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52화 (52/203)

# 52. traditional - 전통적인 (4)

52.

***

문무자(文無子) 이옥(李鈺).

무반 출신의 한미한 집안의 자제라 가문이 온전히 계승되지 못했고, 임금으로부터 벌을 받고 군적에 오른 낙인찍힌 인물이라 무덤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문체반정의 모진 핍박 속에서도 자신의 글쓰기를 굽히지 않는 문학적 신념 덕분에 오늘날까지 뛰어난 문학작품을 남긴 인물이었다.

그의 지기인 김려는 이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사람됨이 깨끗하고 의기가 넘치는 인물.]

또한 이옥의 글에 대한 평가는 이보다 더 극적이었다.

[기묘한 정감과 특이한 생각이 마치 누에가 실을 토하는 것 같고, 샘이 구멍에서 솟아나는 것 같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임금의 총애를 받고 12세 되던 해부터 궁궐에 출입한 천재 문인 강이천은 다음과 같이 이옥의 글을 평가했다.

[이옥의 붓끝에는 혀가 달렸다.]

말 그대로 글에 관련해서는 더 이상의 칭찬이 있을 수 없는 극찬이었다.

이옥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던 정은미 피디의 얼굴이 순간 환해진다.

“와, 놀랍네요. 문체반정이라는 문학사의 길이 남은 거대한 사건과 정조라는 대중이 좋아하는 임금. 거기에 그런 인물과 대척점에서 자신만의 소신을 지키며 살아간 괴짜 선비의 이야기라니.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는 다 담겨있는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옥의 경우 묘지나 행장이 없어서 그의 생애에 관련해서는 자료가 별로 없어요. 고작 작품과 가계, 북보 등을 통해 단편적인 사실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죠.”

정 피디 눈이 순간 반짝인다.

“그 말인즉슨...”

“네, 고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해석하면서 캐릭터를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죠.”

이 포인트가 가장 중요했다.

대부분의 실존 인물의 경우 지나치게 많은 자료로 인해 오히려 고증에 발목이 잡히는 경우가 많았다.

그에 비해 이옥의 삶은 겨우 20년 전에야 연구가 되기 시작해서 알려진 바가 많이 없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그의 작품들도 절친인 김려가 후에 그의 글을 수습하지 않았다면 세상에 남겨지지 않았을 터.

문득 절친이자 극단 동료였던 존 헤밍즈(John Heminge)와 헨리 콘델(Henry Condell)이 떠오른다.

그 친구들이 노력이 아니었다면 나의 수많은 소네트와 작품 역시 함께 묻혔을 테니까.

내 작품이 아직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이유에도 친한 지인들의 도움이 있었다.

기획안에 대한 추가 설명을 들은 정 피디가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건 역사적인 사건을 다루는 방식보다는 문학사적 의미에서 파보면 더 좋을 것 같네요. 거대한 전쟁 씬은 없지만 그보다 더 밀도 있는 갈등 구조를 통해서 극의 긴장감을 올리는 거죠.”

역시 센스 있는 정 피디답게 정확히 작품의 컨셉을 읽어낸다.

“다만 극 초반의 이목을 끌 내용이 필요 할 거 같은데요?”

“그 부분도 충분히 해결 가능해요. 사실 이옥의 삶이나 작품에 대해 많이 알려져 있진 않지만 주변 인물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위인들이니까요. 이를 활용하면 극 초반에 관심도를 올리는 데 에도 좋을 거 같고요.”

설명을 들은 정 피디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정조에 연암 박지원, 거기에 김려와 강이천이면... 충분하긴 하겠네요. 아니, 이거 정말 대박인데요?”

이름을 하나씩 열거하는 정 피디의 표정이 조금씩 상기 된다.

그건 작품에 대한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었다.

***

늦은 밤.

상암역 근처 호프집.

연신 피식거리면서 술을 홀짝홀짝 마시는 진영민 CP 때문에 본부장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게 미쳤나,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거야?’

본부장은 속이 답답한 듯 생맥주 오백 잔을 단번에 비워냈다.

“야, 이제 말 좀 해보라니까? 권 작가랑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몇 번이나 재촉하자 그제야 진영민이 입을 연다.

“어떻게 되긴요, 얘기 잘했다니까요? 콘셉트 확실하고, 캐릭터 매력 있고, 듣자마자 딱 머릿속에 그려질 때 있잖아요. 그래서 시간 낭비할 거 없이 하자고 했어요.”

“아, 그거야 알지. 피디 머릿속에 작품 그려지면 게임 끝난 거라는 거. 근데 그 그림이 대체 뭐냐니까?”

“아이참, 좀만 기다려 보세요. 곧 기획안이 날라 올 테니까.”

태연한 진영민의 대답에 본부장은 숨이 턱턱 막힌다.

“야, 진영민. 내가 낙하산 작가 꽂았다고 지금 맥이는 거냐? 나 미쳐버리는 꼴 진짜 보고 싶어서 이래?”

본부장이 넥타이를 반대쪽으로 휙 돌리고는 눈을 크게 뜬다.

터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

“하여튼 성격도 급하셔.”

진영민은 마지못해 본부장을 달랠 겸 소주 한 잔을 따라준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뗐다.

“혹시 이옥이라고 아세요?”

“이옥? 그게 누군데?”

“아, 그거 봐요. 사람 이름도 모르니까 이건 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잖아요.”

“인마, 입은 장식이냐? 그러니까 설명을 하라고, 설명을!”

본부장이 애써 목소리를 누른 채 물었다.

“하아, 그럼 정조는 알죠?”

“너 나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냐? 대한민국 사람이 정조를 어떻게 몰라?”

“그래요. 근데 그 유명한 정조가 평생 동안 못살게 군 선비가 있다는 사실도 아세요?”

“선비? 그게 이옥이라는 사람이라는 거야?”

“네.”

“...”

듣고 있던 본부장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운다. 대답을 들었건만 머리 위에 떠오른 건 수많은 물음표뿐이었다.

“너 말은 그러니까... 이번에 주인공으로 내세울 인물이 이름도 잘 모르는 선비라는 거야? 그것도 오리지널 정통 사극에?”

“그 선비가 보통 선비가 아니에요. 지엄한 임금의 명령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게다가 괴팍한 기질까지 있어서 매력이 넘친다고요.”

“아니 그래도 고작 선비잖아? 뭐 조선 역사에 크게 이름 남긴 사람도 아니고.”

“하아, 내가 이러니까 기획안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 거잖아요.”

이번엔 진영민이 답답한 듯 술잔을 기울인다.

“본부장님, 솔직히 수많은 사극 기획안을 봤지만 다 거기서 거기였잖아요. 닳고 닳은 얘기라 새로울 것도 없고, 식상하다 못해 하품 나올 정도고. 하지만 이건 달라요.”

확신에 찬 목소리에 본부장도 집중한다.

“정조와 그 당시 조선에 대해 전혀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요. 지금껏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개인의 입장에서 거대한 권력을 올려다보는 그런 시선 말이에요.”

설명할수록 작품의 이미지가 진영민 CP의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그려진다.

덩달아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건 무조건 된다고...’

물론 반드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도 하나 있었다.

‘정통 사극이라면 대부분 스케일이 큰 내용들이 위주야. 역사에 길이 남은 긴박한 상황, 또는 웅장한 전투씬까지. 그런데 이옥의 삶은 매력적일 지언즉 거창하진 않았지...’

서사에 몰입하기 위해선 이옥과 함께 이야기의 거대한 축이 될 악역이 중요했다.

‘악역 없이 이옥의 이야기만으로 24부작을 끌고 가기엔 뒷심이 부족하니까.’

악랄하면서 또 매력적인 악역.

이 부분을 과연 어떻게 해결할지 지켜봐 했다.

‘솔직히 쉽지 않지...’

베테랑인 자신도 당장은 떠오르지 않은 문제점.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하, 내가 지금 기대하고 있는 건가? 고작 이번에 입봉 하는 작가의 기획안을?’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답답하기보다는 기대에 찬 자신의 눈빛이 그랬으니까.

***

며칠 뒤.

오수정 대리가 집 앞으로 찾아왔다.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진행 상황을 체크하기 위함이었다.

“생각보다 진영민 CP님의 반응이 좋던데요? 살짝 걱정하긴 했는데 제 걱정이 기우였네요.”

“사실 저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으리란 건 이미 알고 있었어요. 입봉 작가에, 신입 피디, 게다가 낙하산이니 그럴 만도 하죠. 게다가 정식 드라마 작가 코스를 밟은 것도 아니니까요.”

애초에 드라마 작가가 되는 코스는 작가교육원, 혹은 방송국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은 후 공모전에 입상하는 게 가장 일반적이었다.

“맞아요. 그렇게 어렵게 작가가 되어도 3개월에서 6개월간 이어지는 줄다리기 회의를 버텨내지 못할 때가 많거든요. 대본을 쓴다는 게 그만큼 힘든 작업인 거죠.”

여러 작가를 경험해 본 오 대리가 안타까운 듯 혀를 찼다.

사실 호흡이 긴 드라마를 쓰는 작가에게 필요한 역량은 단순히 대본을 잘 쓰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잘 쓴 대본은 기본이고, 유사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 감독과의 조율, 배우나 PPL 등 제작사와의 첨예한 갈등까지 감내하면서 대본을 써야 했다.

‘거의 1:1처럼 작품을 진행하는 웹드라마와는 전혀 달라.’

게다가 신인 배우들이 대부분인 웹드라마와 달리 미니시리즈 쪽은 인지도가 높은 배우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배우 입김도 세서 작가가 자칫 중심을 잡지 못하면 아차 하는 순간 대본이 산으로 가는 게 이 바닥이었다.

사실 그렇게 해도 이름을 남기는 작가는 극히 드물었다. 어느 정도 히트를 쳤다고 해도 배우나, 제목만 간신히 기억에 남지 작가의 이름은 쉽게 잊힌다.

왜?

그만큼 쟁쟁한 작가들이 너무나 많으니까. 방송계를 뒤흔들 만큼 놀라운 히트작이 아니고서야 이름 석 자 남기기도 어려운 게 이 바닥이니까.

물론 나는 그렇게 묻히는 작가가 될 생각이 없었다.

작품성과 함께 상업성을 고루 갖춘 웰메이드 사극을 통해 다시 한번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더 완벽해야 해.’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한 상태로 작품에 대해 구상하는 중이었다.

나는 오 대리와의 미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그동안 분석했던 사극 자료들을 살폈다.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수도 없는 작품들을 분석한 결과 몇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았어. 다만 문제점은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지.’

대본과 영상을 통해 철저하게 분석한 결과 최근 들어 사극이 연이어 망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매력 없는 악역이 문제였다.

주인공 미화를 위해 악의 축이 될 수밖에 없는 작위적인 설정으로 캐릭터의 매력을 느끼기 어려웠다.

고민한 흔적이 없는 악당, 단순한 이유로 주인공에게 협력하고 배신하는 모습은 한없이 가볍기만 했다.

게다가 이런 일차원적 악역의 갈등 구도는 악역의 존재 이유인 긴장감조차 만들어내지 못했다.

두 번째는 무조건 착하고 의로운 주인공이 문제였다.

실제 인물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쓸데없이 미화시키는 설정들로 인해 획일적인 전개가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긴장감은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극의 재미마저 사라졌다.

끝으로 고증 문제도 몰입도를 헤치는 큰 요인이었다.

‘최근 사극이 줄어드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

고증과 창작이라는 만족시키기 어려운 두 가지 요소로 인해, 결국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작품이 나오기 일쑤였다.

그래.

결국 극이 살기 위해선 매력적인 악역이 필요했다.

역사극에 대한 흐름과 전개, 묘사와 디테일은 이미 자신이 있었으니까.

악역.

극에 극도의 긴장감을 선사하는 안타고니스트(antagonist). 그러나 단순히 악역으로 정의하는 순간 오히려 작품의 분위기는 죽고 만다.

‘크게 성공한 사극엔 반드시 입체적인 악역이 있었어.’

악을 위해 존재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

그로 인해 주인공뿐만 아니라 상대의 가치관 역시 곱씹게 되면서 묵직한 질문을 하게 만드는 극적 장치.

악역이 평면적으로 그려지는 순간 사극은 권선징악을 내세운 지루한 역사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동안 작품 속에서 그렸던 수많은 악역들을 떠올렸다.

무섭고, 잔인하고, 그러나 때론 수긍이 가는 멋진 가치관에 뇌리에 오래도록 남는 한 악역들.

‘이옥이 살던 시기엔 누가 그런 역할에 어울릴까...’

그 순간,

매력적인 악역의 기운이 느껴지는 인물이 있었다.

‘가만, 정조 임금을 악역으로 세우면 어떨까...’

정조에 대한 새로운 해석.

역사의 길이 남는 위인이지만 이옥 개인에게는 철천지원수보다 두렵고 무서운 악역.

나라의 기강과 개인의 소신을 지키려는 두 인물의 대립. 그 농밀한 갈등이 내 머릿속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칼과 화살은 없지만 세 치 혀가 그 어떤 날카로운 무기보다 날카롭게 살을 베어낸다.

정당과 정치 이념, 유가적 사상이 천재 문인의 삶을 통째로 집어삼키며 압박해 온다.

비명소리 하나 없이 숨 막힐 듯 조여 오는 긴장감.

거대한 권력 앞에서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치는 한 선비의 절박한 절규까지...

‘그래, 이거야!’

나는 키보드에 손을 올린 채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이야기를 옮겨 적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타다닥 타다닥.

타자 소리가 쉬지 않고 이어지지만 좀처럼 내 생각을 타자 속도가 따라주지 못했다.

‘더 빨리, 더 빨리...’

솟구친 영감이 어느새 하얀 여백을 까맣게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세 시간 뒤.

나는 정식으로 작성된 첫 기획안을 진영민 CP에게 전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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