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traditional - 전통적인 (3)
51.
***
회의실 밖.
1시간째 아무 소식이 없자 정은미 피디는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하아,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부를 때까지 들어오지 말라고 경고한 진영민 CP 때문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편히 일도 못 한 채 서성이기를 벌써 1시간째였다.
“얘기가 잘 됐으려나?”
간절히 바래보지만 헛된 희망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회의실에 들어가기 전 진영민 CP의 표정을 직접 봤으니까. 이를 악다문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는데 누구 하나 잡을 기세였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한 정 피디가 문에 귀를 대고 엿듣는다.
그런데 그때, 타이밍 좋게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린다.
“으악!”
순간 균형을 잃은 정 피디가 몸을 부딪친다.
“아, 앗 죄송합니다.”
당연히 진영민 CP가 문을 박차고 나왔다고 생각한 정 피다가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건넨다.
“괜찮으세요?”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
뜻밖에도 권서준 작가가 먼저 나왔다.
“어? 작가님!”
정 피디가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다가간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네, 저야 잘 지냈죠. 그보다... 어떠셨어요?”
정 피디가 회의실 안을 힐끗거리며 물었다.
“뭐, 나쁘지 않았습니다.”
무표정한 표정에 차분한 말투. 겉만 봐서는 어떤 상황인지 전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일단 작품의 큰 방향성에 대해선 진영민 CP님이랑 얘기했으니까 한번 말씀 나눠보세요.”
“아... 네.”
권서준은 짧게 묵례를 하고는 회의실을 벗어났다.
‘하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생각할수록 어떤 분위기인지 감을 잡기 어려웠다. 까다로운 진영민 CP라 어설프게 넘어갔을 리는 없는데...
‘모르겠다. CP님이 뭐라고 해도 난 작가님 의견에 따를 거니까.’
이미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어떻게 되더라도 권서준 작가의 작품과 방향성을 지킬 생각이었다.
똑똑.
정 피디가 노크와 함께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간다.
아니나 다를까 진영민 CP의 표정이 심상찮다. 잔뜩 굳은 표정, 정 피디가 맞은편에 앉았음에도 말이 없다.
“저... CP님? 괜찮으세요?”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미간을 잔뜩 모은 채 생각에 잠긴 듯 계속 턱을 쓸어낼 뿐이었다.
“CP님?”
“야, 정 피디.”
다시 묻는데 갑자기 질문이 되돌아온다.
“...넵.”
긴장한 채로 대답했지만 진영민 CP의 시선은 여전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또다시 흐르는 정적.
잠깐의 긴장감이 흐르고 진영민 CP가 입을 연다.
“권 작가 말이야...”
“네...”
정 피디는 바짝 긴장한 채 마른 침을 삼켰다. 어떤 말이 나오더라도 권서준 작가의 편에 서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원래 저렇게 말을 잘하냐?”
“네... 네?”
대화의 흐름이 조금 이상했다.
“하, 참나. 무슨... 청산유수가 따로 없네.”
진영민이 헛웃음을 한 번 터트리더니 뭐에 홀린 듯 종이 뭉치를 들고 서둘러 나간다.
“...뭐지?”
홀로 덩그러니 남은 정 피디는 머리를 긁적였다.
분명 권서준 작가와 진영민 CP 단둘 뿐이었던 회의실이었다.
‘대체,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정 피디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다.
***
진영민은 멍한 표정으로 서둘러 옥상을 찾았다. 한겨울의 찬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지만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믿기지가 않았다.
“어? 선배님!”
담배를 피우고 있던 후배 하나가 진영민을 알아보고 다가와 인사를 한다.
“어, 어. 그래.”
진영민은 대충 인사를 받고 지나치다가 갑자기 다시 돌아와 묻는다.
“야, 맞다. 너 국문과 나왔다고 했지?”
“네, 그런데 그건 왜요?”
“너 혹시 이옥이라는 사람 아냐?”
“이옥이요? 아니요. 그게 누군데요? 신입이에요?”
“...됐다.”
진영민은 고개를 저었다.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던 후배가 넌지시 말을 건다.
“근데, 선배님. 표정이 왜 그러세요?”
옆에 있던 또 다른 후배가 슬쩍 끼어든다.
“왜긴, 그 낙하산 작가랑 미팅 있었잖아.”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 맞다. 오늘이 그날이구나. 어때요? 그렇게 꼴통이에요?”
“꼴통? 아... 나도 모르겠다.”
진영민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적거리고는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꺼내 물었다.
“후...”
찬바람과 함께 담배 한 모금을 마시고 난 뒤에야 조금 정신이 돌아온다.
진영민은 몇 달째 자신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던 올해 제작 스케줄을 떠올렸다.
타이거 스튜디오에선 이번 연도 새해에만 드라마 10편이 제작 예정이었다.
하반기에도 무려 5편 이상의 작품이 제작을 대기하고 있는 상황.
특히 가장 많은 제작비가 배정된 채널 TCN의 사극 제작은 기획제작 7팀이 맡은 상태였다.
담당 CP 입장에선 굴러들어온 기회.
다만, 마땅한 작품이 없어서 골치를 앓는 중이었다.
거기에 갑자기 낙하산 작가까지 투입되자 전두엽이 뜨거워질 정도로 스트레스 지수가 치솟았다.
‘근데, 이건 할 만한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낙하산 작가에게 해법을 찾은 기분이었다.
‘이옥이라...’
진영민은 권서준 작가가 설명해준 이옥에 대한 설정을 떠올렸다.
‘확실히 매력적이야. 곱씹을수록 뽑아낼 것도 많고.’
생각에 잠긴 진영민은 자연스럽게 손에 들린 종이를 펼쳤다. 권서준 작가가 가기 전에 주고 간 기획안이었다.
권서준 작가는 회의실을 떠나기 전, 쿨하게 정리한 기획안을 내밀었다.
‘권 작가님, 이거 저한테 주고 가도 되는 건가요? 정식 기획안 만드실 때 필요할 거 아닌가요?’
‘괜찮습니다. 이미 제 머릿속에 정리된 내용이거든요.’
그 말인즉슨 회의실에서 나눈 부연 설명은 모두 진영민 CP를 위해 했다는 뜻이었다.
‘설마 오는 길에 이 모든 걸 기획한 건가? 24부작짜리 사극의 전체 개요를?’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었다.
어느 작가가 담당 CP 앞에서 준비된 기획안도 없이 왔다고 당당히 말할까. 싸우자는 생각이 아니면 절대 그럴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믿기 어려웠다.
사실 몇 달에 걸쳐 기획안을 쓴 작가도 자기 작품의 전체 스토리를 이보다 선명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그만큼 등장인물도 많고, 사건도 많고, 칡뿌리처럼 얽힌 갈등도 많았으니까...’
그런데 권서준은 마치 스케치하듯 이야기의 전체 흐름을 설명했다. 마치 진영민 CP의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주는 듯한 설명이었다.
‘하아,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네.’
눈앞에서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손에 들린 기획안을 보면 또 사기는 아니었다.
‘흔하디흔한 낙하산인 줄 알았는데...’
첫인상만 보면 확실히 그동안 만나왔던 작가와 다른 부분이 있었다.
그렇다고 한 번에 다 믿을 순 없었다.
용두사미 작품이야 얼마든지 많았으니까.
다만 희망을 봤다는 건 책임자 입장에선 두 손을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일단은 해볼 만해.’
막막하기만 했던 사극.
처음으로 희망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결단을 내린 진영민은 서둘러 전화기를 들었다.
***
타이거 스튜디오 로비.
나는 급히 연락 온 정 피디와 함께 잠시 차를 마셨다.
“네? 진영민 CP님이 관심을 보이셨다고요?”
미팅 관련 얘기를 들은 정 피디가 놀란 듯 되물었다.
전혀 예상 못 했다는 반응.
달리 말하면 내부적으로 그만큼 입봉 작가에 대한 반대가 심했다는 뜻이었다.
“아, 죄송해요. 저희 CP님이 워낙 깐깐하신 분이라...”
자신의 반응이 격했다는 걸 깨달은 정 피디가 어색하게 웃으며 급히 수습에 들어간다.
“대체 어떻게 설득하신 거예요? 솔직히 반대가 엄청 심하셨거든요.”
“마침 오늘 미팅 오는 길에 생각해둔 기획안이 있어서 설명해 드렸을 뿐이에요.”
“네? 오시는 길에요? 완벽한 기획안이 아니고요?”
“네, 급히 오느라 스케치 정도만 간신히 해왔거든요. 물론 작품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해드렸고요”
정 피디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그 깐깐한 진영민이 그런 방식의 설득에 넘어갔다는 게 이해가 안 가겠지.
그러나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마 곧 연락이 올 테니까.”
확신에 찬 나의 대답과 달리 정 피디의 표정은 복잡했다. 자신이 뭔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생각이 많아 보였다.
지이잉.
그런데 그때, 정 피디의 휴대폰이 울린다.
“아, 네. 정은미입니다.”
발신자를 확인한 정 피디가 얼른 고개를 돌려 전화를 받는다.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보니 누구인지 대충 예상이 간다.
“네, 네. 네? 아, 네. 같이 있습니다.”
정 피디가 눈빛으로 양해를 구하며 통화를 이어간다. 그런데 정 피디의 눈이 커진다.
“네? 그게 정말인가요?”
갑자기 올라간 목소리에 급히 주변을 살피며 언성을 낮춘다.
“아니요, 속고 산 건 아니지만... 네,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정 피디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듯 멍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그게, 지금 전화하신 분이 진영민 CP님이신데요...”
놀란 정 피디가 몇 번이나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답한다.
“바, 바로 집필 들어가자고 하시는데요?”
정 피디의 눈은 작아질 줄을 몰랐다.
하긴, 그 깐깐한 진영민 CP가 정식 기획안도 없는데 바로 집필 단계로 넘어가자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겠지.
그러나 아직 놀라기엔 일렀다.
‘아직 대본은 보지도 않은 상태니까.’
내가 쓴 대본을 보면 또 얼마나 놀랄까.
벌써부터 내 머릿속엔 파란만장했던 이옥의 삶이 거침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
상암 근처 일식집.
타이거 스튜디오 본부장은 JW엔터테인먼트 성도윤 실장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요즘 신하율이 잘나가더라. 작년까지만 해도 유망주 정도였는데, 이젠 어엿하게 배우 티도 나고 말이야.”
“애가 워낙 노력파거든요. 웬만큼 어려운 연기도 시키기만 하면 다 잘한다니까요? 덕분에 저도 진급했잖아요.”
“그것도 맞지만 자네는 원래 더 빨리 진급하는 게 맞았어. 애들을 그렇게 잘 키워내는데 만년 팀장은 말이 안 되지.”
자연스럽게 덕담이 오간다.
그러다 슬쩍 본부장이 속내를 꺼낸다.
“말 나온 김에 말이야, 다음 작품 우리랑 하는 건 어때?”
“저희야 본부장님이 부르시면 언제든 가능하죠.”
“자네, 그렇게 말하고 저번에도 다른 데랑 계약했잖아?”
“또 서운하게 왜 이러세요. 그땐 타이밍이 안 좋았잖아요.”
분명 허허 웃으며 거리며 하는 대화인데 묘하게 날카로운 분위기였다.
“참, 요즘 진영민 CP는 잘 지내나요?”
성 실장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린다.
“영민이? 영민이는 갑자기 왜?”
“아니, 뭐 들리는 말에 의하면 낙하산 작가 하나 때문에 고민이 많다고 하던데...”
본부장이 순간 놀라 묻는다.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알아?”
“이 바닥에 비밀이 어디 있어요? 척하면 척이지.”
“하아.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난리도 아니야. 아무튼 거기까지만 알고 있어. 회사 욕 해봤자 누워서 침 뱉기니까.”
본부장은 쓴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1시간 뒤.
반주를 곁들인 짧은 식사를 마친 본부장이 본사로 돌아왔다.
‘하, 여우 같은 놈. 요리조리 잘도 피하네.’
하반기에 들어갈 16부작 미니시리즈 주연으로 신하율을 넣을까 했는데 쉽지가 않았다.
‘그나저나 영민이 놈, 미팅은 잘 끝냈으려나?’
후배에, 부하직원이지만 상사 입장에서 진영민 CP만큼 까다로운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본부장 역시 피디 출신이라 진영민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긴, 나라도 엿 같지. 내가 책임져야 할 작품에 갑자기 낙하산이 날아와 꽂히면...”
본부장은 미안한 마음에 일부로 제과점에 들려 양손 가득 빵을 샀다.
역시나 기획제작 7팀 사무실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본부장은 조심스럽게 진영민 CP에게 다가갔다.
“영민아, 어떻게 됐어? 회의는 잘 됐어?”
“...”
옆에서 말을 걸었지만 뭐에 그렇게 집중하는지 대답이 없었다.
“야, 진영민?”
재차 부르자 그제야 진영민이 고개를 돌린다.
“어? 언제 오셨어요?”
“어떻게, 회의는 잘했어?”
“...뭐, 그런 거 같아요.”
대답은 하지만 아직도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본 본부장은 아직도 서운해서 그런 거라고 판단했다.
“인마, 진짜 미안하다. 내가 조만간 거하게 술 살게. 그러니까 화 좀 풀어.”
“술이요? 술은 제가 사야 할 거 같은데요?”
“그래, 내가 너 원하는 거로... 뭐라고?”
순간 본부장이 눈을 깜빡인다.
“제가 사드린다고요. 본부장님.”
“...”
본부장은 얼떨떨한 얼굴로 쳐다본다.
“권 작가 같은 귀인이 제 발로, 아니 낙하산을 타고 친히 날아왔는데 제가 걷어찰 뻔했잖아요. 그러니 술은 제가 사드려야죠.”
진영민은 미소까지 지은 채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
본부장은 멀어지는 진영민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게... 충격이 커서 미친 건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진영민의 반응.
본부장은 두 손에 든 빵을 처리하지도 못한 채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