아니 뮤지컬 결의가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

출국 하루 전.

나는 집 근처 카페에서 서미연 감독을 만났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자연스럽게 일 얘기로 넘어간다.

“뮤지컬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나요?”

“일단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작은 회사를 만들었어요. 아직 열 명도 채 되지 않지만 그래도 하나같이 열정이 대단한 사람들이죠.”

역시나 서 감독의 일 처리는 빨랐다.

게다가 서 감독이 자신 있게 말할 정도면 다들 한가락 하는 사람들일 게 분명했다.

“잘 됐군요. 한번 확인해보시죠.”

나는 뮤지컬에 맞춰 수정한 대본을 내밀었다.

서 감독은 그 자리에서 대본을 넘기기 시작한다.

“아...”

집중해서 읽어가는 서 감독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온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표정에서 대본에 대한 감동이 떠오른다.

가슴 떨리는 천재 작가의 질주.

그러면서 애절하리만큼 처연한 크리스토퍼 말로의 삶이 눈앞에 떠오르고...

그 처연한 모습 위로 깔리는 음악과 안무.

그리고 노래까지.

대본을 확인한 서 감독의 눈빛에 떠오른 건 자신감이었다.

이건 무조건 된다...

이 정도 느낌쯤 되려나?

잠시 뒤,

감동을 갈무리한 서 감독이 혀를 내두른다.

“작가님, 천재세요? 하아, 이건 정말...”

서 감독이 말을 쉽게 잇지 못한다.

하긴, 당연한 반응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흐름과 감정선 모든 게 완벽했으니까.

“원작이 엄청나서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네요.”

“통과인가요?”

“통과라니요. 상을 줄 수 있으면 대상을 드리고 싶을 정도인데...”

흡족한 반응이었다.

“감독님께선 안무와 음악만 신경 써 주세요. 그 부분은 감독님께 맡길 테니까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안 그래도 이번에 함께 하는 친구들이 그쪽 분야 전문가들이니까요.”

서 감독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일단 내년 상반기를 목표로 진행해주셨으면 합니다.”

“시간이 넉넉하진 않네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을까요?”

“사실 제가 이번에 영국에 가는 것도 그 때문이거든요.”

나는 이번 출장을 통해 포스 극단과의 계약을 논의할 생각이었다.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처음으로 현지화되는 연극에 대한 이슈, 그리고 그 원작으로 펼쳐지는 국내 뮤지컬까지.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 홍보나 마케팅 면에서 최고일 테니까요.”

내 설명을 들은 서 감독이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한다.

“대체, 작가님은 어디까지 생각하시는 거예요?”

“제 인생의 엔딩까지요?”

“...네?”

“농담입니다. 이왕 글을 썼으면 제대로 빛을 보게 해주고 싶은 게 작가의 심정이니까요.”

서 감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이내 표정이 굳어진다.

“왜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문제까진 아니고...”

잠시 고민하던 서 감독이 이내 입을 연다.

“오늘 극단 측에서도 뮤지컬을 준비하고 있나 봐요.”

“뮤지컬을요?”

“네, 박 교수랑 김재용 대표가 의기투합한 거죠. 거기에 최민준 작가까지 합류했고요.”

대충 들어보니 고려 시대, 공민왕을 주인공으로 만든 내용.

조용하다 싶었더니 김 대표 쪽도 준비하는 게 있었다.

“투자를 받은 건가요?”

“아니요. 전액 김 대표가 투자했어요.”

“전액 투자라, 김 대표가 돈을 많이 벌긴 했네요.”

“다 작가님 덕이죠.”

서 감독이 쓴 미소를 짓는다.

재주는 작가와 배우, 총괄 디렉터가 넘고, 돈은 김 대표가 챙긴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벌써부터 뮤지컬계의 어벤져스 아니냐는 말이 들릴 정도예요. 그런데 그 작품의 상영 날짜도 아마 내년 상반기쯤이라...”

평론, 연극계, 그리고 희곡 작가의 대표 주자가 모인 것.

다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괜찮습니다.”

“...네?”

“어차피 우리가 이길 테니까요.”

내 말에 그제야 서 감독이 미소를 짓는다.

“하긴, 이 대본으로 지면 말이 안 되죠.”

잠시 고개를 끄덕이던 서 감독이 입술을 야무지게 문다.

“참, 투자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서 감독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러나 사실 투자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아마 조만간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게 될 테니까.’

내 오른쪽 손목을 걸어도 좋았다.

***

나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출국 전 해결해야 할 일은 대부분 마무리한 상태.

‘다녀오면 많은 것들이 정리되어 있겠어.’

내심 기분이 고양되며 기대감이 차오른다.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엄마가 다가온다.

“내일 오후 비행기지?”

“응.”

“짐은 다 쌌고?”

엄마가 캐리어 맞은편에 앉아 묻는다.

“응. 대충. 옷 말고는 필요한 게 없어서 쌀 것도 없네.”

“그래도 막상 나가면 이것저것 없어서 불편할 수 있잖아. 잘 챙겨 봐.”

엄마의 눈에 난 아직도 물가에 내놓은 아이였다.

아마 평생토록 그렇겠지.

물론 아주 오랫동안 듣고 싶은 잔소리였다.

“고추장 볶음이랑 김, 그리고 마른반찬 몇 개 준비해놨으니까 빼놓지 말고 가져가고.”

“요즘엔 외국에도 한인 마트 없는 곳이 없어서 사서 먹어도 돼.”

“그런 게 건강에 좋니? 비싸기만 하지.”

“하긴, 울 엄마 요리에 비할 바는 아니지.”

내 말에 엄마가 싫지 않은 듯 웃는다.

엄마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출장이라 그럴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나중에 여행으로 같이 가자. 영국이 생각보다 예쁘거든.”

“그 먼 데까지 뭐 하러. 우리나라도 볼 데가 얼마나 많은데. 비싸기만 하지.”

엄마는 여전히 돈 걱정이었다.

자식 걱정이 보다 맞는 말이겠지.

“아이고 내가 얼마나 더 성공해야 우리 엄마가 편히 해외여행을 같이 갈까? 안 되겠다. 내가 더 열심히 일해야겠어.”

분명 농담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갑자기 나를 짠하게 바라본다.

“너 엄마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 지 아직 2년도 안 됐어. 그 사이에 니가 어디까지 왔나 봐봐. 사람이 이보다 어떻게 더 열심히 사니?”

엄마의 염려이자 칭찬이었다.

“내 아들이지만 대단하고, 대견해. 근데 이젠 네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어.”

“내 인생?”

“그래. 엄마랑 누나 걱정 그만하고 네 인생 한 번 재미지게 살아봐.”

“뭐야, 그러는 엄마는 그렇게 못 살면서.”

“무슨 소리야? 엄마가 얼마나 재미지게 살았는데.”

“정말?”

“그럼.”

엄마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표정을 보니 아마 그 시절을 떠올리는 게 분명했다.

엄마가 가장 행복했고, 언제나 그리워하는 그 시절의 기억.

“니 아빠 오토바이 타고 전국에 안 돌아다닌 곳이 없거든. 그러다가 지연이 낳고 정착했고, 너 낳고 지금까지 얼마나 재미있게 살고 있는데.”

“에이, 그건 아니다. 솔직히 내 기억엔 엄마 고생한 기억밖에 없는데?”

엄마가 피식 웃더니 입을 연다.

“그래, 고생도 했지. 그런데 하루가 다르게 크는 너희들 보면서 재미있었어.”

엄마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너도 그렇게 살아. 매일매일이 재미있게. 알았지?”

엄마가 내 손을 두드린다.

“근데 그거 알아?”

“뭐?”

“나는 지금이 제일 재미있어.”

나를 바라보던 엄마가 가만히 웃는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내 손등을 두드린다.

진심이었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재미있게 살 예정이고.

내 인생은 아직도 ‘ing’니까.

***

늦은 밤.

와이즈 출판사 회장실.

정영만 회장은 흐뭇한 얼굴로 권서준의 원고를 바라본다.

“하아,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는군.”

읽을수록 아버지와 아들의 서사가 미묘하게 다르게 느껴진다. 말로,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미묘한 감정과 애틋함이 읽을수록 진한 육수처럼 배어 올라온다.

똑똑똑.

한창 감동에 젖어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가 들어온다.

“무슨 일인가?”

“주 편집장이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해서요.”

“그래? 들어오라고 해.”

주상진 편집장이 굳은 표정으로 들어온다.

“그래,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그게, 이번 코엘류 작가 신작 때문입니다. 하이든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주 편집장이 조심스럽게 서류를 내민다.

전화를 받은 정 회장의 표정이 굳어진다.

“뭐? 고 부장이 이렇게 큰 금액을 불렀다고?”

아무리 코엘류 작가라고 해도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손해를 보면서 출판할 수는 없으니까.

편집장이 결정하기엔 어려운 문제.

정 회장이 판단해야만 했다.

“하아, 어쩔 수 없지. 잠정 보류하도록 해.”

꽤나 괜찮은 작품이라 한국어 번역을 하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하이든 에이전시였다.

지이잉.

그런데 그때 주 편집장의 휴대폰이 울린다.

“어?”

발신자를 본 주 편집장이 눈을 크게 뜬다.

“고 부장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는데요?”

“고 부장이? 얼른 받아봐.”

“네, 네. 네?”

경악하는 주 편집장의 반응에 정 회장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진다.

“아, 네 고 부장님, 어쩐 일로... 네? 네에? 아, 알겠습니다. 네, 네...”

전화를 끊은 주 편집장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정 회장이 먼저 묻는다.

“왜, 무슨 일이래? 가격 절충하겠대?”

주 편집장이 고개를 젓는다.

“그게... 그건 아니고... 권 작가 차기작에 관심이 있다는데요?”

“...뭐?”

뜻밖의 흐름이었다.

“웬만한 회사 대표보다 만나기 어려운 고 부장이 먼저 전화를 걸어와서 권서준의 차기작에 작품에 관심이 있다니... 이게 무슨 진행이죠?”

주 편집장이 황당한 듯 묻는다.

그러나 어느새 상황을 이해한 정 회장의 얼굴은 차분해졌다.

“역시 하이든의 정보력은 무섭군. 아마 서준이 작품이 포스 극단, 피어슨 출판사에서 관심을 보인다는 걸 알아낸 거야.”

“아... 그렇게 된 거 군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뭘 어떻게 해? 오랜만에 우리도 하이든에 큰소리 한번 치는 거지. 당장 서준이한테 연락해 봐.”

“아, 네, 알겠습니다.”

주 편집장이 서둘러 회장실을 빠져나간다.

다시금 고요해지는 실내.

홀로 남은 정 회장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떠오른다.

“하이든 에이전시에서까지 관심을 보이다니, 대체 넌 어디까지 뻗어 나갈 생각이냐.”

혼잣말처럼 읊조리는 독백.

그 안에 담겨 있는 건 한 젊은 천재 작가에 대한 노장의 기대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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