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53화 (53/203)

# 53. traditional - 전통적인 (5)

53.

***

1580년대 말.

나는 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 작품구상을 하고 있었다.

1455년부터 1485년에 걸쳐 영국의 랭커스터 가와 요크 가 사이에서 벌어졌던 왕위쟁탈전.

랭커스터 가 문장은 붉은 장미, 요크 가 문장은 흰 장미였기 때문에 이른바 장미 전쟁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배경이었다.

장미전쟁(Wars of the Roses).

아름다운 이름과 달리 전쟁의 실상은 참혹하기만 했다.

폭정과 섭정.

내란과 목숨을 건 권력다툼까지.

헨리 6세를 비롯해 수많은 귀족과 왕족이 권력을 잡기 위해 벌이는 싸움은 그야말로 인간의 욕망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때, 나는 다양한 사서를 참고하며 사극을 집필했다.

내가 그 당시 역사극을 집필한 이유는 역사에 대한 런던 시민들의 깊은 관심 때문이었다.

‘당시 역사란 그 어느 장르보다 대중의 관심을 끄는 소재였지.’

역사에 대한 호기심과 대중적인 관심으로 인해 수많은 역사책이 경쟁하듯 발간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극장 운영을 위한 측면을 넘어서 한 명의 극작가로서 진지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역사란 또 무엇인가?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정치의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해서 정치가 인간에게 미친 영향이 무엇인가를 탐구했다.

나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러한 욕망에 젖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는 것이었다.

쉽지 않은 도전.

자료조사부터 난항을 겪었고, 권력자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눈치를 봐야 했다. 때론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내 작품 자체가 훼손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정말 쉽지 않은 도전이었어.’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을 고려하더라도 사극은 반드시 필요한 장르였다.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 현대를 제대로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 바로 역사극의 순기능이었으니까.’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모습을 통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을 비추어봐야 했다.

그렇게 나는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새롭게 얻은 영감을 기획했다.

제목 : 이옥.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제목과 함께 구체적으로 정리한 정식 기획안.

보면 볼수록 선명해지는 확신에 벌써부터 기분이 고양된다.

지이잉.

그리고 그 순간, 휴대폰이 울린다.

기다렸던 전화.

발신자는 진영민 CP였다.

-당장 이번 주에 정식 회의 잡으시죠?

나와 같은 확신을 가지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

며칠 뒤.

나는 다시 타이거 스튜디오 본사를 찾았다.

기획안을 토대로 추가로 잡힌 미팅 때문이었다.

이번엔 본부장까지 합석한 정식 회의.

최대한 간단히 설명했지만 이옥과 관련한 내용이 워낙 방대해서 장장 1시간에 걸친 회의가 이어졌다.

“고증을 위해 자료 조사를 더 진행해야겠지만 큰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전체 개요에 대한 설명을 마친 뒤 나는 고개를 들었다.

“...”

그러나 본부장은 고민에 잠긴 듯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내가 보내준 기획안을 한참동안이나 살펴본 뒤 그제야 고개를 든다.

“...그러니까 이옥이라는 사람이 실존 인물이라는 거죠?”

당연히 내가 한 얘기를 기억 못 해서 묻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만큼 신중하다는 뜻이지.’

드라마 제작팀을 총괄 지휘하는 본부장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었다. 물론 내 입장에서도 오히려 플러스 되는 요인이었고.

“네, 비교적 늦게 알려진 문인이라 20년 전부터 연구되기 시작해 자료가 많지는 않습니다. 그의 친구 김려가 모은 작품집이 자료의 전부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에 걸려 글을 쓰지 못한 선비라는 것도 사실이고요?”

“물론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정조와 연암 박지원과의 인연이 있었던 인물이죠.”

순간 본부장의 눈빛이 반짝인다.

제작자로서 촉이 왔다는 뜻이었다.

여태껏 조명되지 못한 역사적 인물.

게다가 정조와 박지원처럼 이름만 대면 알법한 인물들과의 접점도 있었다.

이옥.

모르면 몰라도 일단 알고 나면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본부장은 여전히 신중했다.

“한 가지만 더 묻죠. 작가님께선 왜 이옥을 고르신 거죠? 조선 시대만 해도 많은 위인들이 있는데요?”

연륜만큼이나 본부장의 질문은 예리했다. 사실 사극은 단순히 재미있는 캐릭터가 있다고 해서 쉽게 제작하기엔 어려운 장르였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이유와 계산된 셀링포인트가 필요했다.

“이옥만큼 개성이 뚜렷하고, 복합적인 모습을 가진 인물도 없으니까요. 조선 천지에 임금에게 저격당한 선비는 이옥이 유일하고요.”

“저격이라고요?”

“네, 말씀드렸다시피 정조의 문체반정으로 인해 평생 벼슬에 나가지 못한 선비가 바로 이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문학적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요. 자료조사가 더 필요하지만 지금까지 말씀드렸듯이 화제성은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인물입니다.”

“...”

본부장이 생각에 잠긴다.

이쯤 해서 그의 고민을 덜어줘야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술을 좋아하고, 여성의 마음과 억울한 자의 마음도 잘 헤아리고, 선비지만 기존 선비와 다른 길을 걸은 문인의 삶. 뿐만 아니라 방랑자처럼 전국의 산천을 누비고 누구보다 민초들에게 관심을 기울인 관찰가이면서 동시에 신비주의 문학 쪽도 섭렵한 사람. 그야말로 괴짜 선비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인물이죠.”

괴짜 선비.

나는 캐릭터에 대한 키워드마저 정해줬다.

머릿속에 때려 박는 작품의 콘셉트.

“...”

순간,

본부장이 놀란 듯 쳐다본다.

그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진영민 CP를 향해 있었다.

내가 면전에 있는 상태라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무슨 사인을 보내는지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친구... 대체 뭐냐?’

아마 이 정도 생각일 게 분명했다.

***

늦은 밤.

미팅을 마치고 나오니 밖은 어느새 어둠이 깔려있었다.

화려한 도시의 조명 사이로 타이거 스튜디오 본사 건물을 올려다본다.

콘텐츠 공룡이라는 별명답게 하늘로 쭉 뻗은 20층짜리 건물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크군.’

글로브 극장의 수십 배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 직원은 수백 명에 달하고, 일 년 매출만 7천억이 넘는 코스닥 상장 기업이었다.

매년 쏟아지는 대한민국 드라마의 1/4이 이곳에서 제작되었다.

누구나 조금은 겁먹고 움츠러들 법하지만 나는 예외였다.

‘나는 이것보다 훨씬 더 높은 탑을 세울 거니까.’

내 머릿속엔 이 건물보다 몇 배나 큰 상상 속 도서관이 존재했다. 그 안에 빼곡히 들어차 있는 작품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 이 정도의 건물은 비할 바도 아니었다.

‘물론 차분히 단계를 밟아가야지.’

글을 쓸 때도 순서와 단계가 있듯, 인생의 목표를 성취하는 데에도 다 그에 따르는 과정이 있는 법이었다.

급할 건 없었다.

언젠간 자연스럽게 내 손에 쥐어질 목표였으니까.

일단 우선순위는 대본이었다.

***

권서준 작가가 떠나고 회의실엔 본부장과 진영민 CP만이 남았다.

“...”

본부장은 손에 든 기획안을 좀처럼 내려놓지 못했다.

“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대박인데?”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서 술도 사드린 거고요.”

“아니, 어떻게 악역이 이렇게 입체적일 수 있지?”

거대한 서사.

치밀한 인물관계.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바로 악역의 존재였다.

“그것도 정조라니...”

정조라면 조선 후기 개혁과 대통합을 실현한 군주로 흔히 뒤에 대왕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경우도 많았다.

지극히 어려운 여정을 통해 왕위에 오르고, 갖가지 개혁 정책 및 탕평을 통해 대통합을 추진한 왕.

그러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재위 기간 중 추진했던 각종 정책은 대부분 폐기되고, 그로 인해 그에 대한 아쉬움은 수많은 야사를 만들어내며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는 사람이지.’

지금도 그를 주인공으로 끊임없는 콘텐츠들이 재생산되곤 했다.

그러나 여기....

정조가 내세운 문체반정으로 인해 꿈을 이루지 못한 선비가 하나 있었다.

나라를 위해.

조정의 질서를 위해.

군주의 지엄한 명령 아래 짓밟힌 가련한 선비의 삶.

그렇다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긴다.

선은 무엇인가?

선은 누구를 위한 선인가?

다수를 위한 선은 모두 선인가?

그렇다면 소수의 희생은 어떠한 가치를 가지는가?

왕 중심의 사극에서 벗어나 민초나 다름없는 한미한 서족 집안의 선비를 통해 그 시기 조선의 모습을 되돌아본다.

“무엇보다 정조의 상황과 선택이 입체적이라 더 매력적이야.”

일차원적인 악역을 맡게 되면 배우 입장에서도 고작 무서운 표정을 짓거나 악다구니를 쓰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입체적인 악역일 경우, 그가 가진 사상과 가치관에 따라 숨소리만으로, 눈빛만으로도 긴장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만큼 입체적인 빌런이 중요하지.’

또한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 역시 단순한 권선징악의 주제에서 벗어나 악역의 생각과 가치관에 대해 고민해보고, 때론 악역을 응원하는 모습을 토대로 색다른 공감 거리를 제공해줄 수 있었다.

‘우린 그런 작품을 웰메이드 사극이라고 부르고....’

극이 끝난 지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 시대를 대표하는 사극이라 회자 되는 작품들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출연했던 배우들 역시 자신의 커리어 중에 가장 자랑스러운 부분을 차지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이 기획안은 놀라울 정도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다.

‘악역을 억지로 구겨 넣은 게 아니라 극 전체에 자연스럽게 녹여냈어...’

더없이 인간적인 악역.

그래서 더 몰입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한참을 감탄하던 본부장이 그제야 고개를 든다.

“이거 하자. 이건 무조건해야 해!”

“당연하죠. 제 머릿속에 이미 캐스팅 보드가 쫙 펼쳐져 있다니까요.”

“누구? 누구를 생각했는데?”

“다른 배역보다 여주인공 역할 보고 딱 떠오른 애가 하나 있어요.”

“영민아, 말만 해. 내가 다 꽂아줄 테니까.”

호언장담하는 본부장의 말에 진영민이 입을 연다.

“신하율이요”

순간 본부장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신하율? 에이, 신하율 걔가 사극을 하겠어? 안 그래도 요즘 로맨스로 잘 나가는데?”

“방금 전까지 다 꽂아주신다면서요?”

“그거야...”

“힘 한번 써 주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신하율만큼 매칭되는 애가 없어요. 한번 상상해 보시라니까요?”

진영민의 닦달에 본부장이 마지못해 생각에 잠긴다.

머릿속으로 한복을 입혀보고, 머리를 땋고, 단아한 얼굴에 하얀 피부가 제법 살아난다. 게다가 청초한 얼굴에 단아한 이미지가 잘 어울렸다.

“...어?”

이미지를 떠올리자 갑자기 욕심이 난다.

“어때요? 장난 아니죠.”

진영민의 말에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한번 머릿속에 연상되자 이제 다른 여배우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래, 걱정하지 마. 내가 이번에 너 제대로 밀어줄 테니까. 나만 믿으라고.”

호기롭게 대답한 본부장은 서둘러 전화기를 꺼냈다.

***

“네, 네. 아... 네. 물론이죠. 근데 저희가 스케줄은 한 번 확인해 봐야 해서... 네, 네. 알겠습니다. 바로 연락드릴게요.”

전화를 끊은 성도윤 실장이 인상을 확 구긴다.

“아, 본부장님은 꼭 난처한 부탁만 하더라...”

성 실장이 한숨을 내쉬며 대기실로 들어간다. 안엔 대본을 보며 한창 연습 중인 신하율이 보였다.

“하율아, 너 혹시 이번에 사극 해볼래?”

“사극이요?”

신하율은 잠시 말을 아낀 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는 이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사극이면 톤도 다르고, 호흡도 다르잖아요. 제가 도전하기엔 아직 어려울 거 같은데요?”

“하긴, 그렇지?”

사실 성 실장도 신하율과 같은 생각이었다. 이제 신인인 데다가 간신히 현대극에 감을 잡았는데 굳이 사극에 도전할 이유가 없었다.

“근데 왜 갑자기 사극이에요?”

“하아, 너 타이거 스튜디오 하재봉 본부장 알지?”

“하재봉 본부장님이요? 아, 예전에 뒤풀이에서 한 번 인사드린 기억이 나요. 근데 왜요?”

“이번에 TCN에서 사극 하나 들어가는데 그걸 하 본부장님이 맡으셨나 봐. 안 그래도 이미 몇 번 거절한 터라 웬만하면 들어드리고 싶은데 왜 하필 사극이냐고...”

“흠. 어쩌죠?”

“어쩌긴, 거절해야지. 내가 잘 말씀드리면 되니까 넌 신경 쓰지 마. 솔직히 괜히 남 도와주려다가 같이 망하면 그게 그림 제일 안 좋으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한창 잘 나가고 있는 신하율을 두고 도박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근데, 혹시 작가님은 누구신데요?”

마음 약한 신하율이 미안한 듯 묻는다.

“그걸 안 물어봤네? 내가 한번 알아볼까?”

되묻던 성 실장은 이내 고개를 젓는다.

“아니다. 어차피 안 할 건데 굳이 그럴 필요 없겠다. 괜히 서로 얼굴만 붉히지.”

결심을 굳힌 성 실장이 고심 끝에 메시지를 보낸다.

아주 길고, 지루한 장문의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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