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54화 (54/203)

# 54. useful - 쓸모 있는 (1)

54.

***

늦은 오후.

타이거 스튜디오 기획제작 7팀 회의실.

드라마 「이옥」의 실무진들이 모여 한창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권 작가님 말씀으로는 열흘 내로 2화 대본이 나올 것 같다고 하셨어요.”

정은미 피디의 말에 진영민 CP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뜬다.

“벌써? 집필 속도가 아주 빠른데?”

“속도만 빠른 게 아니죠. 퀄리티도 장난 아닙니다.”

이미 초고를 본 정 피디는 벌써부터 자신감을 내비쳤다. 덕분에 진영민 CP의 표정도 한결 가벼워진다.

“자, 그럼 이제 대본도 나온다니까 슬슬 캐스팅 보드를 채워야 할 시기라는 뜻인데, 본부장님, 신하율은 얘기가 잘 됐어요?”

진영민 CP의 물음에 하재봉 본부장이 헛기침과 함께 입꼬리에 힘을 준다.

“야, 말도 마라. 그것 때문에 온종일 머리가 뜨거우니까.”

진짜로 열이 나는지 본부장은 물병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어젯밤 늦게 도착한 성도윤 실장의 장문의 문자 메시지 때문이었다.

[늦은 시간에 정말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언제나 배려해주시고, 걱정해주시고 챙겨주신 은혜 잊지 않고 있습니다.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고요.]

길고 긴 인사말.

그러나 본론은 한참 뒤에야 나왔다.

[다만 죄송하게도 이번 작품에 하율이가 출연하는 건 쉽게 결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하율이가 사극 경험이 없는 데다가 연기도 부족해서 내부적으로도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이렇게 좋은 기회를 주셨는데 바로 답변을 드리지 못하는 점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면서, 혹시나 나중에 시간 되시면 제가 특별히 장어 잘하는 곳에서 거하게...]

“어후!”

본부장은 한숨과 함께 폴더블 폰을 거칠게 덮었다. 돌려 말했지만 결국 출연하기 어렵다는 말이었다.

“뭐? 연기가 부족해? 아니, 우리 하율이가 연기는 다 잘한다고, 뭐든 시켜만 주면 다 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참나...”

한겨울에 소매를 걷어붙인 본부장을 보며 진영민이 다독인다.

“일단 진정 좀 하세요.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네요. 비중이 낮은 배역도 아니고 요즘 한창 잘나가는 신인한테 사극이 무리긴 하죠. 게다가 아직 정식 대본도 없이 콘셉트만 보고 출연해달라고 하는 것도 웃기고요.”

그러자 본부장이 가슴을 두드린다.

“야, 이거 내 목만 걸렸냐? 책임자는 너라고 너. 그렇게 배우 사정 다 봐주면 배역은 언제 채울 건데?”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애초에 신하율 잡아주신다고 호언장담한 건 본부장님이면서 애꿎은 사람한테 화풀이하지 마시라고요.”

“흠, 흠. 그거야 뭐... 그렇지만...”

훅 들어오는 팩폭에 본부장이 슬쩍 시선을 피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한지 이번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긴다.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내가 본부장 자존심 다 버리고 오늘만 세 번 연락했다. 근데, 성 실장 마지막엔 전화도 안 받더라. 참나.”

본부장은 허리춤에 양손을 올린 채 허탈한 한숨을 내쉰다. 반면에 진영민 CP는 상대적으로 차분한 표정으로 배우 명단을 살폈다.

“답변 주겠다고 했으니까 일단 기다려보죠. 당장 대본이 나온 것도 아니고, 주연배우 세팅도 아직 안 됐잖아요. 전체 콘셉트를 보면서 지켜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권 작가하고도 배역 관련해서 미팅 한 번 해보고요.”

그러나 애써 본부장을 다독이는 진영민 CP의 표정 역시 밝지는 않았다. 신하율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잠자코 지켜보던 정 피디가 슬며시 입을 연다.

“근데, 신하율이라면 생각보다 쉽게 설득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전에 웹드라마 찍을 때 같이 작업해 본 사이거든요. 제가 한번 말해 볼까요?”

듣고 있던 진영민 CP가 고개를 젓는다.

“인마, 본부장님 선에서도 안 됐는데, 그게 되겠어?”

“아, 당연히 제가 설득하긴 어렵죠.”

“그럼?”

“사실 하율이가 권서준 작가님 광팬이거든요.”

이건 전혀 예상 못 한 연결 고리였다.

“...뭐? 누가 누구 팬이라고?”

“하율이가 권 작가님 팬이라고요. 「군필 고무신이 되었다」에서 권 작가님도 같이 작업했거든요.”

순간 본부장의 얼굴에 실망감이 비친다.

“야, 난 또 뭐라고. 그거 다 배우들 립 서비스잖아. 장사 하루 이틀 하나...”

“에이, 하율이는 그런 거 잘 못 해요. 게다가 그때, 하율이를 발굴한 것도 권 작가님이고요. 제가 알고 있기로는 지금도 연락하고 계실걸요?”

“...지금도?”

“그렇다니까요? 아마 권 작가님 작품이라고 하면 바로 연락 올 거예요. 정 못 미더우시면 제가 작가님 만나서 한 번 부탁드려볼까요?”

“...”

아직도 본부장의 시선엔 의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때였다.

“그, 그럼 뭘 주저하고 있어? 얼른 가서 권 작가님께 부탁해봐야지.”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정 피디는 경쾌한 대답과 함께 회의실을 빠져나간다. 그 당찬 걸음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자신감마저 느껴진다.

“...”

순간 고요해진 회의실.

본부장과 진영민 CP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교환한다. 말은 없었지만 눈빛만으로 충분히 생각이 전달된다.

‘이게, 이렇게 해결된다고? 에이 설마...’

두 사람 다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

이른 저녁.

나는 집 근처까지 찾아온 정 피디와 짧은 미팅을 가졌다.

“좀 있으면 대본도 나오고, 이제 슬슬 캐스팅을 하려고 하는데, 연화 역할 말이에요. 혹시 따로 생각하신 배우가 있나요?”

조심스러운 정 피디의 질문.

눈빛을 보니 이미 생각해둔 배우가 있는 모양이었다.

“제작진에서는 생각해둔 배우가 있나요?”

나는 일부로 제작진의 생각을 먼저 물었다. 앞으로의 캐스팅을 믿고 맡길 수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음. 솔직히 저희는 신하율이 적격인 거 같은데, 작가님 생각이 궁금해서요.”

연화.

극중 이옥을 먼발치에서 사모하는 기생 역할이었다.

이옥이 마음과 글로 위로한 천민, 장사치, 기생 중 한 사람으로 적절한 로맨스를 위해 내가 넣은 가상의 인물이었다.

평생 이옥을 마음에 품은 채 불같이 살다간 캐릭터. 청초하면서 농염하고, 순수하면서 정열적인 입체적인 인물로 애초에 신하율을 캐스팅할 생각으로 설정한 배역이었다.

‘그걸 바로 알아보다니 진영민 CP도 제법이야.’

진영민 CP도 그렇고, 본부장도 그렇고, 역시 이 바닥 짬밥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 감각이면 작품 전체에 대한 그림을 믿고 맡겨 볼 만했다.

“마침 저도 신하율 씨를 생각하고 쓴 역할이에요.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작업해 보는 것도 좋겠네요.”

내가 흔쾌히 동의하자 정 피디의 얼굴이 활짝 핀다.

“역시, 우린 통하는 게 있다니까요! 아마 하율이는 권 작가님 작품인 거 알면 바로 연락 올걸요?”

신이 난 정 피디가 얼른 휴대폰을 들고 진영민 CP에게 보고한다.

이제 조연출을 통해 JW엔터테인먼트 쪽으로 기획안이 전달되겠지.

자연스럽게 선택은 신하율에게 넘어간 상황. 그러나 이미 답은 나온 거나 다름이 없었다.

***

늦은 밤.

“후.”

영화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신하율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고생했다. 오늘 연기도 완전 좋더라.”

성도윤 실장은 신하율의 연기를 칭찬했다.

“감사해요. 근데 더 잘해야죠.”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 그렇게 무리하다가 오히려 탈 나니까. 잠깐 눈 좀 붙이고 있어. 대표님께 보고만 하고 바로 집에 데려다줄 테니까.”

성 실장이 나가고 신하율은 소파에 피곤한 몸을 기댔다. 몸도 마음도 지쳤지만 어쩐 일인지 잠이 오지 않는다.

‘뭔가 아쉽네...’

방금 연기를 마치고 왔지만 여전히 연기에 대한 갈급함이 남는다.

인기는 나날이 오르지만 그럴수록 아쉬움도 커진다.

자연스럽게 자신이 마음껏 연기의 열정을 불태웠던 그 순간이 떠오른다.

영화, 미니시리즈도 아닌 웹드라마.

「군필 고무신이 되었다.」

‘그땐, 진짜 재밌었는데...’

입체적인 서연이라는 캐릭터는 몇 날 며칠을 대본에 빠지게 만들었다.

‘캐스팅에 떨어지고 나서도 계속 캐릭터 연구를 할 정도였으니까...’

고작 1년 전의 일이지만 벌써부터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때, 자신을 절망 가운데 건져 준 한 사람이 떠오른다.

“작가님은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

SNS도 안 하는 작가라 근황을 알 수가 없었다. 분명 미니시리즈 들어간다고 한 거 같은데 소식이 없었다.

만일 정상적으로 진행됐다면 이제 슬슬 소문이 들릴 텐데 그 흔한 기사조차 없었다.

‘먼저 여쭤볼까? 아니야, 한창 바쁘실 텐데 괜히 방해될 수 있잖아... 그래도 궁금하긴 한데...’

그러나 결국 아쉬운 마음을 삼킨 채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뭐야, 안 잤어?”

그때, 보고를 마치고 온 성 실장이 물었다.

“네, 이제 갈까요?”

“그래. 어? 잠깐만 이게 뭐지? 누가 하율이 네 이름으로 뭘 보냈는데?”

포장지를 뜯자 곱게 싸인 기획안이 보인다. 성 실장은 누가 배우 담당 매니저 아니랄까 봐 바로 대본에 관심을 기울인다.

“어? 이옥? 아, 이게 이번에 하 본부장님이 들어가신다던 그 사극인가 보네.”

제목과 제작사를 확인한 성 실장이 별 관심 없다는 듯 옆에다 툭 내려놓는다.

“가자. 데려다줄게.”

그런데,

그 순간 기획안의 표지가 신하율의 눈에 들어온다.

“어? 잠깐만요...”

표지에 적힌 이름이 어딘가 익숙했다.

연출 : 정은미.

극본 : 권서준.

순간 신하율의 눈이 커진다.

“이거, 권 작가님 작품이었어요?”

“왜? 아는 사람이야?”

“네, 저 데뷔하게 해주신 분이거든요.”

“아... 그 저번에 본 연극 작가님이시구나? 근데 아쉽다. 하필 사극이라니...”

그러나 신하율은 개의치 않았다.

‘장르가 뭐가 중요해. 권 작가님 작품인데...’

권서준 작가가 쓴 사극이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신하율은 그 자리에 앉아서 기획안을 읽기 시작했다.

첫 페이지를 읽고,

두 번째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중요 대사를 짚어가는 손끝이 가늘 게 떨린다.

“하율아? 안 가?”

“잠시만요, 제발...”

신하율은 기획안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몰입하기 시작했다.

‘역시, 사극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어...’

고작 기획안에 지나지 않았지만 신하율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건, 무조건해야 해...’

결심을 굳힌 신하율은 서둘러 성 실장을 찾았다.

“저 이거 할래요.”

“...뭐?”

“이 작품 하고 싶다고요.”

힘주어 뜬 눈동자엔 모처럼 연기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담겨있었다.

***

다음 날, 타이거 스튜디오.

믿을 수 없는 소식에 분위기가 묘했다.

“하겠답니다.”

“...정말로 하겠다고 했다고?”

“그렇다니까요?”

“진짜?”

본부장이 놀란 듯 되묻는다.

“네, JW엔터테인먼트 쪽에서 직접 연락 왔어요. 못 믿겠으면 한번 보세요.”

정 피디가 내미는 발신 번호와 메시지.

모두 성도윤 실장의 연락처와 일치했다.

“그럼 전 권 작가님과 회의가 있어서 다녀오겠습니다.”

“...어. 그래 다녀와.”

철컥.

회의실 문이 닫혔지만 본부장은 표정은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 영민아, 이게 말이 되냐? 본부장도 못 한 걸... 권 작가 이름 석 자로 해결된다고?”

“그러게요. 신하율과 인맥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암튼 잘 해결됐으니까 다행이기는 한데... 하여튼 권 작가 그 친구는 볼 때마다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네?”

진영민 CP 역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글 좀 쓰는 젊은 작가라고 여겼던 생각에 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이번 작품 어쩌면 훨씬 더 잘 될 수도 있겠는데?’

진영민 CP가 생각에 잠긴 채 천천히 턱을 쓸어내린다.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존재감이 키워가는 한 젊은 작가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어나자마자 정 피디로부터 기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신하율 씨가 연화 역할에 관심이 있다고 연락이 왔어요!

물론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전날 밤 신하율한테 직접 전화가 왔으니까.

-작가님, 연화 역할로 타이거 스튜디오에서 제안이 왔는데 제가 출연해도 될까요?

한없이 조심스러운 말투.

나는 당연히 흔쾌히 허락해줬다.

어차피 신하율이 내 작품을 선택할 거라는 건 예상한 사실. 나는 조금 다른 궁금증이 일었다.

‘과연 얼마나 성장했을까?’

리처드 버비지를 떠올리게 만든 연기 천재 신하율의 아우라. 1년 동안 어떤 성장을 이뤘을지 벌써부터 호기심이 생긴다.

‘일단 첫 단추는 제대로 끼워졌군.’

시작이 반이라고 했는데 이미 반은 성공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 마침 대본도 술술 풀리는 중이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때,

초인종이 울린다.

“택배 왔습니다.”

마침 집에 아무도 없기에 나가보니 커다란 박스 하나가 놓여있다.

누나가 옷을 또 시켰나 하는 생각에 들어봤는데 생각보다 묵직했다.

‘뭐지?’

그런데 받는 사람 이름을 보니 내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와이즈 출판사였다.

아...

순간 잊고 있던 한 가지가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매년 이맘때쯤이었지.

와이즈 출판사의 당선작이 출판되는 시기가...

찌이익.

나는 상자의 테이프를 뜯어낸 뒤 에어캡으로 꼼꼼하게 포장된 내용물을 꺼냈다.

커다란 상자 안.

그 안엔 막 인쇄된 따끈따끈한 책 서른 권이 담겨 있었다.

제목 : 덧없는 행운이여

작가 : 권서준

내 인생 첫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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